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by passer-by posted Dec 09, 2013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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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실은 적이 있는 똑같은 시를 이 공간에 다시 싣는다.

 

이유는 이 시가 말하는 바가 지금 가장 시의적절해졌기 때문이다.

 

 

 

 

 

 

제도

김승희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칠이 나갈까봐

두려워 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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