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죄지은 여인이 고마운 이유

by 김원일 posted Sep 13, 2013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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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1 / 성령강림절 열 번째 주일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성전이거늘

요한 2:13-19, 12:1-8

 

곽건용 목사

 

빌라도는 정말 손을 씻었을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신해서 그분을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줬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예수는 이를 말렸고 결국 그분은 체포되어 의회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의회는 대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앞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고소한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예수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물면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말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대가 그리스도냐?”는 질문에 예수가 “내가 바로 그다.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둘 다 그들에게는 신성모독에 해당됐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대한 모독이니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마찬가지였고, 다른 하나는 예수가 감히 메시아를 참칭했으니 그 자체가 하나님 모독이었습니다. 유대인 기준으로는 죽어 마땅했지요(마가 14:53-65 참조).

 

하지만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의회에는 사람을 처형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최종적으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측은 로마당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복음서를 보면 이 책임을 로마권력이 아닌 유대권력자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아내지 못했는데 군중들이 자기들 법대로는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질 않나, 명절 때마다 죄인 하나를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주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군중들이 예수 아닌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군중들의 뜻을 따랐다고 하질 않나, 심지어 마태복음은 빌라도가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으니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했지만 군중들이 “그 사람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아올 것이요.”라고 외쳤다고 전합니다(마태 27:24-26). 복음서들은 빌라도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 같이 보일 정도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정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를 죽이려 했는데 빌라도는 그를 어떻게든 풀어주려 했을까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조종을 받아서 ‘예수를 십자가에!’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성화에 못 이겨 빌라도는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을까요? 2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로서는 당시의 역사적 진실을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서 이외에 남아 있는 역사자료들은 빌라도를 매우 잔인한 인물로 전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수백 명, 수천 명의 유대인을 죽인 적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그가 과연 예수를 풀어주려 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차이는 역사관(歷史觀)의 차이로 보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역사관이 이와 달랐다는 겁니다. 어느 편은 맞고 어느 편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느 자리에서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사건이 달리 보이니 말입니다.

 

어쨌든 유대권력자들과 로마당국이 짬짜미해서 예수를 죽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필경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로마당국과 유대당국의 입장은 서로 달랐지만 말입니다. 로마당국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폭동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들이 제일 싫어했던 것이 소요사태요 폭동이었습니다. 로마는 많은 경우에 식민지인들의 관습과 전통을 인정하는 일종의 관용정책을 폈지만 폭동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였을 때 일어날 폭동이 더 다루기 어려울지, 예수를 그대로 뒀을 때 일어날 폭동이 더 다루기 어려울지를 면밀히 따져봤을 겁니다. 그들에겐 예수가 유대인의 신을 모독했는지 여부는 아무래도 괜찮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가 폭동을 일으킬 것인가 하는 데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로마는 메시아를 자칭하고 소요를 일으킨 자들을 처형한 적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를 로마에서 독립시키려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 등 유대권력자들은 왜 예수를 죽이려 했을까요?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가 그들이 독점하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내린 해석과는 상충되는 새로운 해석을 내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들이 독점하고 있던 종교적 권위가 심각하게 위협을 당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얘기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누린 모든 특권의 궁극적인 기반으로서 그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는 제물로 바쳐질 소, ,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성전 뜰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휘둘러 그들을 내쫓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오.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라고 묻자 예수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라!

 

