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토사구팽 (안식일 이야기)

by fallbaram posted Dec 17, 2013 Likes 0 Replie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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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혼자서 해보는 가상 씨나리오.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지림교회의 신실한 장노님에게 던지기에 적당한

돌 하나를 주고 그 앞에 두 사람이 돌을 맞기에 적당한 거리에서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기다" 라고 소리치고

또 하나는 "안식일은 폐했다" 라고 선언 한다면

그 안식교인이 돌하나를 어디에 쓸까?


20 여년전 성경의 많은것들이 궁금하고

또 견고한 토대의 집회를 갔다와서

대체 그들과 우리가 뭐가 다른것이냐고

대드는 안 사람에게 아무 대책이 없던 내가 어느 대학의 학부에서

제공하는 신학 과목 두개를 택하고 공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그 교수의 이름과 과목의 이름은 기억에 없지만

아마도 성서 신학 (Biblical Theology) 이라는 제목이지 않았을까 라는

희미한 기억과 키가 엄청 크고 말수가 적은 40대의 교수였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강의의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때 일어났던 일로 내게는 내 신앙의

어떤 획을 긋는 한 중요한 사건을 맞게 된다.


그 교수가 내어준 숙제가 그 발단 이었다.

숙제의 내용은 이런것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안식일에 관한 성경절을 모두 뽑아서 가져오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찾는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라 성구사전을 여러개 갖다놓고

일일이 하나씩 찾아 확인해야하는 무척 번거로운 과정을 겪었다.


힘들게 힘들게 구약에서 쏟아져 나오는 안식일에 관한 구절들을 빠짐없이 읽고

기록하면서 이대로 가다간 결국 숙제를 학기안에 끝내지 못할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안식일을 연구하느라 쉼이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신약은 내게 구원과 자비의 손을 펼쳤고(?)  신약안에서 나오는 안식일에 대한

구절은 거의 한장 남짓한 분량으로 끝이 나면서 나는 신약에서 안식일이라는

숙제로 부터 안식(?)의 단맛을 누리게 되었다.


할렐루야!!!


그것들 중에선

안식일이 구약에서 말하던 바로 그 날이니 그 날을 엄숙히 지켜야 한다는 직접적인

확인 (endorsement) 이나 재 천명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안식일을 다르게 대하는 예수에 대한

논쟁 몇개가 그 대부분이었다.


왜 그런 숙제를 그 교수가 내어 주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것을 하면서 내 신앙의

특별한 전환점이 되는 경험을 하게된다.


내 마음속에는 두가지의 질문이 늘 있었다.


질문 하나

왜 허다한 무리(?)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가?

(심히 안타까운 마음)

그들에겐 구원의 희망이희박한 것인가?


질문 둘

왜 인간 역사의 주인이시고 구속의 역사속에서도 빈틈이 없었던 그 하나님께서

이리도 중요한 진리 (?)를  2000년이 지나가도록  경배의 역사에서 빠뜨려 놓고 그리도 태연하셨을까?


그 당시에 지금은 작고하신 Morris Venden 목사 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주제로

쓴 책들이나 설교 강의 테이프를 읽고 듣는일에 거의 하루의 일과를 바치고 살았었다.


그리고 신 계훈 목사님의 표상에 관한 (눈을 뗄 수 없는) 흥미로운 설교도 열심히 들었었다.


태양의 광선을 오목렌즈로 촛점을 모으면 그 촛점이 점이되는 거리에서 뜨거운 불이

일어나게 되듯이 나는 구약 전체에 도도히 흐르는 표상이라는 모든 광선들을 모아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게로 집중 시켜 보았다.


십자가에 불이 나더라.

정말 불이 나더라.

"너희가 성경 (구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말하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안식일은 율법의 한 테마로 주셨는가?

아니면 오실자의 표상으로 주셨는가? 를

우선 우리는 규명짓고 갈라내야 한다.


