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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백하고자 하고 토론하고자 하는 대상은 아래의 사람들이 아니다. 1. 성경의 계시가 좀 모자라고 좀더 보충설명이 필요해서 성경 이외의 어떤 계시가 더 필요하다고 믿는사람들 2.성경 차체로는 해석이 불분명하니 다른 ㅅ어떤 선지자급의 해석이 더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 3. 성경은 어느 부분은 계시일 수 있고 어느 부분은 잘못된 편집일 수 도 있다라는 자유 신학주의를 견지하는 사람들 내가 서로 생각을 나누기를 원하는 대상은 1.성경의 특별계시성을 인정하되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modified fundamentalists) 2.성경에 대하여 아직도 확신이 없는 사람들 3. 성경만으로 우리는 분명히 해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은 더 이상 성경에 대한 나의 생각속에 들어와서 속 끓이고 시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비록 쟁이의 신분으로 밥을 먹고 살지만 한때는 신체의 일부분을 해부한 해부학과 그 기능을 깊이 연구한 일이 있다. 그것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들어줄 대상이 많지 않지만 요약하면 나는 그 것을 공부하는 과정중에 이것은 하나님의 pre-planned program 이라고 확신하며 뿅 같던 경험이 있다. 비록 일반계시인 자연의 신비한 원칙하나를 공부해도 하나님의 그 손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의 같은 시간에 나는 성경도 열심히 공부했었다. 자연계시속에 면면히 흐르는 신기한 기능과 패턴은 실로 감탄할 만 했고 그 때 나는 성경 (특별계시)도 그런 신기한 기능의 흐름과 패턴이 있으리라고 가정하고 맥을 짚어가기 시작했다. 느낌표나 점을 찍으면서 다시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하면서 수없이 그런 반복을 하던 끝에 나는 이것 또한 pre-planned program 이 틀림없다는 환희에 머무르게 되었다. 예를 하나 들면 네 방향의 패턴이다. 구속의 큰 사건들마다 네 방향의 등장은 필수였는데 1. 사방으로 흐르던 에덴 동산의 네 강줄기 2.노아의 홍수에 나타난 네 식구(8명) 3.이스라엘 (야곱)의 등장에서 나타나는 네 여자 (야곱에게 아들을 낳아준 라헬과 레아와 두 첩) 4. 모세의 성막을 둘러 싼 네 방향 5. 에스겔에게 보여준 네 형상 6.예수의 복음 7. 네 생물 우리는 늘 한방향의 진리만 고집하지만 성경의 패턴은 사방으로 흘러야 할 씨와 복음 그리고 기별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각설하고 성경에는 1400년에 걸쳐서 삼십여명이 넘는 각기 다른 저자들이 썻지만 그 흐름이 막히지 않고 같이 또는 연결해서 흐른다는 신비함과 그런 패턴과 표상과 상징속에서 문자적으로 절대로 풀 수 없는 어떤 비밀(비유)들이 있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성경을 더 신뢰하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흐름을 무시한 짜깁기식의 교리를 다시 연구하게 되었다. 성경이 흐르는대로 마치 kayak을 타고 내려가듯 같이 내려가 보는 성경연구 보다 먼저 이럴것이다 라고 가정하고 (박사 논문식) 편리한것을 퍼 내오는 구절 맞추기는 대단히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경이 성경을 말하게 하라!" 나는 그 아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를 희망한다. 오늘 고린도 후서는 골로새서 2장의 그 대조를 다시한번 더 강하게 더 선명하게 파 헤쳤다. 소위 율법과 그리스도의 기능적 실체를 사도 바울처럼 소리를 지른 저자가 없어 보이지만 사도 요한은 그의 저서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에서 마치 보물찾기 하듯새겨 넣은 비밀을 1장 부터 9장에 이르도록 반복하고 있다. 골로새서 2장과 고린도 후서 3장을 글자 그대로 읽은다음 우리가 그렇게도 목숨걸며 품고사는 율법(무정란)의 기능과 그 품속에 또 다른 계란(율법으로 인해 무정란이 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와 기능에 대해서 한번쯤은 의문을 가져 보아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사도바울이 거짓 선지자라고 믿든지... 지키려고 애쓰는 율법의 그 행위가 요단강에서 죽고 믿어서 구원을 얻는 은혜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성령의 침례라고 한다. 이 거듭남의 경험 (와장창 내 삶이 변하는 그런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아! 나라는 속절없는 윤리의 육체에서 벗어나서 오직 100%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한 것이구나 라고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믿음이 니고데모에게 말했던 성령의 거듭남인것이다.) 무엇보다도 "다 이루었다!" (already) 를 믿는 믿음이 재림 (not yet)에 이르게 되는것이다. 아직도 그 "다 이루었다!"가 무언가부족해서 1844년(확인 사살?)을 끌어들이는 그 이상한 흐름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짜고 있다. 어린양 앞에 설 허다한 무리들을 우리가 믿고 함께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1844년 (허다한 무리들을 다시 가두어 버리는)에서 벗어나자.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한다는 로마서의 말씀이 맞다면 십자가 (은혜) 이후에 우리는 다시 정죄하는 율법의 기능( 심판)으로 돌아간 것이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책에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하실 분으로도 생각하는듯하고... 내가 성경을 이해하는 패턴으로 보면 계시록 21장에는 "내가 새 하늘에서 죄가 기록된 책을 보지 못하였으니 ㅎ나님과 그 어린양이 그 책이 되심이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
가을 바람님같은 분이 이곳에 있으니 참 좋습니다
쓰시는 글 스다에서 얼마나 고민 많으셨는지 안봐도 비디오입니다
나도 똑같은 고민에서 수십년을 보냈으니깐요
쓰시는 논리를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번만 더 깡충되었으면(하셨으면이 아니라)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비상 그곳에서 엄청난 자유를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님뿐만 아니라 민초들 모두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예전에는 스다는 쓰다였습니다
지금은 스다는 시시하다입니다
죄송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