예수와 성전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순절 기간 중인 3 3일 설교에서 상세하게 얘기했습니다. 그날은 마가복음 11장을 읽었고 오늘은 요한복음 2장을 읽었지만 두 본문이 전하려는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요한은 그들이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고 했고 마가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했지만 ‘장사하는 집’이든 ‘강도의 소굴’이든 좌우간 예수는 성전을 정화(purify)하거나 개혁(reform)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달려 있는 ‘성전정화’나 ‘성전개혁’이란 제목은 그래서 옳지 않습니다. 예수는 성전을 없애려(destroy) 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말은 은유도 아니고 과장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성전을 허물라는 뜻입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던 곳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니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리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 만났습니까? 광야 유랑시대에 모세는 성막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눴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루의 행진을 마치고 진을 쳤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구름과 함께 성막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하는 가리개 역할을 했지요. 이 구름이 성막에 들어가면 모세도 거기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모세는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눴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와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일은 예수시대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는데 대표적인 제사가 속죄 제사였던 것입니다. 저지른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 말입니다. ‘속죄’라는 것은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속죄를 받아야 정상적인 유대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래야 비로소 유대인으로서의 제사를 드리거나 절기에 참여하는 등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역할을 하는 성전을 허물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럼 제사는 어디서 드리라고? 속죄 제사는 어디서 드리라고? 어디서 어떻게 죄를 용서받으라고? 하나님은 어디서 만나라고? 대체 예수는 무슨 생각으로 성전을 허물라고 선언했을까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속죄 제사를 드리지 않고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언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요단 강가로 나오라 해서 거기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베푼 세례가 ‘죄 사함을 받는 세례’였습니다. 이것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성전에서 드리는 속죄 제사를 그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요한은 제사장 집안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 집안사람은 서른 살부터 오십 살까지 이십 년 동안 제사장 일을 했다고 합니다. 상당한 특권층에 속했지요. 그런데 요한은 그런 특권을 버리고 광야로 뛰쳐나갔습니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얘기는 복음서 기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여기엔 예수가 요한이 하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했음이 드러나 있다는 점입니다. 곧 예수도 성전 무용론을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성전을 가리켜 예수는 ‘장사하는 집’이요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했습니다. 곧 성전은 도둑이 장물 쌓아놓은 곳이 됐다는 겁니다. 장물이 뭡니까? 도둑이 훔쳐온 물건 아닙니까. 그럼 제사장들이 도둑의 장물을 싸게 사들여 성전에 쌓아뒀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장물은 사람들이 야훼께 바치겠다고 성전으로 가져와 제사장에게 넘겨준 제물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겠다고 성전에 갖고 온 제물이 제사장의 손을 거치면 장물이 됐습니다. 제물을 장물로 만든 이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런 중개인, 곧 브로커들이 항상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주겠다면서 하나님과 사람 중간에 들어가 권한을 행사하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유대종교의 문제였던 것처럼 하나님과 제사를 드릴 사람 중간에서 이를 중개한다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제사장들도 문제였습니다. 그들 수하에서 율법을 해석해주던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둘 사이를 중개하고 중재한다던 자들, 이들이 문제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요즘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나 신부 같은 성직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의 역할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시대의 제사장 같은 ‘중재자’의 그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중재자 없이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성전을 허물라고 선언했습니다. 옳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성전은 없어도 됩니다. 아니, 없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이 뭘까요?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 성전을 없앤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걸까요? 성전이 없어져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데가 없어서(Homeless God?) 하늘로 올라가버렸을까요? 그렇다면 이제 어디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럼 어디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교회가 성전을 대신합니까? 예수는 성전을 허물고 그 대신 교회를 세웠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 대신에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역할도 성전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둘을 같은 걸로 보는 게 문제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예배하고 성령 안에서 소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성전은 건물을 가리키지만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기독교인들이 건물을 교회로 알고 그걸 짓는 데 엄청난 돈을 쏟아 붓습니다. 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워야 하나님도 좋아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는 성전을 없애자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없애자든지 하나님과 만나는 일이 필요 없다든지, 죄 용서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에게는 분명한 대안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대체할 그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성전제사 대신 ‘세례’라는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죄 사함의 ‘제사’ 대신 죄 사함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그럼 예수는 어떤 대안을 내놨습니까? 예수의 대안은 세례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세례를 줬다는 보도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 흔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매우 축소되어 있습니다. 세례가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요한복음 2장과 12장을 나란히 놓고 읽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했는데 요한복음은 여기서 사흘 만에 세울 성전이 ‘예수의 몸’을 가리킨다고 봤습니다. 성전은 예수의 몸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의 선언에 대한 요한복음의 해석인데 문제는 어떻게 예수의 몸이 성전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답은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 곧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얘기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얘기는 네 복음서가 모두 전합니다. 그래서인지 학자들은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복음서마다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보는 사람에 따라 크다고도 할 수 있고 무시해도 될 만큼 미미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몸이 성전입니다!

