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관님

by 프로테스탄트 posted Nov 04, 2013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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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늦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박 희관님의 어투가 일견 공세 같기도 하지만 갈급함에 대한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말을 하라니 말을 하겠습니다.

 

‘산 믿음’이란 화두를 흘려듣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제 자신이 진정한 믿음에 대한 심오한 의미를 완숙시키고 융해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아울러 꼭 숙성된 믿음의 소유자라야 최상급의 화두를 던지는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제가 그 지존한 화두에 대한 깊음을 넘어섰다면 이 자리에 머물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늘 수련인의 입장이고 천성적인 죄악들과 싸우는 자의 입장에 있습니다. 아직 온전히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취약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개인적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참된 길이 심하게 왜곡 되고 있는 것을 보며 알량한 의기로 서투른 삿대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술회는 개인에 대한 판단이기 이전에 시대에 대한 나름의 진단이라 여겨주기 바랍니다.

 

시류는 기형적 변이를 거듭하며 ‘예수교’에 대한 본질이 실종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배우고 연구하고 있지만 구원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도 피상적인 지식에 머물러 있음을 봅니다. 교회 안에도 구원이란 말이 쉽게 회자되고 있지만 구원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기독교 각 종파는 ‘오직 예수’로 함축하여 예수님의 존재를 높이고 있습니다.  예수를 기독교의 그 본질 자체로 추앙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열심 있는 신자라도 허울 좋은 구호에 머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직 예수’는 기독교의 표찰이 되었지만 그야말로 죽은 만장기의 표찰이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를 언급하며 자신의 진일보한 기독교적 의식을 드러냅니다. 예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보다 아주 후한 인식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성경을 지적하며 여기에 그 진실이 있다고 강변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세주라고 제시하며 그 예언적 암시들을 장황하게 설명하곤 합니다. 단상에서도 예수를 달변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사회, 정치문제로 일관하는 설교보다 훨씬 복음적이라 자위를 하고 있습니다.

 

‘침례요한’이 일어나서 이런 세태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것인데 하고 이 시대의 신자들을 향해 맹렬히 조소하고 꾸짖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예수”까지도 그들의 기도와 설교 중에 언급을 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진정성에 있어 전혀 체중이 실리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에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함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장담은 호언이지만 그들의 영혼은 전혀 예수와 천국에 대한 인식이 머물고 있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회자되는 익숙한 반복을 읊조리는 앵무새의 풍월 같은 것입니다. 대다수의 신자는 천국도 알지 못하고 예수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추측은 할지 모르나 그 앎과 확신은 없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좋아합니다. 침례요한은 다시 조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역사적 예수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진중하게 역사적 예수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오늘의 예수를 발견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진리의 씨앗이 들어왔지만 그 씨앗은 자라나지 못하고 앉은뱅이로 그대로 주저앉아 있습니다. 그 씨앗은 힘차게 발아하고 맹아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전혀 발효하지 못하고 죽은 역사 속에 머물러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 자신은 예수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맹렬하게 그 분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나타난 예수의 흔적들을 붙잡고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천국과 예수는 이제 내게 믿음이 아니라 실제와 사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혀 장담을 할 수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야곱의 죄악적인 실상이 내게도 그대로 비쳐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싸워서 이길 수가 있을까를 깊이 고민하며 얍복강가에 서있는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진정한 교회와 진정한 신자라면 기이하게 변이되어 가는 종교적 양상을 격파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현대의 교회는 많이 이상해져있습니다. 예배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생기도 확신도 감격도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갈멜산 엘리야의 제단처럼 실제적이고 간절함으로 차있어야 한다 여깁니다. 말은 무성하지만 절박함과 간절함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진정한 예배에 동참해 보는 것이 저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산 믿음’은 죽은 것에 대응하는 것이고 당연 부각되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과 예수를 아는 자의 예배는 이 시대의 기성예배와 큰 차이를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의 의삭과 우리의 예배는 하늘을 향하여 힘차게 솟구쳐야 합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예배와 예수의 옷자락을 붙잡는 갈급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개의 이 땅의 예수 신앙과 예배는 죽은 것이라 여깁니다.

 

 

우리의 세상에는 똑같은 외형의 사람들이 있지만 산 자와 축은 자가 있습니다. 천국과 예수를 아는 산 자들이 있고 타고난 자연인 그대로인 죽은 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 자들의 예베는 당연 죽은 자들의 예배와 다를 것입니다.  지금 천국과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기기만의 종교 속에 머물다가 후일 다시 눈을 뜰 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박희관님! 망설이다가 썼습니다. 말이 앞서는 것같고 세리와 창기의 심정이 느껴지기에 글을 쓰기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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