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하는자와 집착하는자의 차이

by fallbaram posted Dec 04, 2013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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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잘못된것은 없어나 그 의미를 느끼는자의 태도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요 아래 아기자기님이 퍼 올리신 글을 보면 복에 집착하는 불교인들은 절을 찾고 복에 집중하는 불교인들은 법정스님처럼

부처를 생활에서 만나게 된다. 영생과 구원에 집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삶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영생과 구원이

목적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것은 수단이고 그 수단을 거쳐서 영생이 온다고 잘못 믿게된다. 한 부자 법관이 예수 앞에서 

집착에 가득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나는 이 법관과 동일한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었다는 생각에 절로 챙피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이 많았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나는 저 여자가 좋아서 또는 같이 살고 싶어서 결혼을 해야 집착이 아니고 집중하는 결혼생활이 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행복했다면 더더욱 좋을것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다면 어쩌면 결혼생활이 쉽게 불행해 질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 집중하는 목적 (단순히 상대가 너무 좋아서)으로 결혼을 한경우 다소 불행하게 보이는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그 불행을 느끼지 못하거나 불행에 대한 체감온도가 매우 낮을것이다.


내가 여기다 올리는 글들의 내용을 나는 교회에서는 여간해서 잘 표현하지 않는다,( 큼직한 돌하나 맞을까봐 걱정도 되고...ㅋㅋㅋ)그러나 어느날 밤에 평소에 사랑하는 한 후배하고 신앙에 대한 토론을 하다가 상당히 격앙된 분위기가 연출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 없이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했고 그는 곧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그것을 다 지킬 수 있다고 반박했다. 평소에 침착할 줄을 잘 아는 내가 그 순간에 후다닥 열을 받았다. "니가 원하는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를 믿은 결과로 율법을 다 지켰다는 면류관이냐?" 고 핏대를 올리면서 우리교회가 왜 이토록 구원론에서 우왕좌왕 하는줄 니가 아느냐? 고 다구쳤고 그런 꼼수(?)로는 그리스도인이 될수가 없다고 쏘아대다가 거지반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일 이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하는 것들이 애초에 사단이 시비를 걸었던것 처럼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지키라고 하셨다. 로마서에는 아예 지킬려고 노력할수록 점점 더 죄가 많아지는 현상을 율법의 한계(저주)라고  넌지시 이야기 한다. 이것을 깨달아야 그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율법으로는 건너지 못하는 강(율법의 사람 모세가 그당시 여전히 건강한 몸으로 건너지 못한 요단강) 앞에 설때에야 가나안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것이다.  평생을 헤메어도 안식에 이르지 못하는 시내광야와 젖과 꿀이 저절로 흐르는 가나안의 경계가 요단강이다. 율법과 은혜사이에 저 죽음의 강 요단강이 흐른다. 


우리는 죽음 (가나안으로에 장착하는 그 난관)이 두려워 다시 시내산 (율법의 산)으로 돌아가게 된다.두려움이 심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거세게 그 율법을 의지하게 된다. 서슬 시퍼렇게 살아서 율법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던 그들은 광야에서 개 죽음을 죽지 않았는가?.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는자들이 흐르는 물 (요단강의 의미)에서 엣것(육신)을 죽이고 새것 (은혜로된 것)을 얻었다.


모세와 함께 그들이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던 일들이 곧바로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바울신학에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함께하는 가나안 (천국의 그림자)에서 오직 하나님(여호수아)으로만 살 수 있다고 의지하는 그것이 믿음이다.


지키는것과 믿는것 사이에 요단강이 있다.

여호수아가 없었다면 믿음으로 사는 가나안의 삶이 있을 수 없고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것처럼 믿음 (original)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도 믿음의 삶을 살 수 가 없다.

아무나 믿음을 가질 수 있느냐? 그리고 믿음은 실제로 무엇이냐? 를 우리는 심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순전히 자기 힘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고 약속의 땅을 밟기 위해서 꿈에 부풀었던 그 인간 야곱이 요단강의 전신(상류)인 얍복강에서

그가 의지했던 삼십육계의 무기였던 환도뼈가 박살이 나고는 오히려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가나안의 가장 어려웠던 난관 (형 에서) 을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고 건너게 되고 원수의 얼굴을 향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듯 하는 사람이 된것은 그가 육신을 죽이고 오직 밤새껏 겨룬자의 축복으로만 새 삶을 사는 모본이 바로 우리의 것이다. 그는 그로부터 가나안을 집착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형과의 대면에서 그리고 빨리 함께 내 집으로 같이 가자는 에서의 간청에도 "하루바삐 양떼와 가족을 몰아부치면 다 지치고 죽을지도 모른다" 고 하면서 그들의 보폭과 발을 맞우고 아들들이 저지른 끔찍한 디나의 복수전에도 자비와 긍휼로 대하지 못한 아들들의 율법적 행위들을 나무라는 모습도 보게 된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요단강에서 옛것이 죽고 새것이 살아난) 의 삶은 그런것이다. 영적인 거듭남(성령으로 거듭난자)의 약속은 하늘나라를 볼것이라고 했다.


지키는 율법의 약속은 겨우 이땅에서 생명이 길고 건강하다는 것이거나  가보아야 이 땅에서의 (천대까지의) 약속이지만 믿어야하는 산상에서의 축복 (팔복)은 모두가 천국의 약속이다.

요단강을 그 영적 죽음으로 건넌자는 다시는 시도때도 없이 그 강을 다시 건너가서 지킴의 종이 되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다시말해서 구약의 성경절로 마지막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대부분 우리가 믿는다는 그것들은 요단강의 경계가 없는것이다. 시내광야가 들어갈 가나안의 그림자 (표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이 시내광야를 설명하는 어불성설의 길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가고 있다.

다니엘과 요한게시록의 싸움은 이 세상 임금의 뿔(힘)과 하나님의 계명을 믿음으로 지킨 어린양의 믿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이스라엘의 싸움(내전) 은 스스로 지켜서 영생을 얻으려하는 자들의 처절한 몸부림과 오직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뚯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다.


말세에 이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물으실때에 교회에 더 충성하고 안식일을 더 신실히 지키는것으로 착각하지 아니하고 지켜도 지켜도 여전히 누더기 같은 신앙  그 모든것을 다 내어놓고 통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그 사랑의 불가마속에서 내가 없어지는것을 말함이다

이 교회에 요단강의 신학을 바로 깨달은 지도자들이 아쉬운 싯점이다.


집착은 어떤 결과에 뜻을 두는것이고 집중은 그 과정을 좋아하고 사랑하는것이다.

집착은 우리를 무엇인가 지키게 만들고 집중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만든다.

사단도 예수를 광야로 끌고가서 집착의 시험을 테스트 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에 집중했었다.


그러니까 부자 청년법관에게  니가 지금껏 율법의 시내광야에서 니 힘으로 지켜서 벌어둔 그 재산 다 팔고 제로 상태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는것이  나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자는 예수의 초청인 것이다.


"눈을 예수께 돌려 그 얼굴을 주목하라! 그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세상 영화는 사라지네"

민초에 들어와서 그 선한 눈망울 굴리며 만나를 기다리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이 친송가 하나만 잘 불러도 우리도 요단강 건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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