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이거, 큰일날 설교 아냐?

by 김원일 posted Aug 20, 2013 Likes 0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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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14 / 성령강림절 아홉 번째 주일

 

그래서 죽이려 했구나!

마가 3:1-6

 

곽건용 목사

 

예수는 정말 대속의 희생 제물이었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말씀할 것은 오늘 설교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내용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오늘 설교가 아직까지 여러분이 교회에서 듣고 배워온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설교는 어떻게 하자, 어떻게 살자는 쪽보다는 제대로 알자, 바로 깨닫자는 쪽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결국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바로 살려면 바로 알고 옳게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는 바로 알고 제대로 깨닫자는 겁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사도신경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고백이 통째로 빠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데 예수가 누군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왜 죽었는지에 대한 얘기가 빠져 있다는 건 중대한 문제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사도신경을 만들어낸 고대교회가 사건 그 자체를 올바로 이해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신앙적 해석에 치중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역사적 예수와 그분이 하신 일을 통틀어서 ‘예수사건’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예수사건에 대한 신앙적 해석은 다양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예수사건을 구약성서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른바 ‘예언과 성취의 도식’이 그것입니다. 예수의 이러저러한 말씀과 그분이 일으킨 이러저러한 사건은 이미 수백 년 전 구약성서에 예언된 바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란 해석 말입니다. 또한 이는 복음서 기자들의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그게 그들의 역사관이었지요.

 

이 해석의 대표적인 예가 예수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이었다는 해석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이렇게 믿어왔지요? 그랬을 겁니다. 그게 교회의 모범적인 신앙고백이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그게 ‘유일하게 옳은’ 신앙고백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이 전통은 매우 확고하고 완고하기까지 합니다.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즉각 엄청난 반발에 부딪쳤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예수사건에 대한 ‘유일하게 옳은’ 신앙고백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사건을 희생 제물로 해석하고 고백한 것은 분명 어떤 관점에서 옳은 해석이요 고백입니다. 하지만 그게 유일하게 옳진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사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고 하나의 고백이긴 하지만 유일하진 않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구약성서에 비추어 예수사건을 해석한 ‘하나의’ 해석이고 거기 기반을 둔 ‘하나의’ 신앙고백임에 분명합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사건에 대한 ‘유일한’ 해석도 ‘유일하게 옳은’ 신앙고백도 아닙니다. 더욱이 이것이 구약성서에 비추어 예수사건을 해석한 유일한 해석도 아닙니다. 구약성서에 비춰 봐도 다른 해석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왕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으로 해석한 것이 그 중 일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를 희생 제물로 해석한 것은 ‘하나의’ 해석일 따름입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측면을 강조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죄를 지은 본인이 벌을 받지 않는다면 대신 다른 사람이라도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죄를 졌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심판을 받아야 하게 됐지요.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했을까요? 노아 홍수 때처럼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이번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할만한 근거가 마련되면 용서하시려 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하라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사실 원칙적으로는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노아시대에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보내서 그를 사람들 대신 죽게 했고 이걸 믿는 사람들은 용서해주기로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본 해석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사건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이기도 하지요.

 

죄를 사해주려고 대신 누군가를 죽이는 하나님?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죽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사람의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 결과일 뿐이지요. 하지만 예수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분에게는 죽음이 삶의 결과가 아니라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곧 죽으러 태어났다는 말이지요. 저는 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예수의 삶의 결과였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처럼 산다면 자연사할 확률은 낮습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사고를 가장해서 살해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지푸라기를 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충분히 예상했겠지만 ‘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해! 그게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이니까. 그래야 죄인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분노가 가라앉을 터이니......’ 하는 식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 대신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하나님, 구약성서의 제사제도가 전제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지은 죄를 사함 받으려면 그 죄를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으로 옮겨서 그를 대신 죽임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게 구약성서의 제사제도입니다. 여기서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에 예수를 대입하면 예수사건을 희생제사로 해석한 것이 되지요. 저는 이스라엘이 희생 제사를 드렸을 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때 제사를 드렸던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겠지만 저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사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는 더욱 더 믿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희생제사 제물로 바쳐야만 사람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주는 하나님, 반드시 그렇게 해야 죄를 사해주는 ‘계산이 밝은’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입니까? 이 하나님은 안식일에 땔감을 했다고 죽이라는 하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했듯이 예수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예수의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죄인이 대한 분노를 푸는 하나님은 아니지 않을까요? 안식일에 선한 일,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여서 바친 희생 제물을 받아야 죄인을 용서해주신다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여기서 잠깐 곁길로 가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사건에는 두 개의 트랙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했을 때 세상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얘기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사탄의 유혹을 받은 얘기는 지상세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 있다가 순식간에 성전 꼭대기로 옮겨가기도 했던 것 아닙니까. 땅에서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벌이는 예수와 그분 제자들이 그걸 막으려는 자들, 곧 유대권력자들과 로마제국과 대립하고 있고 영적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사탄이 싸우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생애를 이렇게 이해하고 복음서를 썼습니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가 바로 예수였습니다. 예수는 두 세계를 넘나들며 악한 세력과 싸웠습니다.

