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年)가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말(1)

by 아기자기 posted Dec 29, 2013 Likes 0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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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종교인들이 박근혜 물러나라고 외치는가?  /박노자

출처 : <기독교 사상> *'2014년 1월호'

20여년 전에, 박근혜 정권의 관계자들이 그렇게도 향수스럽게 생각하는 듯한 군사정권의 말기 시절에는, 한국의 정치투쟁을 거의 학생들이 주도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파업해도 서울도심 데모를 그렇게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데모"라면 학생데모라는 공식 같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어집니다. 인제는 학생들이 시위 대열 속에서 쉽게 발견되어지지 않고 데모한다 해도 급진적 조합원들이 대개 앞장서는 듯한 감이고, 또 정치투쟁에 영감을 주는 것은 종교인들의 대통령 사퇴 촉구와 같은 급진적 발언들입니다. 한국 反권위주의 투쟁의 산 역사라고 할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부터 시작돼, 비교적 보수적인 조계종 승려들마저도 대통령에게 참회하라고 시국선언한 것입니다. "천주교 좌파"보다는 수위는 약간 온건하지만, 참가 인원을 보면 조계종 재적 승려들의 8분의 1 정도, 사실 극우만 제외하면 사회적으로 활동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스님들의 다수인 셈입니다. 개신교와 원불교의 진보파까지 가세해, 사상초유의 "진보적 종교인들의 對정부 반란"(?) 사태가 일어난 것이죠. 일이 이렇게 된 까닭을 한 번 이해해볼까 합니다. 종교인들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진보적이라 해도 대형 종단들의 보수적 속성 등 상황상의 여건이 있어 "대통령 사퇴 촉구" 정도의 급진 행동에 이렇게 쉽게 나설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진보적 종교인들이란 대체로 어떤 분들인가요? 일단, 일면으로는 정치적으로 "나서기"에 좋은 조건에 처하긴 합니다. 1980년대말의 학생들이 재학중에 아무리 데모를 해도 취직이 비교적 쉬웠듯이 종교인들은 대한민국에서는 지금도 비교적 하루하루 "밥벌이전쟁"에서 해방된 축에 속하는 몇 안되는 계층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예컨대 교회가 사실상 일종의 사기업이 된 개신교 경우에는 영세교회, 개척 교회, 몰락 직전의 소형 교회라면 "밥 걱정"이 없는 것도 전혀 아니지만, 그래도 소위 "일반인"에 비해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계층은 바로 성직자입니다. 옛날에 대학교수들도 그런 특징이 있었지만, 인제는 영어논문을 생산하는 기계로 화하여, "여유" 차원에서는 스님, 신부님, 목사님 및 교무님에겐 좀 뒤집니다. 또 1980년대말의 급진 학생들과 통하는 점 하나라면, 조계종 스님이나 신부님들은 가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탄압에 직면해도 누군가에 대한 책임지는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심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나마 약간 나은 편입니다. 
 
"나서기"는 일반인보다 다소 쉬워도, 신부님이나 스님들은 이렇게 다수로 대통령 하야를 부르짖으면서 나선다는 것은 좀 보기 드문 일입니다. 이명박 시절에도 정권이 온갖 망나니짓을 다 해댔지만, 진보적 종교인들은 그에 대해 아무리 시국선언해도 "사퇴"를 그렇게 쉽게 입에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에 자살로 내몰리자 불교, 천주교, 기독교계의 진보적 일각에서 시국선언들이 나왔지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58449) 그때는 천주교쪽 선언에서는 "사퇴"는 거론돼도 촉구되지 않았습니다. 보수적 개신교에 다소 광신적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권에 대해 불교계는 시종일관 불편해 하고 거리두려 했지만, 그런 불교계인데도 "사퇴"까지 촉구하지 않았던 것이죠. 아무리 진보적 종교인이라 해도 그가 속하는 종교계는 기 속성상 권력조직입니다. 국가권력과 늘 이런저런 공생협력해야 하는, 그런 "국가 내" 권력조직인 셈이죠. 그러기에 아무리 진보적이라 해도 제도적 종교에 몸 담은 이상 국가권력의 맨 꼭대기에 선 대통령에게는 하야하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말이 나왔다면 그만큼 진보적 종교인이 보는 이 시국은 아주아주 비상시국이고, 그만큼 "예외적 상황"이 조성됐다는 것입니다. 
 
