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입과 항문이다.

by 삼식이네 posted Sep 18, 2013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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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옷 이야기, 참 깊네요. 좀 아쉽고 어쩐지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옷을 벗겨내는 의미가 무엇인지 좀 더 심화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 삼식아! 분발해보자. 열정은 사람에게 있는 큰 가치이다. 지속하는 것만큼 강한 것은 없는 것이다. 물을 한 드럼통 한꺼번에 바위에 부어보아라. 거기엔 먼지만 씻겨 나갈 것이다. 그러나 물을 똒똑똑 떨어지게 한다면 그 물은 기어이 바위에 구멍을 만들 것이다. 좀처럼 포기하지마라 그러면 강자가 되는 것이다. 다시 우리의 갈 길을 가자. 지난 이야기에 좀 울림이 있었느냐?

 

네! 사람을 보는 눈이 저도 계속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 말씀 중에 사람을 풍경으로 읽으라고 하셨는데 요즘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나무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인가요?

 

선점이란 것의 기득과 집착은 대단한 것이다. 네 속에 각인된 세사의 통념이 무너지고 있는 소리이다. 사람과 만물을 보는 눈은 계속해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더 단순구조로 읽어라. 사람은 기본적으로 입과 항문의 구조이다. 나머지는 다 부수적으로 보아라. 그 토대 위에서 만물의 개념을 새로이 익혀 나가도록 하여라.

 

지존한 인간을 입과 항문의 편충정도로 읽어낸다는 것이 좀 그렇습니다마는 인간이해의 의표를 집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입과 항문의 인간에 옷이 입혀지는군요.

 

옷에 내재된 심원한 뜻은 생물의 암수, 양성구조처럼 깊은 이야기이다. 어쩌면 인간의 논단 밖의, 범접하기 쉽지 않은 영역이다. 보호, 보온, 옷이 날개, 옷은 분신, 첨단패션, 각국의 고유의상, 옷차림 에티켓 등을 서설하는 것은 범상한 필부들의 옷에 대한 시선이다. 이런 논단으로서는 단지 인문교양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지나간 세대 영국의 지성 칼라일이 옷에 대한 신령하고 깊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어 놓은 것이 있구나. 우리말로 ‘의상철학’이라 해서 한때 CEO 필독서였었다.

 

좀 흥미롭게 여겨집니다. 선생님! 좀 더 말씀 해주십시오.

 

좀 들여다보면 인간세상은 옷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모태에서 떨어지면 첫째로 받는 문화유산이 무엇이냐? 바로 옷이 되는 것이다. 한 아이가 생존을 위해 인간시장에 떨어질 때 최우선적으로 옷이라는 분신의 형상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옷은 인간의 요람부터 무덤까지 저를 둘러싸다가 인간과 합치된 운명으로 그와 함께 화장되고 또 3척 흙 밑에서 그와 함께 썩어 가는 것이다. 인간은 일생을 동행한 분신의 옷과 합치되어 세계의 막후로 사라지며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옷은 수 없이 명멸하는 인간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연민의 형상인 것이다. 옷은 그렇게 큰 웅변이 내재되어있는 것이다. 옷 속에 인간의 연민이 깊이 녹아있는 것이다.

 

삼식아! 좀 긴장을 풀자. 옷을 제법 간지 나게 입는구나. 너는 왜 옷을 입고 사는지 묻고 싶구나.