첫째 아담(흙에서 나온 육)안에서 그리고 육적 이스라엘의 신앙속에서 안식일은 율법의 한 중요한 테마다.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할 큰 테마다.

그것이 영으로 오시는 둘째 아담 안에서도 율법의 한 테마요 지키지 아니하는 자를 돌로 쳐야 할

죽음보다 더 귀중한 신앙의 축으로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대답이 있어야 한다.


고린도 후서 3장에는

모세는 돌에 새긴 의문의 율법을 받은자고

모세는 그 의문으로 죽이는 직분을 맡은자고

그 의문(돌에 기록된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수건의 직분을 맡은 자이고

그리고 그 직분은 곧 없어질 (십자가 이후)  그림자의 영광 이었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그 없어질 영광속에서 살아남은 의문(율법) 하나가 안식일 인가?


표상과 각 성경의 흐름속에서 돌에 새겼다는 것은 육신에 새긴다는 의미로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살리는 영)이 오셔서 율법을 돌에 새기지 아니하시고

마음에 새기는 것은 마음이 성령의 전이기 때문이다.

그가 왔을 때에야

그를 만났을 때에야

그를 이해했을 때에야 수건이 벗어지는 순간이 된다.

목적지가 율법이 아니고  예수가 된다.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하면  다시 율법이 살아나는 것이다.


평생을 안식일 신학에 몸을 바쳤다는 한 신학자가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는 보배같은 제목의 책을

쓰셨다.

그 외에도 다른 책에서 그는 안식일 신앙의 특별함에 대해서

상당한 변증을 이미 하신 터이라 그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이 책을 몇장 뒤적 거리다가 한숨을 쉬게 되었고 그 책에 심취한

평생 사이좋게 지내는  내 방원(?)이랑 심한 다툼이 있었다.


제목은

"이 이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

라고 썻지만


그 다음의 소제목인

"안식일 신앙의 재발견" 이 결론이다.


재 발견이라고 한 부분에 있어서 나도 동의하는 부분은

그 분이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칭의의 신학으로

보는 안식일"의 유일 무이한 학자라는 것이지만  안식일에 누리는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에 누리는 모든것들로 다시 채운 것일 뿐

제 칠일 안식일이 바르다는 생각에서 한발도 음직인것이 없다.


기성 재림교회의 주소가 안식일=진리 일요일=비 진리 라는

무지막지한 생각이 굳어져서 일요일 교회엔 끝내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지만


이분 (교수님)의 논리나 변증은 일요일 준수자들에게는 더 심각하다.

안식일 신앙속에 거하지 않으면 그 안에만 있어 보이는

칭의와 자비 거듭남 등등의 것들을 얻지 못하고

신앙이란 명제 아래서 유리방황하는 무리가 되고 마는것이다.


이 아들(예수)은 결국 어떤 시간에 속한 무리들만을 안위하는자가 되고

말았고 우리는 그 안위가 담겨있는 시간대(안식일) 속으로 필시 들어가야 한다.


죽음이 선언된 육신에 안식일을 섞으면 그 몸이 구원을 받을까?

죽음이 선언된 육신을 위해 예수가 죽었다면 그 육신에 구원이 있을까?


모세 안에서 우리의 육신은 율법이 거하는 죽음의 직분을 받았지만

예수 안에서 우리의 영 (새 마음)은 성령이 거하는 영생의 직분을 받는 것이다


모세안에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은 씨(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몸의 할례를 

받았지만

예수 안에서 새 이스라엘은 그 씨의 오셨음을 새기는 마음의 할례(성령의 침례)를 

받는것이다.


모세안에서 옛 이스라엘은 안식일의 주인을 기다리며 시간을 지켰지만

예수안에서 새 이스라엘은 그 안식일의 주인이 왔으므로 그 주인이 베푸는 안식에

들어가는것이다.


