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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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수민이가 사다 기르는 인공(?) 물고기가 있다.
한 3, 4cm나 될까?
이 물고기는 한 어항에 한 마리밖에 기르지 못한단다.
한 마리 이상이 있으면 나머지가 죽을 때까지 싸운다나?
뭐 하긴 어쨌든 상관이 없었다.
난 원래 동물 기르는 일엔 관심이 없으니까.
더군다나 얜 수중생물이고 난 육상생물이라 워낙 환경차이도 많이 나니까.
그랬던 내가 요즘 이 물고기 때문에 엄청 우울해하며 살고 있다.
이 아이의 수명이 얼마 안남은 것 같아서이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보통 물고기였으면 절대로 이런 마음이 안 들었을 건데.
이 아이는 마치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느낌을 들게 한다.
이 물고기는 가만히 있다가도 내가 나타나면 어항 안에서 나와 최대 근접거리까지 헤엄쳐온다.
그리고 몸과 지느러미를 막 빠르게 움직이면서 반가워한다.
나는 먹이를 한 번도 준일이 없는데도 그렇게 한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의 것과 같다.
그런데 부산스럽던 이 아이가 요즘은 물 밑에서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적이 많아졌다.
참 감동스러운 것은 그래도 내가 나타나면 나를 반가워하는 행동을 힘겹게나마 한다는 것이다.
옆 어항의 아무 생각없이 노는 금붕어들과 대조되는 철학자 같은 이 물고기...
이 물고기에게 향하고 있는 내 마음의 정체성이 감이 잡히지 않는다.
혹시 죽어가는 정인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일까?
요즘 내 전 존재를 장악하고 있는 관심사는 ‘죽음’이다.
죽음 앞에서 초연한다한들 그 마음조차 생명의 불꽃이 지펴있는 동안만 잠시 의미가 있을 뿐이지.
곤고하다.
허망하다.
진공상태의 허공에 떠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지 오래되었다.
어항에 산소거품을 뿜어주듯이 내게도 미세먼지 섞인 산소가 공급되고 있다.
푸르던 내 몸짓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나마 붙들고 있던 믿음의 끈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그 끈의 반대편 끝은 정말 그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일까?
내 영혼은 지금 인생의 중력에 당겨져 죽은 듯 누워있다.
누군지 모르는 어항 밖 존재에게 파르르 펼쳤던 나의 몸짓은 더 이상 없다.
저 인공 물고기처럼 되어버린 내가 사라지기 전에 그는 과연 올까?
이 밤을 즐기자.
내일의 밤은 오늘의 밤보다 더 적막증(?)에 걸린 것일게 분명하니까.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욥 3:20-21
*죽음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으신 분은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세요.
(임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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