그러니까 시시껄렁한 얘기 집어치우고 우리 이런 설교 좀 듣자 이겁니다--하나님의 침묵은 무신론자와 신자 모두에게 문제였다.

by 김원일 posted Aug 06, 2013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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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무신론자

시편 14:1-7

 

곽건용 목사

 

구약에는 무신론자가 없다?

 

구약에는 무신론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고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고대 이스라엘에 무신론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구약학자뿐 아니라 일반 종교학자들까지 동의하는 학계의 ‘정설’(定說)입니다.

 

과연 옳은 말일까요? 싱겁지만 한편으론 맞지만 다른 한편으론 맞지 않습니다. 일단 고대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거대 문명권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도 무신론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신이 일종의 사회적 규범이고 질서였고 무신론은 그 규범과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간혹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지만 질서와 규범 때문에 침묵된 목소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규범화되어 있고 질서로 굳어져 있는 신의 존재에 대해 반기를 들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어차피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어렵지만 반대로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도 어려운 일 아닙니까. 이는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에 무신론이 없다는 말이 반드시 옳지는 않은 것이, 오늘 읽은 시편 14편이 말하듯이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내놓고 외치진 못했나 봅니다. 규범이 두려웠겠지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라도 그렇게 믿었다면 그는 무신론자임에 분명합니다. 구약에도 무신론자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틀렸을까요? 학자들이 시편 14 1절을 몰랐을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이 시편은 바로 1절 때문에 널리 알려진 시편인데 학자들이 이를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학자들은 구약엔 무신론이 없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이유는 무신론의 정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이 말하는 무신론은 이론적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존재론적으로 신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반면 시편 14편의 무신론은 이론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신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론적 무신론과 실천적 무신론은 같지 않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 신념이 아니라 신이 ‘지금 여기’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이 이론적으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없으면 그런 신은 없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신이 저 하늘 높은 곳에 앉아서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개의치 않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런 신은 없다는 게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예컨대 누군가가 “내게는 돈이 없다.”라거나 “내게는 먹을 게 없다.”고 말했다고 칩시다. 이 말은 세상에 돈이나 음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게’ 없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그것들이 ‘항상’ 내게 없다는 말도 아니고 ‘지금’ 내게 없다는 말입니다. 이론적 무신론과 실천적 무신론의 차이를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모든 비유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둘이 정확히 비교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핵심은 전달됐다고 믿어봅니다.

 

실천적 무신론

 

시편 14편의 무신론은 이론적 무신론, 또는 존재론적 무신론이 아니라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서에는 존재론적 무신론자는 없지만 실천적 무신론자는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실천적 무신론자는 어떤 사람이고 그들은 왜 그렇게 믿으며,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모두가 하나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주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모두들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없다’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 시편은 이 말에 대한 주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없다’고 믿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시인은 그를 ‘불경한 사람’이나 ‘신성모독자’라고 부르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부른 데서 어떤 인상을 받습니까? 물론 ‘어리석은 사람’이란 말은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서 특히 잠언과 전도서 등 지혜문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 반대는 물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말이 고유한 의미를 갖는 특수용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말이 주는 느낌은 조롱이나 비아냥거림, 또는 낮춰보거나 깔보는 것입니다. 곧 시인은 ‘하나님은 없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을 위협으로 느끼기보다는 낮춰보고 있는 겁니다.

 

이 말만 갖고 보면 당시의 사정은 오늘날과는 반대로 보입니다. 오늘날에는 무신론자들이 종교는 낮춰보고 비아냥거리지 않습니까? 종교 따위는 벌써 졸업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를 원시적이고 미개한 현상으로 바라본다는 얘기입니다. 교회는 무신론자들의 조롱 어린 공격에 움찔하며 위협으로 받아들여 교리와 신학을 방어하는 데 힘을 기울입니다. 시편 시대에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기에 그 주장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말했지만 요즘은 얼마든지 드러내놓고 말하고 공론화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부르며 낮춰 보는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시편 전체를 잘 읽어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은 실천적 무신론자를 낮춰 보지 않습니다. 이는 문학적 기교요 수사학적 전략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를 조롱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들이 어떤 짓을 하는지 상세히 묘사합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썩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착한 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며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 찾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시지만 모두들 그릇된 길에 빠져있고 하나같이 썩어서 착한 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다들 썩었답니다. 그릇된 길에 빠져들었고 정도를 벗어났답니다. 선한 일 하는 사람이 없다고도 합니다. 시인은 이론적 무신론자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기가 하는 짓을 하나님이 지켜보지 않는다고 믿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곧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그의 관심의 초점입니다. 무신론자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악을 행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자입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지켜보지 않는다고 믿고서 제 맘대로 행하는 사람, 하나님이 없는 곳에선 모든 게 가능하므로 욕망을 실현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마구 억압하고 후려치는 사람들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무신론자다!

