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보다는 북학으로: 적에게 배우기 - 이상수

by 백근철 posted Dec 17, 2013 Likes 0 Replies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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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북쪽은 오랑캐가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농경민족인 중국의 이른바 '중원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이용해 전쟁을 치렀다. 

승(乘)이라 불린 이 전차는 나라의 크기와 군사력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조나라의 북방에는 융적(戎狄) 계열이 세운 중산국이 있었고, 흉노 계열의 겨레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병력은 유목민답게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 중심이었다. 

이들은 말타기에 편하도록 간편한 바지를 입었고, 무정형의 대열을 이루어 전광석화처럼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오랑캐들의 기동전에 시달린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오랑캐의 복장과 기동 전술을 배워 군사를 오랑캐처럼 훈련했다. 

이를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한다. 

직역하면 '오랑캐의 옷을 입고 말 달리며 활을 쏜다'는 뜻이지만, '전면적인 개혁의 단행'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무령왕은 적에게 배운 전쟁술로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흉노를 몰아낸 뒤 조나라 장성을 쌓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오늘날 프랑스) 지역의 반란을 진압한 뒤 <갈리아 전기>를 썼다. 

이 기록을 보면 가장 완강하게 저항했던 장수는 베르킹게토릭스였다. 

서기전 52년 알레시아 요새의 결전에서 패해 로마로 끌려간 뒤 처형당한 베르킹게토릭스는 프랑스의 민족영웅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영웅이지만, 프랑스인에겐 사나운 침략자일 뿐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카이사르를 높이 평가했다. 

나폴레옹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인(武人)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소장 고문자학자 리링(李靈)은 최근 출간한 <손자병법> 해설서인 <병법은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兵不厭詐)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무인은 적이 가장 좋은 스승이라는 것을 안다. 문인에게는 이런 도량이 없다."

무인 사이의 대결에서 말은 필요 없다. 

승패를 결정짓는 건 실력과 담력이다. 

무인은 패했을 때 고개 숙이고 수긍한다. 적이 나보다 강하면, 그의 강점을 배워야 생존할 수 있다. 

적은 나의 스승이며, 강할수록 더 훌륭한 스승이다.

문인은 그렇지 않다. 문인은 져도 할 말이 많다. 아니, 문인은 말로는 영원히 지지 않는다.

홍대용은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군자는 도를 논하다가 자기 이치가 부족하면 상대의 논리에 승복하지만, 소인배는 도를 논하다가 말이 달리면 다른 말로 둘러댄다."(君子論道 理屈則服 小人論道 辭屈則遁)

실력이 부족함을 안다면 그는 군자이고, 실력이 부족한데도 패배를 인정할 도량이 없다면 그는 소인배이다.


1637년, 여진족이 세운 청이 쳐들어와 조선의 왕 인조가 항복한 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은 볼모로 잡혀 선양으로 끌려갔다. 

8년 뒤인 1645년 청은 명의 수도 베이징을 함락시킨 뒤 두 왕자를 조선에 돌려보냈다.

2월18일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4월26일,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인조실록>은 세자 독살설과 그 배후가 인조임을 암시하는 기록을 곳곳에 담고 있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소현세자로 대치할 것이 두려웠다. 

세자가 죽으면 세손(세자의 아들)이 승계하는 게 당시 예법이지만, 인조는 세손을 배척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앉혔다.

인질로 끌려간 두 왕자는 청에서 생활하며 역경 속에 우애를 나눴지만, 청에 대한 시각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 

소현세자는 청의 고위층과 교유하며 사냥을 따라다녔고, 명군의 항복 조인식에도 배석했다. 

1641년부터 청이 둔전 경작을 허용하자 부를 쌓아 청의 문물을 수집하기도 했다. 

베이징 함락 뒤에는 베이징에서 70일 동안 머물며 독일 선교사 아담 샬과 교유해 서학에도 눈떴다. 

소현세자는 청의 국가 시스템을 가까이에서 관찰했고, 유럽의 존재도 알았다. 

그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이 최초의 해외파 군주는 무모한 반청 정책 대신 선진 문물의 수용에 힘썼을 개연성이 높다.

