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밀어내기 몸싸움 좀 해야지: 글 세 번 연속 올리기^^--하나님을 위한 자유(freedom for God) 또는 하나님에게로 가는 자유(freedom to God)--하나님 원수 갚기

by 김원일 posted Aug 06, 2013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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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 6 30 / 성령강림절 일곱 번째 주일

 

나를 샅샅이 아시는 하나님

시편 139:1-24

 

곽건용 목사

 

CCTV 하나님?

 

수사극에서 과거에는 사건이 벌어지면 수사관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목격자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물증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형사 콜롬보’라는 TV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후줄근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어수룩해 보이지만 아주 작은 단서를 붙들고 늘어져서 범인을 잡는 그에게 한때는 매우 매료됐습니다. 이 드라마의 특징은 많은 경우 목격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콜롬보 형사는 목격자가 없는 사건을 처리하기에 더욱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져서 요즘은 사건이 생기면 수사관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목격자를 찾는 일이 아니라 CCTV를 확인하는 일이 됐습니다. 그만큼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목격자보다 더 큰 역할을 합니다. 물론 TV나 영화 수사극은 대부분 CCTV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해결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비밀이 없는 세상이라고 말들 합니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제가 20년 전 미국에 왔을 때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알려고 하면 정보기관이 제 식성이 뭔지도 안다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정보기관이 제 식성이 궁금할 리는 없지만 말입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제가 마켓에서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면 뭘 샀는지 전부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제 식성도 알려면 알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때 저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사정은 더 심각합니다. 얼마 전에 미 정보국 직원 한 사람이 정부가 불법으로 시민들을 사찰해왔다고 밝힌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거엔 시편 139편을 읽으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안심도 되고 기분도 좋아지곤 했습니다. 제가 어딜 가든 하나님께서 절 지켜주시고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다 알고 계시다니 얼마나 기분이 좋고 안심이 됩니까! 그때 그랬던 이유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CCTV도 그와 비슷한 일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을 알고 나니 제가 어딜 가든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고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역시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편 139편을 읽으면 전과는 다른 느낌이 듭니다.

 

주님,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지금 이 시편을 읽으니 ‘하나님은 CCTV인가?’라는 발칙한 생각까지 듭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시인은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께서는 내가 그 혀로 무슨 말을 할지를 미리 다 알고 계십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요즘 상대방의 눈만 보면 그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젊은이가 나오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그 드라마 생각이 나네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느 누가 그 청년 앞에서 그를 바라보겠습니까. 사정이 이래서 시인은 또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여기서 ‘스올’은 구약성서에서 죽은 사람이 가서 머무른다고 믿었던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할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CCTV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렇듯 하나님이 모든 걸 알고 계시고 어딜 가도 계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시인은 두 가지를 상반된 느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데서 오는 안심과 감사가 그 중 하나이고, 하나님에게 일종의 감시 같은 것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다른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보호받고 있음에 대한 감사의 느낌은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힘 있게 붙들어 주십니다.”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은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라는 표현에 드러나 있습니다. 다 좋은 말 같지만 사실 시인은 어둠 속에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겁니다. 물론 전자의 느낌이 더 강하지만 시인이 두 가지 느낌을 다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CCTV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의 시인이 이런 느낌을 표현했다는 점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제삼자가 아닌 당신!

 

이 시편은 신학자들이 매우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어디나 계심을 이 시편보다 더 잘 표현한 구절을 성경에서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 자신이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다.”라거나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 “나는 어디든 있다.”라고 말하는 구절은 찾을 수 없습니다. 아마 있더라도 그렇게 확실히 표현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얘기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한 말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의 ‘고백’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선언’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겁니다.

 

제가 ‘고백’이란 말을 썼지만 이 시편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시인이 무슨 대단한 신학자여서 신학적 진술을 한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경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해서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일반적인 신학적 진술을 이끌어내는 일은 잘하는 일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

 

이 시편은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시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시편이 우리와 무관하거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노래한 시편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더 강렬합니다.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점은 하나님을 ‘당신’(you)이라고 부르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며 친밀하게 대화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시편을 ‘대화적 시편’이라고 부르는데 참 좋은 이름 아닙니까. 이 시는 하나님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나누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20세기 중반에 큰 영향을 미친 유대인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나와 너>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우리가 맺는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로 구분했습니다. 나와 너는 두 인격 사이에 쌍방 간에 소통이 이루어지는 관계이고 나와 그것은 상대방을 객체로서 대상화하는 관계입니다. 물론 소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을 철저하게 ‘당신’으로, 대화가 가능한 분으로 본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나를 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속속들이 아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관계적인 존재임을 잘 압니다. 인격 대 인격의 관계 속에 계시는 분, 그 관계 속에서 나를 만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잘 알고 있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제삼자(it)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주위에서 그저 가만히 계시는 주위환경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대화할 수 있는 인격체이고 소통 가능한 분입니다. 사람은 주변 환경 같은 분에게 헌신하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헌신과 고백은 소통이 가능한 분 하고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란 사실을 이 시편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자유

 