 

시편 14편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이 노래를 부른 시인의 자리가 어딘가 하는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악행을 벌이는 어리석은 자와 한편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악행에 고통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의 자리에 서있지도 않습니다. 시인이 서 있는 곳은 제3자로서 관찰자의 자리입니다. 그는 그 누구의 편에도 서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는 무신론자에게 억압당하는 가난한 자와 같은 편이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관찰자의 자리가 나쁘나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자리가 그렇다는 말일 따름입니다.

 

시편 14편과 같은 내용을 무신론자의 악행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자리에 서서 노래한 시가 있는데 시편 10편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

악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핍박합니다.

악한 사람은 자기가 쳐 놓은 올가미에 자기가 걸려들게 해주십시오.

악한 자는 자기 욕망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주님을 모독하고 멸시합니다.

악인은 그 얼굴도 뻔뻔스럽게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란 모두 이러합니다.

그런데도 악인이 하는 일은 언제나 잘 되고

주의 심판은 너무 멀어서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니

악인은 오히려 반대자를 보고 코웃음만 칩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내가 망하는가 두고 봐라. 나에게는 불행이란 없다."하고 말합니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기만과 폭언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혀 밑에는 욕설과 악담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으슥한 길목에 숨어 있다가 은밀한 곳에서 순진한 사람을 쳐 죽입니다.

그들의 두 눈은 언제나 가련한 사람을 노립니다.

굴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서 기다리다가

때만 만나면 연약한 사람을 그물로 덮쳐서 끌어갑니다.

불쌍한 사람이 억눌림을 당하고 가련한 사람이 폭력에 쓰러집니다.

악인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얼굴도 돌렸으니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다" 합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 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 시편을 쓴 시인은 시편 14편을 알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다만 같은 주제의 노래를 고통당하는 사람의 자리에서 썼을 뿐입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두 편의 시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침묵은 무신론자와 신자 모두에게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은 둘 다에게 공통적으로 문제란 말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침묵 덕분에 제 맘대로, 제 욕심껏 행동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하고 울부짖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지금 여기’ 안 계신다는 게 문제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 안 계시므로 하나님이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후자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여기 오소서!”라고 울부짖습니다. 이게 올바른 행동일까요? 그저 하나님께 울부짖기만 하는 게 믿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인가 말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믿는 사람들에게 “그게 최선입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돼야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신약성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에도 무신론자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이론적 무신론자 말고 실천적 무신론자 말입니다. 예수님더러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1-25).

 

예수님은 여기서 주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 자는 예수더러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아니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한 사람도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는 어떤 사람을 가리킬까요? 아버지의 뜻이란 게 율법 조문처럼 구구절절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온 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나님의 뜻의 일부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란 이름으로 주어진 ‘새로운 법’을 구구절절 행하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을 ‘지금 여기서 하나님처럼 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자기 맘대로 행할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여, 여기 오소서!”라고 부르짖는 데 그치지 말고 만일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셨더라면 하셨음직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하셨을 것 같은 바로 그 일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행동을 믿는 사람들이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걸 이론적으로 입증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입증할 수 없다고 해서 신앙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계심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 방법은 기묘한 이론과 논리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곳에 내가 가서 하나님이 거기 계셨더라면 했을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시편 14편의 시인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노래합니다(6).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이 일은 예수께서 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 지금’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 가셔서 거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죄인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세리와 창녀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그들을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여겼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몸소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저는 그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신성 역시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라고 보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예수님은 이론적으로 하나님인 게 아니라 실천적으로 하나님이란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셨음직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애기입니다.

 

시편 14편의 시인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들, 곧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자들이 아무리 잘난 척 하고 맘대로 날뛰어도,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찾아보기 어려울지라도 야훼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신다는 믿음을 확고히 갖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는, 그리고 예수께서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던 바로 이 연대를 우리가 유지하자는 겁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되자는 겁니다. 그들에게 군림하자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도 그들에게 군림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들과 굳건히 연대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실천적 신앙인이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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