 

예수사건에 대한 신앙의 해석은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영적인 고백인데 그것은 ‘은유적으로’(metaphorically)가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세계의 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표현하려면 그것은 은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사건을 희생제사로 해석한 것도 은유적인 해석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제는 이런 해석에는 시대적, 문화적 한계와 해석에 있어서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모든 신앙적 해석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유일하게 옳은 해석과 고백이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해석한 데도 한계와 오류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해석은 시대적 한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이 해석이 현대인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겁니다. 짐승을 바치는 희생제사는 지극히 유대교적이므로 문화적 한계 또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겨레는 이런 제사를 드려본 적이 없습니다. 이 해석이 우리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모든 거간꾼은 물러가라!

 

마지막으로 예수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해석한 것은 예수가 믿고 가르친 하나님의 모습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보여주신 하나님이 바로 이런 하나님입니다. 예수가 믿은 하나님은 유산으로 받을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그걸 갖고 가출해서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아들이라도 이제나저제나 그가 집에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하나님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끌어안고 기뻐 눈물 흘리는 하나님입니다.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죄인들에 대한 분노가 풀리는 하나님과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이 어떻게 같은 하나님일 수 있습니까? 이게 상상이나 되는 일입니까?

 

예수가 믿고 보여준 하나님은 안식일에 땔감을 했다고 해서 처형하라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길까봐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바라는 분이 아닙니다. 안식일엔 몇 보 이상 걸으면 여행하는 것이 되어 그걸 금지하는 하나님,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 밥을 해서도 안 된다는 하나님, 구덩이에 사람이 빠졌는데 안식일이라고 해서 구해주면 안 된다는 하나님, 예수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배가 고프면 밀 이삭을 비벼 먹어도 괜찮은 하나님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안식일에 그를 고쳐주라는 하나님입니다. 그 병 때문에 고통당해온 세월을 생각하면 일분일초로 지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본래 안식일은 그런 일을 하는 날이므로 금지는커녕 잘 했다고 칭찬하실 하나님이 예수가 믿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였을까요?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는 것이 왜 문제였을까요? 이런 일이 어떻게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6절에는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걸 보면 공생애 초기에 이미 예수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만 들었지만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외에도 대제사장들과 의회원들, 서기관들 등 유대 권력자들, 그리고 로마당국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예수를 죽이려 했고 결국 그렇게 했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각각 달랐고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이를 집행한 쪽은 로마 당국이었지만 이들 모두가 한 패였음은 분명합니다. 이렇든 저렇든 분명한 것은 역사 안에서 예수를 죽이려 했던 자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사건에 대한 영적인 해석과 고백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과 무관해서는 안 됩니다. 고백이 사건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올바른 고백일 수 없습니다.

 

다시 이들은 왜 예수를 죽이려 했을까 하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본문만 보면 그 이유가 분명치 않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줬다고 해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에게 무슨 피해가 되겠습니까? 병이 들게 한 것이 아니라 병을 고쳐줬는데 무슨 문제가 되는가 말입니다. 병을 고쳐줬으면 칭찬해야지 그게 어떻게 고친 사람을 죽일 이유가 되겠습니까. 그럼 뭘까요? 그 날이 안식일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만일 그 날이 안식일이 아니라면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그것이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을까요? 그랬다면 어떤 점에서 그랬을까요? 안식일 법은 하나님에 대한 법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에게’ 거룩한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아닌 자들이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줬다고 이렇게 야단법석을 떠는가 말입니다. 그들에겐 거기에 생명을 걸만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을까요?

 

맞습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교 권력자들에게는 예수가 그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말과 행동이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생명을 걸만한 일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해석할 권한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5장에 나오는 얘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안식일에 땔감을 했다고 해서 모세와 아론 앞으로 끌려가 결국 처형된 그 사람 얘기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붙들어 모세와 아론에게 데리고 갔는데 모세와 아론도 이런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를 그냥 가둬뒀습니다. 이때 야훼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서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셨지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모세와 아론도 이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나서야 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시한 내용은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지만 그 얘기는 여기서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모세와 아론도 안식일 계명을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집행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집행할 권한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해도 괜찮은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 수많은 세부규정들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한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식일에 그 회당에서 예수가 한 말과 행동은 그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던 겁니다. 자기들이 결정해온 것을 웬 나사렛 촌놈이 결정하겠다고 나서니 이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모의하기 시작한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해석할 권한을 독점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권한이 배타적으로 자기에게 귀속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 권한을 ‘모든 사람들’에게 돌려줬습니다. 안식일이 왜 존재하는지만 알면, 안식일이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는 날이란 것만 알면 그 다음은 각자가 알아서 해석하고 고백하고 실천하라는 것이 예수의 주장이었습니다. 그것이 안식일 법이 됐든 뭐가 됐든 기본정신에만 부합된다면 그 다음에는 누구나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 중간에 서서 둘 사이를 중재한다면서 온갖 권한을 행사하던 사람들의 자리가 없어지겠지요.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이 갖고 있던 권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겁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에 있던 종교 브로커, 또는 영적 거간꾼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공모해서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겁니다.

 

예수는 이 권한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5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입니다. 남이 준 자유가 무슨 가치가 있냐고요? 사람이 준 자유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 자유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자유가 아니므로 사람에게 부채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를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절로 지켜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라고 경계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서 ‘내가 뭘 안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권한과 자유를 누리겠는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생각을 버리세요. 그런 불안과 염려는 악의 세력이 던지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 같이 복잡한 일은 누군가 권위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그 말대로만 하면 된다.’는 유혹 말입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가 믿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은 그 믿음을 어떻게 가르침과 삶으로 실현해내셨는지를 제대로 공부하고 깨닫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문화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고 말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또 다른 거간꾼인 ‘성전’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노란 색상배경은 퍼온이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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