따라서 이런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시인의 말은 감옥에 갇혀 있는 수감자의 언어가 아닙니다. CCTV의 사각지대를 찾아다니는 범죄자의 그것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노래하는데 여기서도 양면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맞지만 이 벗어남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벗어남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벗어남입니다. 곧 하나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어서,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귀속되고 싶어서 하나님에게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께 속하고 싶어서 잘못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싶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은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성취되는 최후의 자유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무엇에 종속되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그래서 이제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만 남았을 때 사람은 뭘 느낄까요? 거기까지 가보지 않았지만 저는 이렇게 상상합니다. 최후의 자유,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만 남았을 때 사람이 느끼는 것이 하나님에게 귀속되고픈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최후의 자유는 결국 하나님에게로 들어가는 자유란 얘기입니다. 이를 하나님을 위한 자유(freedom for God) 또는 하나님에게로 가는 자유(freedom to God)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신 것의 궁극적 목표는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게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실의 전부도 아닙니다. 야훼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켜 자신을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그저 파라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파라오에게서 해방시켜 당신만 섬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곧 최종목표는 당신을 섬기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곧 야훼 이외에는 그 누구도 섬기지 않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나사렛 예수를 ‘주님’(그리스어로 ‘퀴리오스’)라고 부른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주님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주님’이란 말은 로마 황제를 부를 때 썼는데 그들은 황제 아닌 예수를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황제를 주님으로 부르고 섬기길 거부했음을 뜻합니다. ‘무엇을 위한 자유’이고 ‘누구에게로 가는 자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계신다면 맘 한 구석이 불편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이 되는 까닭은, 하나님은 모든 걸 다 알고 계시지만 절대로 남에게 그걸 발설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내게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내 안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목소리’ 또는 ‘양심의 목소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미워하라!

 

한 가지만 더 얘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원수’에 대한 얘기가 그것입니다. 시의 분위기는 19절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앞까지 하나님과 시인의 밀접한 관계를 노래하던 시인이 19절부터는 갑자기 다른 느낌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 주님은 분명히 악인을 죽이십니다.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거라.

그들은 주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며

주의 이름을 거슬러 악한 말을 합니다.

주님,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으며

주님께 대항하면서 일어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들을 너무나도 미워합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원수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굳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원수에 대한 시인의 증오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시인은 원수를 미워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심지어 원수가 죽기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이런 노래를 감상하는 일은 매우 불편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을 드러내는 노래를 감상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더 괴롭습니다. 아무리 원수라 할지라도 그의 파멸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일은 무척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데, 전에 우리 예배순서에는 시편교독이 있었습니다. 이때 시편을 선택할 때 저는 이렇게 원수에 대한 증오를 표현한 대목은 한 번도 교독문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꼭 그렇지는 않네요.

 

원수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 않고 표현한 데 대해서 몇 가지만 말씀하겠습니다. 첫째로 시인의 솔직하고 진실함에 눈길이 갑니다. 그는 자기의 증오를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내 속마음을 숨기지 말고 다 드러낼 수 있는 분이 존재한다면 그분은 마땅히 하나님이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기도할 때나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100% 솔직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눈치까지 봅니다. 그런데 시인이 이토록 솔직하게 원수에 대한 증오를 드러냈다는 사실은 그가 위선자이거나 외식(外飾)하는 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둘째로 그가 파멸되기를 바라는 원수는 자신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란 점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개인의 원수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나 자신에게도 불편한 일인데 그를 공동의 적으로 만들면 그래도 맘이 조금은 편해지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 유혹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살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성인(聖人)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은 그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을 느낍니다.

 

제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 곧 공공의 적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원수, 곧 다수의 사람을 괴롭히고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공공의 적/하나님의 원수를 미워하면 개인의 원수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사사로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얘기는 오래 전에 읽은 이영희 교수의 글입니다. 그는 한국전쟁 때 통역장교였는데 하루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군목이 적군을 원수라고 부르며 그들을 물리쳐달라고 기도하는 걸 봤답니다. 이를 본 이 교수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죽고 죽이는 판에 어떻게 하나님에 자기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상대방을 원수라고 부르며 그들을 죽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답니다. 자기의 적을 공공의 적 또는 하나님의 적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를 자긴 절대 믿을 수 없더라는 것이지요. 저도 이 교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나의 원수는 나의 원수일 따름입니다. 어제의 동지가 내일엔 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도외시하더라도 공공의 적이 아닌데도 억지로 그렇게 만들어놓고 모두가 미워하자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만의 관심사가 아닌 하나님의 관심사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나만의 관심사입니까, 아니면 모두의 관심사 곧 하나님의 관심사입니까?

 

마지막으로 시인은 직접 원수에게 보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시인을 비롯해서 성서의 모든 의인들은 원수에 대한 복수를 직접 시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것이요 보복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저항은 비폭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경험적으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 누군가를, 그 무엇인가를 섬기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누굴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누군가를 섬기게 되어 있다면 우상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섬기지 말고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옳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어 있다면 나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 공공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를 미워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면 끝없는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분이 아니라 나를 바로 세워주는 분, 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분을 사랑하는 게 맞지요.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들과 일들을 미워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지난 두 달 간의 시편 설교 마지막으로 139편을 읽었습니다. 영원히 마지막은 아니고 당분간 그럴 뿐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님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그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마음 단단히 가다듬으십시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통째로 뒤집어 엎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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