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수님 단상

by 카운셀러 posted Dec 28, 2013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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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수님의 글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이 오고가네요. 거침없는 일필휘지의 글을 대하며 저 역시 여러 상념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우선 달수님의 사회성 결여가 자구 자구마다 엿보입니다. ‘독불장군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찰과 대립 없는 공생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사회나 동물사회나 마찬가지이지요. 그 정도의 충돌 없이 살아가는 삶이 있을까요? 그러한 사유로 때려죽이고 총질을 해댄다면 아마도 인간사회는 살인천국으로 공멸하지 않을까요? 마음의 분노, 인간 삶의 부산물입니다. 인간적 방법으로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좀 이해 불가한 것은 달수님의 공언에서 드러난 바, 신앙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어째 실천적인 부분에서는 낙제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품성, 신앙과 생활양식의 일치 없이 가는 종교는 없습니다. 달수님의 과격한 분노는 대충 도덕과 윤리로 범벅 시킨 사이비 종파의 기본에서도 걸러집니다. 계속 이대로 가면 실패한 신앙이 될 것임은 자명합니다. 적어도 달수님은 돌려대고 포장하는 유형은 아니라 여겨지네요. 표리부동에 지능까지 내재한 영악한 자들은 속에 있는 부글부글 앙심을 그대로 표출하지 않습니다. 속내를 감추지요. 본능을 이기려고도 하지만 음흉하기도 한 야누스적 양상을 띄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꼿꼿하게 반응하는 달수님의 스트레이트적 삶은 그렇게 절망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달수님은 또한 비굴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렇게 가학해야할 삶은 아닌 듯합니다. 님이 가진 목사들에 대한 시선 교정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목사들의 삶은 극히 표면적인 것입니다. 나름의 애환이 있고 이면의 삶이 있습니다. 교회와 교인과의 관계에 앞서 급여의 목줄을 쥐고 있는 조직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달수님이 증오하다시피 하는 목사들의 삶은 그렇게 호사롭지 않습니다. 대개 목사들은 두 개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조직에 순응하기 위한 자존감 내팽개친, 또 다른 심장이 필요하지요. 확고한 자아확립을 설교해야 하지만 힘겨운 일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가당착에 힘없는 말로 전락하기 영락입니다. 교회직분은 기능이라고 강조하지만 목사사회는 연차별로 서열정리가 확실하지요. 신참목회자들은 설설 기는 자세가 늘 몸에 배어있어야 연명할 수가 있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굴종이지요. 특권층 사회가 그러하듯이 목사사회에도 그러한 풍토가 만연합니다. 기괴한 신앙조직 틈새에서 기생하지 못하는 열혈지성들이 있습니다. 박차고 나오기도 하지만 대개 쓸개를 떼고 살아갑니다. 식솔을 외면하지 못하지요. 그런 메스꺼운 풍토 속에서 의식 있는 진품들이 좌불안석하고 있습니다. 쓸개 떼어버린 목사의 인간적 매력은 극히 부실해집니다. 어느 인간사회에서나 성직자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묵계되어 있기에 최소한의 위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요. 멀리서 보면 선망할지 모르지만 들여다보면 불쌍하기도 한 것이 목사 삶의 실상입니다. 박차고 나와야 생활력은 부실하고 민낯의 인간적 매력은 보잘 것이 없습니다. 어느 면에서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님의 생존이 더 우월하고 당당하게 비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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