동생 봉림대군은 청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인조의 인정을 받은 뒤, 왕위에 올라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소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본 그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명은 중화이고 조선은 소중화인데, 오랑캐인 청이 명을 멸망시켰으니,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나라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을 치자는 게 북벌 논리였다. 

그 배후에는 중화-오랑캐의 이분법과 사대주의 논리가 있었다.

효종은 북벌을 위해 상비군 병력을 늘리고 기병을 도입하는 등 군비를 강화했으나, 

객관적으로 청을 공격할 수준의 군사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북벌 정책의 그늘 밑에서 백성들은 무기 제작 등 부역의 증가로 민생고를 더 무겁게 느껴야 했다.

북벌 강경론은 송시열 등 반청척화파들이 주도했으나 이들은 멸망한 명 황제를 위해 사당을 짓는 일 말고는, 군비 강화를 위해 실제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 사람들이 북벌의 허구성을 조금씩 느낄 즈음, 북벌 대신 북학을 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오늘날 '북학파'라 불리는 소장 학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가장 선구적인 인물은 홍대용이다. 

1765년 그는 사신 일행에 끼어 청의 수도 연경에 가서 한족 선비들과 필담을 나누고 돌아온다. 

새로운 세상에 눈뜬 그는 "지구는 둥글어서 어느 한곳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가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주장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인 줄만 알았던 조선 지식사회에 충격을 안긴다.

박지원은 1780년 홍대용과 같은 방법으로 청에 다녀온 뒤 <열하일기>를 썼다. 

그는 "개미는 두 눈을 부릅떠도 코끼리를 못 보며, 

코끼리는 한 눈을 찡그려도 개미를 못 본다"(蟻…瞋雙眼而不見象, …象?一目而不見蟻)며 , 

문화상대주의 논리로 중화중심주의에 도전했다.


이런 새로운 시각을 '북학'이라 표현한 이는 박제가였다. 

그 또한 1778년 연경에 다녀온 뒤 쓴 <북학의>(北學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에게 이익이 된다면 오랑캐의 제도도 받아들여야 한다. 

…옛날 조나라 무령왕은 오랑캐의 옷 입기를 마다하지 않아 끝내 오랑캐를 물리쳤다. 

…사내가 원수를 갚고자 할 때, 원수가 날카로운 칼을 차고 있으면 그 칼을 어떻게 빼앗을지 고민하는 법이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생각을 바꾸는 데 적어도 120년이 걸렸다. 

이 전환의 과정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 체험이다.

북벌과 같은 강경 논리는 매우 선명하고 매력적이지만, 객관적 실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공리공담에 지나지 않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전환하는 지혜는 오늘날 한반도의 남북 두 정권에 똑같이 절실하다. 

1990년대 초부터 핵 보유를 추진한 북한은 2006년·2009년·2013년 세 차례의 핵실험과 

2012년 운반로켓 발사를 통해 '실질적 핵보유국'이 됐다고 주장한다. 

군사 노선을 앞세우는 '선군 사상'은 북벌 논리와 매우 닮았다. 

미국과 전쟁을 치렀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여태껏 미국의 압박을 받는 북한의 이 노선을 이해 못할 건 없다. 

그러나 북벌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북학이 절실하다는 옛사람의 깨달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주의라는 오랑캐와 싸우는 대신 그것을 배우기로 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북벌에서 북학으로 전환한 전형적인 사례다. 

한국도 한-미 동맹의 그늘에서 나와 중국의 실용주의와 북한의 자주노선을 넘어서야 동아시아 정세를 주도할 수 있다.

<서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옥이 나오는 곤륜산에 화염이 덮치면, 옥과 돌을 모두 불태운다."(火炎崑岡 玉石俱焚) 전쟁은 선인과 악인을 나누지 않고 모두 불사르는 화염과 같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사유를 전환할 때 전쟁 말고도 적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글 / 이상수 철학자, 저술가. 연세대 철학박사(제자백가의 논리철학 연구). 전 <한겨레> 기자, 베이징 특파원. 저서로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한비자, 권력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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