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에선 늑대의 귀환으로 시끌버끌하다. 1992년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온 늑대들이 이제 큰 무리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양떼들의 위협이 될 정도로 늘어났다. 이를 두고 환경보호론자들과 동물애호가들에겐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없지만, 목동들에게 있어서는 위협의 재등장이다. 늑대사냥이 한창이던 1930년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
1492년,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그의 위대한 업적으로 신항로가 개척되었고, 그 결과로 유럽은 새로운 경제 활로가 열리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식민 사관을 주장하면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문명의 혜택이 주어졌다고 하지만, 원주민들의 관점에서는 역사의 종말이었다.
#3
더 이상 예를 들지 않더라도, 눈치가 빠른 사람은 포인트를 예감했을것이다. 시간과 공간, 심지어 대상이 다른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관점의 차이에 의한 해석의 차이이다. 어느 쪽에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 동일 사건이 다르게 드러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린 그 어느 해석도 절대적일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여호수아 6장에 나오는 기사는 최소 두 가지의 관점으로 이해 될 수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편에서 볼 때, ‘가나안 정복’이다. 여기서 쓰인 ‘정복’의 오리지날 컨셉은 herem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단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종 청소 혹은 전멸 (ethnic cleansing 혹은 genocide)인 것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심지어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아무것도 모르는 가축까지도 모두 ‘헤렘’의 대상이었다. 이런 ‘헤렘’ 프레임으로 여호수아 6장을 읽다보면,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과 오늘날의 기독교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갭의 극단적 결과와 예는 ‘헤렘’을 문자적으로 적용한 십자군 전쟁이다.
이와는 달리 같은 텍스트를 ‘헤세드’ 프레임으로 읽게 되며 전혀 다른 교훈과 기독교의 메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헤세드’는 [loving-kindness]라는 표현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쓰이는 이 단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 그리고 인간의 믿음과 신뢰를 통해 현실화 되는 사례를 여러 장면을 통해 보여진다. 이런 맥락에서 여호수아 6장은 라합의 입장에서 읽혀질 수 있다. 가나안 여인으로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믿음을 활용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전형적인 기독교 신학의 구원론 페러다임을 엿볼 수 있다.
#4
위의 케이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프레임의 설정은 해석의 중요한 과정이 될 수 있다. 프레임은 주로 관점의 차이에 비롯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이 해석의 첫 단추를 끼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cf. "We are all Rahb Now"_CT July/August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