시간 준수는 육에 속한것이라 여겨지고

마음을 붙드는 (믿음의 행위) 것은 영에 속한것이라 여긴다.



  1.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2.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3.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렇다 안식을 받은자들이 다시 일주일의 주기속으로 돌아가 오실자를 기다리듯 또 다시 기다림이 어불성설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는 여섯개의 항아리(육의 고달픈 시간)에 채운 물을 포도주 (영적인것)로 변화시키고

그 일곱째의 것으로 변화시킨 여섯(노동의 날들)의 포도주를 나누어 주라 하지 않았는가? 안식이다. 이것이 에수가

주는안식이다

예수는 이제 바리새인의 그  잘라낸 십일조와 짤라낸 기도의 시간(안식일)에서 벗어나서 작고 적어도 좋으니

과부의 동전 두닢처럼 전부를 드리라고 하신다.

우리의 삶은 이날 저날을 폄론치 말고 주께 드려야할 안식의 시간들이다. 그

래야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짤라낸 헌금 (십일금?)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다.

짤라낸 시간 (하루)도 더이상 거룩하지 않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짤라 내지않고) 그도 자기의 일을 쉰다하지

않는가?

 

구약에서 안식일로 꽉 찼던 옛 이스라엘의 예배

그리고 신약에서 텅텅 비어있던 그 안식일과 다시 꽉꽉 

차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을 나는 지금 이해할것 같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세상의 역사속에 맞물려 가면서도

구원의 진리나 원리가 손상되지 아니하고 내려왔던 그 역사를 나는 안식일을

오실자의 표상으로 끌고 가면서 1500년 이상의 공백을 이해 할것 같다.


물론이다

그 용의 세력은

성소를 무너뜨리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금하고

때와 법을 변경했다.


마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다는 그 약속처럼 이미 표상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발꿈치의 것들만 상하게 했다.

머리인 참빛, 생명, 은혜 그리고 성육신하신 진리는 사단이

어찌 하지 못했다.


성도는 이 구원의 놀라운 사건과 진행속에서

이미 상한것으로 돌아가거나

이미 폐한것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앞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어린양이 있고 내 아버지가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제칠일 안식일(현재)과 또 예수 재림(미래)으로 나누어 믿는 양다리 믿음에서

벗어나서

제칠일 안식일=예수 라는 초림과 재림위에 든든히 서는

오직 하나의 믿음에 굳게 서는 재림교인들이 되자!


일요일 교인들 중엔 일요일을 숭배하는자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고 그들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고

안식일 교인들 중엔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자 보다는 안식일 숭배자가 의외로

많다는 나의 생각이 사라지기를 희망하며...


"나사로가 잠이 들었다" 고 하니 그가 진짜 잠이든것이라 믿는 무리들에게

"나시로가 죽었다"라고 다시 설명하신 예수님.

"율법이 폐하였다" 고 하시고는 아니다 나는 이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왔다" 는 예수님.

"심판하러 왔다"고 해 놓고는 "심판하러 오지 않았다"고 번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가 너무도 좋아하는 "일점 일획도 변치 아니하는 그 율법"사이에

당신은 어디 설 것인가?

율법이 정직한가?

예수가 정직한가?


일요일도 말고 토요일도 말고 예수께로 가자

안식일을 완전케 하려 오신 그 분에게로 가자


안식일 위에 안식이 계시고

안식일 밑에 율법이 있다고 하면 비 성경적일까?


성경엔 남은 무리도 있고

동시에 허다한 무리도 있다


기왕이면 허다한 무리와 함께

우리 모두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께로 가자


오늘도 하고 싶은 말:


바른 신학은 바른 신앙을 위해 필요하지만

신앙은 신학을 위해 있지 아니 합니다.



추서: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

안식일에 대한 모든 성경절을 신구약으로 나누어 읽고

요한복음전체

골로새서 2장 전체

고 3장 전체 그리고

계시록 전체를 읽고난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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