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님
우리의 성소신학은 진화했습니다.
처음에는 조사심판이었습니다.
그것은 대실망의 날에 주님 재림 안하셨지만
이제 막판 심판을 위해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레위기 16장과의 어색한 연결로... 이 개념을 주창한 사람들은 나중에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 심판은
인류전체나 기독교인대중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밀러의 기별을 믿고 나왔던 사람들을 대상으로한 것이었지요.
구원의 문은 그들에게만 한정되어 닫혔습니다.
조사심판은 '닫힌 문'과 떼놓을 수 없는 신학이었습니다.
그 기간은 매우 짧고 신속할 것이었습니다.
이런 비복음적인 신학이 오래 갈 수는 없었지요.
(물론 아직 '재림전심판' 이라는 개념은 남아서
이런 저런 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1844년을 빼면
별로 특별한 영양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6장에 다시 천착하여
죄의 도말 개념이 도입됩니다.
그러다 보니 '십자가로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 고 말하게 된다는
(히브리서의 가르침과도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이지요?)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구원이 완성되려면 십자가로는 불완전하고
1844년부터 시작되는 지성소 죄의 도말이 있어야된다는 말은
마치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는 말 만큼이나
기독교 일반에는 이단적이었지요.
그 죄의 도말이 신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느냐를 궁구하다 보니
완전주의 로 귀결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죄가 하나 하나씩 도말되는 것은
실제로 이 땅의 성도들이 죄 없이 완전하게 되는 경험이라는 것이지요.
이것도 교단 주류가 계속 지탱하기 힘든 사상이었습니다.
교인들에게 이것은 은혜라기 보다는
무늬만 다른 율법주의같은 부담으로 경험되었습니다.
지금도 1844년 이후에는
이 땅에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는
한 줌의 완전한 무리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대쟁투에서의 하나님의 승리의 증거물이다
라고 믿고
용맹정진하는 분들 있습니다.
그 완전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을 놓고 소모적인 논쟁이 있어왔던 것 잘 아실 것입니다.
지성소의 경험 이라서 성소신학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인사동님이 요 밑 댓글에서 말씀했듯이)
그 지성소의 경험은
안식일교회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신자의 영적 경험의 본질에 해당하는 입니다.
님이 말씀하신대로 성경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일들이고
모세나 이사야도 했던 경험이고
저 히브리서 저자가 힘주어 말했던,
이제는 더 이상 이 땅의 없어진 그림자에 주목하지 말고
제발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자는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성소를 다시 발견해서
그래서 종교가, 기독교가 지성소 경험을 알게 된 것입니까?
우리 외에 다른 신학을 신자들은 다 나이롱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결국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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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여기서 1844는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사이트에서
벼라별 오해와 욕을 먹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식일교회는
정체성과 사명에 있어서
참으로 어정쩡하게 발목이 잡혀서
이렇게 어기적 거리고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844년부터 이 세상과 우주에 무슨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말세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고 가르치는 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으면서
얼마나 오래 이 세상을 engage 하면서 사명을 감당하고 사랑하라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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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 가보니 옛것들이 많더군요.
골동품은 귀한 것입니다.
우습게 여기거나
쓰레기 취급하면 안되지요.
잘 가져다가
박물관에 잘 보관해 놓고
감상하고, 표지판도 세워 놓고
견학하고 배우면 됩니다.
그러나 골동품을 사용해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일도 안되고
골동품도 망가집니다.
요즘 교회의 형국은
그 물건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헛간에 쳐박아 두었다가
(1844년 날짜의 중요성을 기초로 설교하는 분 있습니까?)
박물관에 기증하시지요 하면
갑자기 번쩍 하면서
이거 골동품 아니야
아직도 쓸모 있는 물건이야!
그러고 있는 형국입니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1844년부터 이 세상과 우주에 무슨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말세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고 가르치는 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으면서
얼마나 오래 이 세상을 engage 하면서 사명을 감당하고 사랑하라는 말입니까?
이 부분을 많은 교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물먹는 병아리처럼 물 한모금에 하늘 한번 바라보는 모습...
물론 당사자들은 아니라고 강변을 하겠지만, 김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세의 카운트 다운을 세고 있는 가르침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외도 있긴 하지만 (제 경험으로 보면) 50을 기준으로
세대간의 괴리가 점점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젊은 교인들은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어르신들의 가르침(?)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습니다.
말세라서 그렇긴 하겠지만...^ㅣ^
그나저나 김선생님 오래 사시겠습니다. 부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