종교인과 일반인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요? 아마도 시간에 대한 감각입니다. 정치인이 가장 강하게 인식하는 시간 단위는 몇 년 정도, 즉 "다음 선거"까지입니다. 직장인이 "계획"할 수 있는 시간단위는 길어야 15년이나 20년, 즉 아이 육아와 주택구입, 모기지론 상환, 그리고 퇴직, 이 정도겠지요? 정치인이 속하는 정당은 10년에 한번씩이나 두 번씩 이름 바꾸고, 또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직장인은 회사에 오래 다녀도 "내"가 퇴직한 뒤에는 그 회사가 거꾸러지든 폭발되든 애사심 따위는 이미 그 사전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단기적 이윤 중심으로 돌고 모든 것이 단기적이고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는 그렇다는 거죠. 그러나 종교계는 아주 다릅니다. 기독교나 불교는 신자유주의는 물론 자본주의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오래된 거고, 그 종단에 속하는 이들의 사고 단위는 백년이나 천년입니다. 기독교인이면 오늘도 로마시대의 순교자들을 마치 동시대인처럼 인식할 수 있으며, 불교인이면 오늘도 불교계가 아쇼카왕과 유착했다는 데에 대해 마음아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인의 좋은 특징이라면, 무엇이든 아주 아주 긴 안목으로 볼 수가 있다는 거죠. 우리 대부분에게 그저 물이나 공기처럼 느껴지는 자본주의까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종교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오래됐고, 종교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는 자연스럽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고 전혀 영구적이지도 않다는 거죠. 그저 종교와 함께 해온 세계사의 한 "순간"에 불과하고 언젠가 벗어나야 할 한 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긴 시각"으로 본다면 박근혜가 하는 짓거리는 "단순한 사기型"인 전 정권보다 훨씬 위험천만합니다. 사기야 한국 자본주의의 출발점이자 본바탕이며, 늘 우리 시장바닥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기에, 이미 사기를 무수히 당해온 국민이 한 번 더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역사가 아주 크게 오도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경우에는, 이미 어느 정도 관료적인 제도적 합리성이나 다양성 등 후기 자본주의 "노르마" (규준)에 익숙해진 사회를 1970년대적인, 군사주의적인 방식으로 대하려고 하는 차원에서는 엄청난 무리수를 두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 (재벌)의 입장에서는 문재인이 되든 박근혜가 되든 하등의 차이점도 없었을 터인데도 꼭 "국민과의 디지털 심리전"까지 벌이고, 또 인제 그 수사를 방해하고 그 주범 기관인 국정원을 비호하고, 또 눈가림용으로 무슨 "종북조직"을 또 어디에서 급조하여 "관제 간첩"의 악몽을 되살리고... 이런 짓거리들을 2010년대 중반에 벌이는 것은 무리 중의 무리이며, 사실 일면으로는 체제안정에 위험하기도 합니다. 밑으로부터의 커다란 반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죠. 결국 고작해봐야 이런 짓거리 정도만 할 줄 아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후대 평가가 대단히 나쁠 것을, 즉 이명박 정권에 대한 혹평 이상의 혹평이 나올 것을, 백년이나 천년 단위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이미 눈치 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행동들은, 일면으로 미래를 겨냥합니다. "미쳐가는 박근혜 정권을 상대로 누구보다 먼저 하야 촉구 투쟁을 벌였다". 이런 평가는, 약 20-30년 후에 나올 한국사 교과서에서의 "2010년대의 불교/천주교..."항목에 나와야 해당 종단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 되죠. 
 
박근혜나 그 주변 인물들에게 일반 상식 정도 있었다면 그들이 종교계의 "반란"을 보고 정신차렸어야 했습니다. 종교인들이 보통 어느 정도의 역사 감각의 소유자인지  좀 이해했다면 말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한국 극우들에겐 그런 이해마저도 없습니다. 자업자득이죠. 지금 극우들이 하는 짓거리의 수준으로 봐서는, 어쩌면 노무현과 같은 팔방미인형 신자유주의적 리버릴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정치 관리자 역할을 궁극적으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시대감각이나 정치적 능력 수준은, 노무현과 같은, "개혁"을 빙자한 다소 리버럴한 신자유주의적 정객들에겐 훨 높았던 듯합니다.....

(옮긴이 주) 그런데 우리는? ?
백년 천년 앞은 고사하고 10, 20년 앞을 내다볼 안목이 없는 것인지? 
침묵으로 그들에 동조하는 우리 교단의 자칭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에게 묻고 싶다. 

아시는가, 침묵은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의 표현인 것을.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과연 떳떳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무엇을 넘겨주고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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