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교회"의 탄생을 응원하며(접장님 죄송합니다. 설교가 너무 좋아서 제가 그만...)

by 백근철 posted Sep 21, 2013 Likes 0 Replies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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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5일 / 성령강림절 열여덟 번째 주일

 

새로운 교회의 탄생

마가 9:38-41

 

곽건용 목사

 

한 대형교회의 몰락이 주는 교훈

 

한때 수정교회 담임목사였던 로버트 슐러의 목회 성공학을 교회 목사들뿐 아니라 영업사원들이 교과서처럼 열심히 읽고 배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서 영화를 보는 ‘Drive-in Theater’를 빌려서 처음 교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가장 유명한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습니다. 그에게는 목회도 일종의 세일즈였습니다. 사람들은 목회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영업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그에게 배웠습니다. 여러분 대부분도 한번쯤 가봤을 수정교회, 살아 있는 동물들이 무대 위에 등장하고 천사가 피아노 줄에 매달려 훨훨 날아다니는 성탄절과 부활절 뮤지컬이 열렸던 수정교회는 오렌지카운티의 명물이었습니다. 그의 방송설교는 한 때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정교회는 슐러 목사의 은퇴와 더불어 내분의 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그는 목사직을 처음에는 아들에게 물려줬다가 곧 이를 빼앗아 다시 딸에게 물려줬습니다. 이 와중에 교회 내에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서 슐러 가문은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름답지 않은 모습을 연출하며 수정교회는 쇠락했습니다. 부채를 감당할 수 없어서 급기야 교회 건물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최근 로버트 슐러 목사는 식도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정교회에서 벌어진 일들을 돌이켜 보면 교회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말입니다. 수정교회가 몰락하기 전까지 수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이를 부러워했고 모델로 삼았습니다. 서로 앞을 다투어 이 교회가 하는 걸 따라했고 똑같이 흉내도 냈습니다. 한국의 어떤 교회는 수정교회 사무실 건물과 똑같은 건물을 세웠다는 우스운 얘기도 있습니다.

 

수정교회의 몰락이 우연일까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수정교회가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내분만 없었다면 이런 일 벌어지지 않고 잘 나갔을까요? 이곳저곳 망가진 데를 손 보고 수리하고 약간 개조하기만 하면 수정교회는 계속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교회가 잘 나갔을 때도 슐러 목사가 방송설교에서 시시때때로 막대한 돈을 들여서 방송하는 것이니 시청자들이 돈을 보내줘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매우 맘이 불편했습니다. 과연 저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말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수정교회의 몰락을 단순히 한 교회의 몰락이 아니라 시대의 징조로 읽었습니다. 예수께서도 군중들에게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누가 12:54-57). 시대를 읽어야 합니다. 저는 수정교회의 몰락을 새로운 교회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대의 징조로 읽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불어오는 새로운 바람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새로운 바람이 불어옴을 느낍니다. 이 바람의 진원지는 가톨릭교회입니다. 엄청난 변화가 새 교황의 취임과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신자들에게 집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주변 사람들과 소통할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교황은 트위터를 통해서(교황이 트위터를 한답니다!) “이웃을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취할 바른 자세가 아니다.”라며 가톨릭교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행동할 것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 시절부터 ‘소외된 자의 목자’로 알려졌는데 지난 3월19일에 교황으로 즉위한 이후 ‘가난한 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를 추구하며 파격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가난한 자의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데 주목하십시오. 이분은 교회가 가난한 자를 위하려면 먼저 스스로 가난해져야 한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그는 지금껏 전임 교황들이 사용했던 고급차 대신 방탄도 되지 않는 낡은 차를 타고 다닐 뿐 아니라 경호원도 없이 마구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소탈한 모습도 보이고 있답니다. 또 브라질 빈민촌 등을 방문한 다음에 그 지역 교회 지도자들에게 비어있는 수도원을 난민에게 내주자고 제안하기도 했답니다.

 

새 교황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볼까요? 그는 한 신문 칼럼에서 “신을 믿지 않아도 양심을 지키면서 살면 신의 자비를 얻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말은 보수적인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을 부정하는 충격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이미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창조 때부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부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양심이 그에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새 교황은 성적인 취향을 이유로 사제들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브라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동성애자이고 그가 신을 추구하며 선의를 지니고 있다면 내가 누구라고 그를 심판하겠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이 말은 동성애자가 사제가 되는 걸 금지하는 문서에 서명했고 동성애를 폄하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했던 전임 교황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그가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교황은 동성애자들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존엄하게 대우받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지 않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누군가가 좋고 싫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좋은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싫은 것과 그 사람을 나와 똑같이 존엄하게 대하고 사회적으로 소외시키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나와 성적 취향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황을 그 점을 지적한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 아닙니까. 저는 앞으로 가톨릭교회가 어떻게, 어디까지 변화할지 정말 기대됩니다. 돌이켜보니 교회에 대해 기대해본지가 얼마만인지 가물가물합니다. 이에 못지않게 제게 충격을 준 소식은 새 교황이 페루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신부를 조만간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바티칸과 해방신학 사이의 긴 역사를 얘기할 여유는 없습니다. 과연 두 사람의 만남이 둘 사이의 오랜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는 계기가 될지 자못 기대됩니다.