 

네! 전 좀 겉멋 기질이 있어 패션 위주로 옷을 입었습니다. 한 때 뽀대에 목숨 걸었지요. 스타일, 옷걸이, 틀이 좋다고 주위에서 말 많이 들었습니다. 좀 제대로 말씀드리면 어려선 엄마가 입혀주어 입었고 커선 추워서 입었고 여름에도 벗으면 안 되니까 그냥 입었습니다. 의식주의 옷이라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인간사회의 필요와 문화관습에 의해 입었습니다. 동물과 비교해서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동물이 옷을 입는다면 꼴불견일 것 같은데 혹시 사람도 이 꼴불견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동물은 그 두터운 질감의 가죽이 그들의 피복이 되어 고유의 생명을 지속해 나간다. 동물은 숲과 밀림의 원시자연에서 생명의 활력을 느끼고 설정된 생존기반의 틀 속에서 약육강식의 질서를 따라 생존을 영위한다. 그 최적의 환경에서 이탈되어 인간의 품안으로 들어올 때에 그들의 생존은 뒤엉키며 문화충격에 휩싸이는 것이다. 질긴 생명력으로 생존에는 적응하지만 야생성은 소멸되고 사냥할 줄 모르는, 가축화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복착에 적응하여 익숙해져 있다. 꼴불견이 아니다. 지구 생존환경 자체가 알몸존속이 불가능하거나 심리적으로 나체에 반동하며 수치를 느끼는 존재가 되어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없는 정신, 신의 숨결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인간이 나체일 때 그를 에두르는 심리의 파장은 육체의 감각에 앞서 반동 반응을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인 것이다. 한 마리의 병든 야수가 들어앉은 인간 내면의 문제는 인간에게 옷을 입게 만든 것이다. 나체주의의 원리는 레닌 마르크스주의에 버금가는 그럴듯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탈의 묘한 쾌락을 즐기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하도록 하자. 오늘은 옷을 벗겨내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성경에 나타난 탕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느냐?

 

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부친에게 재산 상속을 다 받고 타국에 가서 흥청망청 살다가 알거지가 되어 다시 고국의 부친에게로 돌아온 탕아였습니다.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리곤 부친은 어떻게 하였느냐? 

 

그를 깨끗이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그를 위해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누더기에서 말쑥한 차림으로 다시 변신하고 돼지 목부 종살이에서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어 영예를 되찾았습니다. 완전 막장 시궁창 바닥에서 존귀한 아들로 거듭난 감동스토리입니다.

 

내용을 잘 아는구나. 너는 인간 말종에서 총아로 변신한 그 이야기가 이 세상에 왜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깊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문교양 아닌가요?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과 부모의 사랑이 표현된 휴먼 스토리로 지어진 것이 아닐까요? 교회 목사님이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내 주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비유이다.”는 설교는 들었습니다.

 

삼식아! 너의 한계가 거기까지이구나. 그 설교를 이해하느냐?

 

옷은 보호자의 손으로 갈아입힐 수 있다지만 마음은 많은 책을 읽어서 교양을 쌓고 마음의 수양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어떤 책을 읽느냐.”로 결정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마음을 열고 수술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삼식아! 옷에 관한 이야기가 바이블에 하나 더 찾을 수 있다. 왕이 잔치를 베풀고 모든 초청자들에게 예복을 입힌 이야기이다. 예복을 입지 아니한 식객들은 다 호화성찬의 목전에서 내쫓김을 당하였다. 이 두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옷에 관한 중요성을 말하고 있지 않느냐? 옷, 예복은 탕자의 신원과 식객의 자격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후사의 정통성과 구원의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네가 잘 모른다고 하니 천만 다행이다. 잘 안다고 하면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안다고 하는 것에도 서로 다른 차원의 앎이 있는 것이다. 섣부르고 맹목적인 앎으로 영혼들은 그들이 닿아야 할 곳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은 속은 체 일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삼식아! 그 목사의 설교를 믿어라. 저들을 본받지는 말고 저들의 말은 믿어도 된다.

누더기 옷을 벗겨 새 예복으로 갈아입히는 작업은 병든 야수가 된 인간을 새롭게 개조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말하는 것이다. 네가 정신으로 보는 법과 인간을 입과 항문의 구조로 읽을 수 있을 때에 보이지 않는 일들을 조금 헤아리게 될 것이다. 그 경험이 네 마음속에 두텁게 자리 잡힐 때에 비로소 하늘의 나라가 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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