 

예수 일행이 어떤 집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 한 여인이 그 자리에 들어와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그것을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걸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면 좋았을 걸 공연히 낭비했다고 여자를 질책했지만 예수는 반대로 여자를 두둔하며 그녀는 자기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하고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여인의 행위도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마가가 전하는 사건의 개요이고 마태는 거의 마가를 그대로 따릅니다(마가 14:3-9; 마태 26:6-13). 한편 요한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밝혔고 여인은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였다고 합니다. 마르다가 분주히 다니며 손님 대접했을 때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했던 바로 그 마리아 말입니다. 여기선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의 머리가 아닌 발에 부었고 그 발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았다고 합니다. 이때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한 사람은 유다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이미 도둑질을 한 자라는 평가가 보태집니다. 예수는 마가처럼 그녀의 행위가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녀의 행위가 기억되리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요한 12:1-8). 한편 누가는 그 자리가 한 바리새인의 집이고 여인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여인의 성격을 규정한 복음은 누가복음입니다. 여기서 그녀는 울면서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후에 발에 입을 맞추고 그 다음에 향유를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집주인은 그녀를 방치한 예수를 공박했고 이에 예수는 빚진 자의 비유를 말하고 바리새인과 여인의 행동을 비교했다고 합니다(7:36-50).

 

어떤 복음서가 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해석하는 학자들마다 다릅니다. 저는 누가가 전하는 얘기를 따르는데 그 이유는, 여인이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후에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하는 등 여인의 행위를 가장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을 여러분의 머릿속에 한 번 그려보기 바랍니다. 한 식탁에 예수 일행이 앉아 밥을 먹는데 한 여인이 그 자리에 들어옵니다. 그녀는 다짜고짜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옷매무새는 적당히 흐트러졌겠지요. 그녀는 예수 앞에서 울먹입니다. 마음껏 소리를 내서 울지도 못했을 겁니다.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사회는 그녀에게 소리 내서 울 자유나 권한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눈물로 더러워진 예수의 발을 닦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자기 입을 맞춥니다. 이 입맞춤은 그녀가 그때까지 해본 어떤 입맞춤보다 더 달콤했을까요. 그녀의 마지막 예식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이었습니다. 어딘지 에로틱한 느낌까지 듭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네요. 키가 큰지 작은지, 뚱뚱한지 말랐는지, 눈이 큰지 작은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 사건은 아마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예수의 몸에 대해 가장 길고 자세하게 말하는 텍스트일 겁니다. 물론 예수의 발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좌우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그녀가 하는 행위를 우리는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단지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부르는 걸로 이 행위를 다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녀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있는 예수의 발에서 그녀와 하나님의 진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눈물과 부어진 향유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었습니다. 아니, 그녀 자신이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이자 바쳐지는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의 몸을 하나님을 만나는 곳, 성전이라고 부른 게 아니겠습니까.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성전이 예수의 몸을 가리킨다고 했지요. 저는 향유를 부은 여인이 예수의 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의 ‘몸’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을 만납니까? 오늘 하나님의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도 이 여인처럼 ‘몸’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의 몸’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몸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몸을 어루만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어루만지는 겁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 그 어깨는 하나님 성전의 한 귀퉁이입니다. 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고 발에 입을 맞출 때 그의 발은 하나님 성전의 우뚝 선 기둥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의 가슴을 끌어안을 때 둘의 가슴은 하나님 성전의 가장 깊고 은밀한 지성소입니다.

 

성전이 하나님 계신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성전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사람의 얼굴에 서려 계십니다. 사람의 손발에 숨어 계십니다. 사람의 가슴에 담겨 계십니다.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주고 거기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이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여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노란 글 배경 색상은 퍼온이가 보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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