 

혁신적 교회, 남미의 기초공동체

 

해방신학은 1960년대에 남미에서 출발해서 1980년대까지 급속도로 발전하고 전파되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질서로 세계가 재편되고 바티칸이 보수화되면서 기세가 크게 꺾인 새로운 신앙운동과 그 이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해방신학이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요즘 해방신학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저는 ‘해방신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내 가슴을 뛰게 만든 최초의 교황이기도 합니다.

 

해방신학을 낳은 남미에서의 새로운 신앙운동은 우연처럼 보이는 한 작은 사건에서 시작됐습니다. 1950년대 어느 날 브라질의 한 할머니가 어느 성탄절에 이런 푸념을 했습니다. “성탄 전야에 우리 마을에 있는 세 개의 개신교회에는 모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왜 우리 가톨릭교회는 문도 닫혀 있고 불도 켜져 있지 않고 사람도 없는가?” 아그네스 로시라는 이름의 신부가 할머니의 이 푸념을 심각하게 듣고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신부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가?” 그래서 로시 신부는 1956년부터 신부가 없는 변방 마을을 다니면서 평신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신부가 없어도 평신도들끼리 미사 드리는 방법,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을 행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주민들 대부분은 문맹이라 글을 읽을 줄 몰랐습니다. 당연히 성경을 읽지 못했지요. 그래서 신부들은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성경도 읽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려면 글을 배워야 했지요. 글을 가르친 후에 뜻을 같이 하는 신부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과 함께 성경도 읽고 대화도 나누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갔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남미의 ‘기초공동체’(base community)의 시작입니다.

 

기초공동체가 촌락들에 뿌리내리자 지도자들은 신앙교육뿐 아니라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과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군사독재정권이 어떤 무지막지한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지를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걸 ‘의식화 교육’이라고 부르지요. 여기에는 파울로 프레이리가 쓴 《억눌린 자의 교육 Pedagogy of the Oppressed》이란 책이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브라질에서 시작된 기초공동체 운동은 남미 각국뿐 아니라 서구 및 아시아 세계에도 널리 퍼져서 기존교회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했습니다.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에는 앞에서 얘기한 이유들 때문에 운동의 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불씨는 어딘가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이 운동을 새롭게 시작해보자고 여러분에게 제안하는 겁니다. 불씨를 살려보자는 말씀입니다. 천사의 도시에 사는 한인들의 기초공동체 운동을 해보자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제3의 장소에 세울 여러분의 교회 말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저기 세울 여러분의 교회의 베이스캠프는 향린교회가 될 겁니다.

 

물론 여러분의 교회는 브라질의 기초공동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달라야 하고 또 다른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끝내 견지한 기본정신만은 우리도 새겨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정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공동체 구성원 중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구조를 만들면 안 됩니다. 그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왕따 놓는 것은 예수의 교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둘째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복음의 이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과 ‘구원’ 그리고 ‘자유’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구원받고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영원한 생명과 구원, 그리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 여러분의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직접적인 관계를 지향합니다. 공동체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초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원칙입니다. 최근에는 인터넷이나 SNS를 통한 간접적인 소통수단도 많지만 기초공동체에서는 그것이 보조수단이고 원칙은 직접적인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성원을 차별하는 어떤 구조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외, 차별 따위의 말들은 이 공동체에서는 통용되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 어깨에 얹혀 있는 하나님의 기대

 

저는 브라질 기초공동체의 운영원칙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반대하는 사람을 내치지 말고 그들까지도 용납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을 반대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많은 경우에 그들을 적으로 삼지요. 하지만 여러분의 교회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을 반대하는 사람을 적대시하지 말고 벗으로 삼으십시오. 적어도 잠재적인 벗으로 삼으십시오. 오늘 읽은 마가복음 9장에서 제자 요한이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이름으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큰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관용과 똘레랑스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하나님은 지금 천사의 도시 한인사회 한 구석에서 이런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큰 기대를 갖고 지켜보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 기대도 하나님이 교회에 대해 오랜만에 갖는 기대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기대가 여러분의 어깨에 얹혀 있습니다. 하지만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어깨에 얹혀 있는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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