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는목사가 또 영화 얘기하다.

by 김원일 posted Oct 26, 2013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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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8 / 성령강림절 열한 번째 주일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여라!

누가 10:25-37

 

곽건용 목사

 

영화 <난간 The Ledge> 이야기

 

오랜만에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예수와 함께 본 영화》 출판 이후로는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설교에서 영화 얘기를 한 적도 거의 없었지요. 설교에서 마지막으로 영화 얘기를 한 것이 언젠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합니다. 오늘 영화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근래에 본 <난간>이란 영화가 성서의 모티브들로 가득 차 있어서 흥미롭기도 했거니와 예수를 믿는 것이 뭔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인지를 이 영화가 생각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가 높은 빌딩 옥상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습니다. 어지러워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곳입니다. 그는 거기서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게 분명합니다. 영화는 자살하려는 사람과 그걸 포기하게 만들려는 경찰관이 나누는 대화가 뼈대를 이룹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한 호텔 부지배인인 개빈이란 백인이고 그를 말리려는 사람은 홀리스라는 흑인 경찰관입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둘이 어떤 사람이고 그들이 어떤 인간관계를 갖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개빈이 어느 날 출근길에 버스에서 아름다운 여인 셰이나를 봅니다. 알고 보니 둘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그날 셰이나는 개빈이 일하는 호텔에 취직하기 위해 인터뷰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인터뷰어가 개빈이라서 셰이나는 쉽게 자리를 얻었고 누구나 짐작하듯이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하지만 셰이나가 유부녀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하루는 셰이나와 남편 죠가 개빈과 그의 룸메이트 크리스(Chris)를 저녁식사에 초대합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인 죠는 개빈과 크리스를 게이 커플로 오해하고 무례를 범합니다. 식사기도를 하면서 개빈과 크리스가 ‘역겨운’(abominable) 짓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성서에서 ‘역겨운 짓’이란 말은 동성애, 근친상간, 수간(獸姦), 우상숭배 등에 붙여진 낙인입니다. 이에 불쾌해진 개빈은 뜹니다. 크리스는 게이지만 둘은 게이 커플이 아니었습니다.

 

셰이나가 개빈에게 남편의 무례를 사과하면서 둘은 더 가까워졌고 둘 사이에 서서히 사랑이 싹텄습니다. 셰이나는 매우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다가 가출해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살다가 거의 죽을 지경에 교회에서 죠를 만나 그와 결혼했다는 겁니다. 죠에게 구원받은 거였지요. 그녀는 죠에게 적지 않게 정신적인 학대를 당하지만 자기를 구원해준 남편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한편 죠 역시 온갖 나쁜 짓을 하며 살다가 폐인이 되어 죽기 일보 직전에 예수를 만나 새 사람이 됐습니다. 구원받은 죄인이었던 겁니다. 그 후 그는 거듭나 새로운 사람이 됐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아내 셰이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녀를 인형처럼 아끼고 쓰다듬기만 할 뿐, 한 인격체로 존중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는 아내를 새장에 가두고 컨트롤합니다. 그는 셰이나에게 물을 주고 모이를 주고 쓰다듬어주지만 새장을 열어 그녀가 훨훨 날아다니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모든 일은 죠가 알아서 다 하고 셰이나를 그저 따르기만 하지요. 셰이나가 개빈을 만난 후 시간이 흐르면서 둘 사이는 점점 벌어집니다. 죠는 우간다로 가서 그곳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아내에게 묻지도 않고 말입니다. 셰이나가 결단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한 인격으로 존중하고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한편 개빈은 한 번 결혼한 적이 있고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딸을 차에 태우고 가다가 심장마비가 온 운전사가 운전하는 트럭에 치어 그만 딸을 잃습니다. 트럭이 덮치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운전대를 돌렸는데 그만 트럭이 딸 쪽을 덮쳤던 겁니다. 그 후 아내는 개빈에게 사고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아내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원망을 읽어내고 끝내 헤어지고 맙니다. 개빈은 그 후 한동안 홀로 지내다가 셰이나를 만났던 겁니다. 개빈과 셰이나, 그리고 죠의 관계는 이렇게 얽힙니다. 개빈은 곧 뛰어내리려는 고층빌딩 난간에 위태롭게 서서 이런 얘기를 홀리스에게 들려줬습니다.

