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3년간 국어를 가르쳤고, 지금은 대학 졸업반에 들어선 아이였다. 내가 밀양 송전탑 일로 경찰에 입건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전화한 것 같았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녀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몸조심하시라’고, ‘친구들도 다들 걱정하고 있다’며 녀석은 조금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별걱정 없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위로해주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녀석은 울면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밀양 할머니들이 학교에 왔다. 청년들에게 희망버스 참가를 호소하는 기자회견 자리가 있었는데, 내가 밀양 출신인 걸 아는 친구들이 그 자리에 함께하자고 권유했는데 가지 못했다. 거기서 발언하고 사진이라도 찍히게 되면 곧 있을 취업 면접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울면서 이어가는 녀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잠시간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녀석을 잘 안다. 맑은 신앙심을 가졌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사회과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여러 실천 현장에도 함께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하는 것이 무어 문제가 되겠는가. 녀석의 괴로운 선택은 밀양 출신이 취업면접장에서 반드시 맞닥뜨릴 질문 앞에서
스스로 켕기지 않기 위한, 좀처럼 거짓을 모르는 순수한 영혼의 자기검열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평균 수준의 물질적 삶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양심이 가리키는 떨리는 나침반을 집어던져야 한다는 사실을 녀석의 울음소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녀석의 울음은 2013년에 맞닥뜨린 공안정국이라는 시대의 괴로운 공기로도, 이미 일상을 장악한 감시와 처벌의
촘촘한 시스템으로도, 한국 경제의 장기적 불황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총체적인 질문으로 다가왔다.
불가능성. 이게 사는 것인가? 지금 이 나라에서 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 이 체제 바깥에서도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누가 보여주었을까. 민주주의와 양심의 가치를 누가 가르쳐주었을까. 현금이 별로 없어도 더불어 가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진지들은 누가 다 파괴해 버린 것인가. 영화 <공각기동대>의 유명한 대사,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이 내 발목을
잡는다’는 것. 오늘날 청년세대의 출생과 성장, 교육과 일상의 전 과정에 관철되는 숨막히는 경쟁과 배제의 논리, 안락에 중독된
생존방식으로 오늘날 청년들의 발목을 잡은 이는 누구인가? 그 반대편 밀양 노인들의 8년에 걸친 투쟁은 이러한 생존방식의 물질적
기초, 이를테면 핵발전이라는 ‘악마의 기술’까지 불러내어 미래세대에게 모든 위험과 고통을 뒤집어씌우고 현재 이 순간에도 아슬아슬한
곡예처럼 이어가는 ‘맹목의 풍요’가 이제는 물리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취업준비생의 눈물과 밀양
송전탑 할머니들의 눈물은 이렇게 ‘불가능성’이라는 단어로 만나게 되었다.
극심한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의미 없는 고통은 참을 수 없다. 취업하지 못한 고통은 취업으로 피해갈 수 있다. 그러나 관문
앞을 기다리는 궁전의 집사처럼 취업 이후에도 또 그 뒤에도 오늘날 체제가 부과하는 고통은 순서대로 찾아온다. 살아남을 수는
있겠으나 끝내 공허와 환멸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괴로워 울고 있는 녀석에게 ‘괜찮다’고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네 양심이 너를 살아 있게 할 거’라는 고귀한 이야기를 던지고 싶지도 않다. 고통의 해석학, 나는 녀석에게 이 거대한 불가능성을 응시하고, 그 앞에서 실존을 건 질문을 던질 것을 권한다. 그리고 같은 불가능성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들의 손을 잡을 것을 권한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
버들붕어
지렁이
미꾸라지
억새풀이 사라지고 있는 강가
시꺼먼 콘크리트와 높은 송전탑
아래로 녹조와 썩은 악취만이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다.
시인
철학자
화가
스승
집시가 사라지고 있는 세상
불의에 눈을 감고, 이성에 침묵
함으로 양심에 발목 잡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다.
-가슴이 저미는 2013년 12월 6일 밤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