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사가 가는 좁은 길: 누구나 웬만하면 다 갈 수 있는 길?

by 김원일 posted Nov 01, 2013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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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7 / 성령강림절 스물세 번째 주일

 

그리 좁지도 험하지도 않은데...

누가 7:13-14

 

곽건용 목사

 

휴가 중 갔던 두 교회

 

저는 지난 20년 동안 다른 교회엔 거의 가보지 않고 우리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렸으니 예배에 관해서는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외출해 본 적이 별로 없으니 다른 교회에서는 어떻게, 어떤 순서로 예배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물론 인터넷을 뒤져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아마 우리 교회 예배가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지난 두 주일 휴가 기간 중에 오랜만에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첫 주일에는 북가주에 있는 한 소도시의 작은 한인교회에서 예배드렸고 둘째 주일에는 집 근처에 있는 한 중형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두 교회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할 정도로 서로 달랐습니다. 교회 크기도 달랐고 교인들의 연령대도 달랐으며 예배실에 들어가 앉아 있을 때 받은 인상과 드는 느낌도 달랐습니다. 한 곳은 전형적인 시골 분위기였고 다른 한 곳을 반대로 전형적인 도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배순서는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배 후에 느낀 점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먼저 예배에 대한 일반적인 얘기부터 해야겠네요. 예배는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과장된 말로 아첨을 하고 내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에게 내가 갖고 싶은 뭔가를 얻어내려는 행위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행위는 제사인데 예배는 제사가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제사도 일반적인 의미의 제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예수님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제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가 매주일 모여서 하는 예배라는 신앙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고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왜 예배를 합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가 지은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기원을 바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신앙행위라고 풀 수 있겠습니다. 더 풀어 보면 예배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총과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그렇게 은총과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아프게 했다면 그것에 대해 참회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기대에 맞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들으며 영혼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신앙행위, 바로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지난 두 주일 동안 제가 갔던 교회들의 예배에는 이것들 중에서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습니다. 두 교회 모두 예배를 시작하면서 2-30분 정도 찬양을 했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길게 찬양순서를 진행하더군요. 찬양은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인도하는 찬양팀 멤버들이 잘 준비해서 진행했습니다. 찬양은 리더들이 준비대로 유연하게 흘러갔습니다. 리더는 분위기에 맞는 선곡을 통해서 교인들의 감정의 흐름을 적절히 이끌어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가 찬양순서가 끝날 때쯤에는 조용한 곡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점은 일반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찬양에 참여한다기보다는 리더들이 이끌어가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특히 첫째 주일에 예배드린 교회는 교인들이 연세가 비교적 높아서 그런지 찬양에 참여하는 정도가 높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요즘 대부분의 교회 예배순서가 대체로 이렇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

 

제가 참여했던 예배와 직접적으로 관계되지는 않지만 두 번의 ‘외출’을 하고 나서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저도 놀랐는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란 카를 마르크스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뜬금없지요? 물론 이 생각은 두 번의 예배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니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마르크스가 한 말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일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이 들어 있는 문맥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의 표현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물론 이 말은 종교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이 말은 종교에 대한 비판이기 전에 종교가 부득이하게 아편 노릇을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말은 종교 자체가 태생적으로 아편이란 뜻이 아니라 인민의 현실이 하도 괴로우니 그들은 종교를 통해서라도 그 아픔을 달랜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 말을 떠올린 것을 보면 두 교회의 예배에서 아픔의 치유를 바라는 교인들의 마음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지나치게 단순한 분류긴 하지만 요즘 기독교인은 두 가지 부류로 대별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에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그걸 진지하게 믿고 믿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왜 믿는가?’고 물으면 그렇게 대답합니다. 다른 편에는 내세에는 별 관심 없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보편적인 사람의 가치와 구별되는 신앙적 가치란 게 따로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부류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자기들의 신념과 주장의 근거가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세에서나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나라는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곳이고 휘황찬란한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는 곳이랍니다. 그리고 그곳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다른 부류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기존 권력에 얼마나 저항적이었는지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종교권력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일갈하셨고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같이 하셨고 드러내놓고 그들을 편드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드시려다가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것입니다.

 

둘 다 틀렸거나 문제가 있다는 양비론에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제가 보기엔 두 부류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현존하는 권력이나 제도를 공격하는 것이 예수님의 주요 목표는 아니었음을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기존의 제도나 체제를 뒤집어엎는 것이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만일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것은 미션의 실패거나 잘못된 방법을 택한 것이 됩니다.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는 게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면 십자가 죽음은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추구한 혁명은 이보다 훨씬 심오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어떤 변화도 피상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려 했던 혁명은 사람의 마음에서 이기적인 욕망이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성향, 그리고 탐욕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람 혁명은 제도혁명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일 수 없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도의 혁명은 사람혁명을 도울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기독교 신앙이 죽은 후의 생만을 위한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인생은 죽음 이후의 생을 준비하는 리허설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엇인가를 이뤄야 할 가치 있는 삶이 아니라 그저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할 과정, 저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 견뎌야 시련의 과정일 따름입니다. 이것은 지금 신을 위해 자살테러를 감행한다면 죽은 후에 맛난 술이 강처럼 흐르는 데서 미녀들에 둘러싸여 흥청망청 먹고 마시게 될 것이라고 세뇌하는 일부 회교도들의 주장과 뭐가 다른가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보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금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으로 가져오신 분입니다.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가서 천국의 삶을 맛보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천국을 맛보게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선택하라고 주어진 삶의 방식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셨고 또 우리더러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한 줌의 누룩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서 반죽 전체를 부풀립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삶 속에 들어와서 우리네 생각과 말, 태도와 삶, 그리고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아닌가 말입니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그리 좁지도 힘들지도 않은 길

 

오늘 읽은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예수님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오늘날에도 예수 믿는 길을 이 세상에서 넘치도록 물질적인 복을 받아 누리는 것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절실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 믿는 길이 웬만해서는 아무나 갈 수 없는 좁디좁은 길,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길, 초인들이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저 마음만 조금 바꿔먹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극소수의 사람들만 당신의 나라로 부르시지는 않았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올해로 목사안수 받은 지 22년이 됐습니다. 지난 22년 동안, 아니 그 전에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제가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라거나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뭡니까?’ 같은 질문이 아니라 ‘왜 목사가 됐습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지,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많이 받은 질문은 ‘왜 이런 식으로 목회를 합니까? 맘만 고쳐먹으면 큰 교회 목회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런 식으로 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처음 질문에 대해서는 별로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미소로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다른 방식으로 목회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방식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것이므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대답입니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힘드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전혀 힘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할 만 하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제가 가는 길이 그리 좁은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넓은 길은 아니지만 갈 수 없을 정도로 좁지는 않다는 얘기입니다. 사람 하나 지나갈 만은 합니다. 제가 덩치가 크긴 하지만 모로 세우면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가면서 벗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제 벗입니다. 같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벗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 말씀대로 좁긴 하지만 걷지 못할 정도로 좁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더러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경고하시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면 기독교가 정말 아편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주는 아편이 아니라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어서 자기가 지나친 탐욕을 부리는 건지 아닌지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놓는 아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기독교와 교회를 보면 저라도 넌덜머리를 칠 지경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깨우친 사람들이 먼저 좁은 길을 가는 것, 저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불만과 불평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입에서 불평과 불만을 거둬내고 묵묵히 좁은 길을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깨우친 사람들이 일상의 삶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겁니다. 우리가 자유와 해방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만이 아편이 필요치 않은 세상을 만드는 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좁지만 너무 좁아서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좁은 길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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