 

홀리스에게도 고민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 딸이 있는데 아이를 더 갖고 싶어 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의사의 말은 그가 본래부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란 겁니다. 그럼 두 자녀는 어떻게 된 걸까요? 그들은 홀리스의 아이가 아니라 남의 아이가 아닌가 말입니다. 알고 보니 아내는 홀리스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아이를 너무 갖고 싶어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씨를 받아서라도 아이를 갖기로 하고 남편과 닮은 아이를 갖기 위해 시동생의 씨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규정에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형이 후손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자식을 갖게 하는, 이른바 ‘형사취수법’ 말입니다. 이 말에 홀리스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런 짓을 한 아내를 이해할 수 없어 둘은 심하게 다툽니다. 이런 와중에 개빈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개빈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홀리스의 아내는 계속해서 전화해서 용서와 이해를 빌었지요. 홀리스는 그녀의 눈물 어린 호소를 외면합니다.

 

다시 개빈 얘기로 돌아오면, 결국 죠는 개빈과 셰이나의 일을 알게 됩니다. 죠는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 개빈을 불러 앉혀놓고 자기가 모든 걸 알고 있음을 밝힙니다. 그는 총을 손에 들고 개빈 앞에 앉아서 책상 위에 있는 성경에서 표시된 구절을 읽으라고 합니다. 그 구절은 “간음한 자들은 둘 다 돌로 쳐 죽이라.”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죠는 그대로 실행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개빈은 “그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간음현장에서 여인을 붙들고 온 사람들에게 예수가 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죠는 예수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용서할 테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했는데 “하지만 너희들은 계속 간음죄를 저지를 거 아니냐?”고 되묻습니다. 개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 여기서 반전이 벌어집니다. 느닷없이 죠는 둘 중 하나는 살려주겠다면서 정오에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셰이나를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개빈이 난간에 서 있게 된 데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겁니다.

 

사정 얘기를 다 듣고 난 홀리스는 최선을 다해 개빈을 말립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정오가 거의 다 됐습니다. 개빈은 홀리스에게 자기가 셰이나를 사랑했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아래로 뛰어내립니다. 추호도 주저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 광경을 죠는 셰이나를 묶어놓고 재갈을 물려 놓은 상태에서 맞은편 호텔 방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개빈이 떨어진 후 죠는 곧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갑니다. 셰이나도 경찰서에 갔다가 조사를 받고 풀려납니다. 그녀가 경찰서를 나오면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죠를 우연히 봅니다. 그는 경건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들고 셰이나를 바라봅니다. 둘은 잠시 눈이 마주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헤어집니다.

 

홀리스가 일을 다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와 아이들은 저녁식탁을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표정은 불안으로 가득합니다. 홀리스는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자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안심한 아내가 같이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하니까 홀리스는 오늘은 기도하지 말고 그냥 먹자고 말합니다. 이들이 약간 어색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사랑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

 

영화 줄거리를 비교적 길게 얘기했습니다. 그래도 2시간가량의 영화를 요약하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영화를 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지만 저는 오직 하나의 관점으로 영화를 봤습니다. 행동하느냐, 행동하지 않느냐가 바로 그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여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죠는 셰이나를 사랑합니다. 그것은 분명 진정한 사랑입니다. 개빈의 셰이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세상의 잣대로 보면 ‘불륜’임에 분명하고 죠의 말대로 구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돌 맞아 죽을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한 게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홀리스의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남편 아닌 시동생을 통해서 두 아이를 낳은 것은 시동생이 아니라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아이를 원하지만 낳을 수 없는 처지인 남편에게 아이를 안겨주기 위한 사랑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녀가 구약성서 율법규정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그녀는 남편 홀리스를 사랑했기에 그런 엄청난 행위를 했던 겁니다.

 

등장인물 중에서 개빈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신앙의 모습은 다 다릅니다. 그 중 두드러진 신앙인은 단연 죠입니다. 그는 극단적인 근본주의 신앙인으로서 매사에 엄격하고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아내를 대할 때도 이런 차가움과 엄격함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와 같은 그의 신앙은 폐인이 되어 죽을 위기에 몰렸다가 느닷없이 예수를 만난 데서 비롯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생이 매우 비참하고 세상이 무척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그가 경험한 세상입니다. 그런 악한 세상에서 구원받은 그는 악에 물들지 않으려면 악의 싹을 잘라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는 아내 셰이나를 그런 악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겁니다. 그 방법이 그녀를 새장 안에 가둬두는 것이었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개빈은 무신론를 자처하지만 신앙을 생각할 때 그를 제외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는 신이나 천국의 존재 같은 것들이 입증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을 뿐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믿음을 피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들 모두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개빈과 죠는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방법은 매우 다릅니다. 죠는 셰이나가 자기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에게 전권을 행사하지요. 그는 하나님을 매개로 그녀를 컨트롤합니다. 그는 우간다 선교에 대해서도 아내와 일언반구 상의하지 않고 혼자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무슨 딴 생각을 하느냐는 태도입니다. 죠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결코 존중하거나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한편 셰이나는 죠에 대해 자격지심을 갖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삶을 살다가 죽기 직전에 죠에 의해 구원을 받은 그녀는 죠 앞에만 서면 움츠려듭니다. 죠에 대한 자신 없음과 종속감 때문에 그녀는 자기 삶에 대해 주체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그녀도 문제지만 그녀를 주체적으로 세워주지 않는 죠의 사랑도 문제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주체적으로 살도록 세워주는 게 아닙니까.

 

개빈은 그런 셰이나를 동정하고 사랑해서 구출하려 합니다. 셰이나도 이에 동의하여 집을 나올 계획을 세웠다가 죠에게 붙들린 겁니다. 이제 개빈은 결단해야 했습니다. 자기가 뛰어내리지 않으면 죠가 셰이나를 분명 죽일 것임을 그의 눈에서 읽은 개빈은 분명히 결단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셰이나를 위해서 어떻게 할지를 결단해야 했습니다.

 

홀리스 부부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남편이 아이를 그토록 좋아하지만 가질 수 없음을 알고 아내는 ‘행동’을 합니다. 보통사람들은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말입니다. 그녀는 보통사람은 넘지 않는 선을 넘었습니다. 현대인의 상식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어도 시동생에게서 아이를 얻지는 않습니다. 물론 구약성서에는 그런 법이 있지만 말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그녀가 구약성서의 형사취수법을 알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나중엔 그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없어서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시동생의 씨를 받은 게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에게 아이를 안겨주려고 그랬으니 말입니다.

 

구경도 아니고 고백도 아니고 행동이 신앙이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10장의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비유이기도 하거니와 저도 여러 번 설교했기 때문에 굳이 비유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비유에서 제가 주목하는 대목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여라!

 

제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과거 예수 시대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라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삶’에 방점이 놓여 있었지요.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예수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온몸으로 하는 것이지, 머리나 입술로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3백 년이 지난 다음엔 예수를 믿는다는 게 예수가 누군지를 바르게 고백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 시대에 신앙은 온몸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입으로 고백하는 걸로 바뀐 겁니다. 이젠 예수가 누군지 입으로만 제대로 고백하면 됐습니다. 마치 거기에 신앙의 성패가 달려 있는 듯, 모두들 거기에 매달렸습니다. 온갖 이단 시비가 나온 때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예수가 누군지를 정통교회의 고백과 달리 고백하면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더 황당한 점은, 신앙의 핵심은 예수를 올바로 고백하는 데 있지 않고 예수처럼 사는 데 있다고 주장하면 그것도 이단 취급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타락’의 정점은 요즘 교회들이 보이는 행태입니다. 이젠 예수 믿는다는 게 예수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바로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신앙은 예수를 구경하는 게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를 이끄는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구경하고 박수만 치면 되게 됐습니다. 요즘은 이게 기독교 신앙이 돼버렸습니다. 요즘 신앙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구경만 잘 하면 됩니다. 물론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야겠지요.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깊이 생각하려는 까닭은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잘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입으로 예수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고백하는 것도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누군지 진지하게 묻는 것은, 곧 예수는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신앙을 가졌고 어떤 말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것은 예수처럼 사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난간>이란 영화를 딱 한 가지 관점에서 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사랑을 합니다. 홀리스 부부도 서로 사랑합니다. 죠와 셰이나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빈과 셰이나도 서로 사랑합니다. 영화에서 사랑은 등장인물의 모든 인간관계에 공통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모든 사랑이 다 같지는 않고 모두 바람직하진 않습니다. 영화가 비극적으로 결말지어진 이유는 행동하지 않는 사랑이 관계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처럼 살려면 먼저 예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바로 알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나 ‘내게 필요한 예수’로 그걸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짜 예수는 내 삶을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예수를 제대로 알면 내 삶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불안을 안고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이런 불안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예수가 누군지 올바로 알고 그분의 생각과 삶에 나를 활짝 열어야 합니다. 예수가 내게 원하는 삶이 나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만들 것이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막말로 예수가 나를 망하게 하실 리 없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하면, 예수에 대한 바른 앎은 바른 삶을 살기 위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가 학술적 연구의 대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예수를 연구하는 신학자, 성서학자들이 그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연구 결과를 이용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처럼 사는 것인지, 예수가 우리에게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인지를 배우면 됩니다. 곧 바른 앎을 바른 삶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자는 얘기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진정 예수가 어떤 분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노란 배경색상은 퍼온이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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