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누가 누구를 말하는가

by fallbaram posted Jan 03, 2014 Likes 0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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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정주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나타나는
빛과 어두움의 대조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대조는
창세기의 밤과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생활반경의 중심에 두었던
선악과 생명과의 대조처럼
아직은 단계에서 서로간 대조이면서 동시에 리듬이기도 하다.

이것을 우리 한국 재림교단의 최고의 석학중 한 분이시고 지금도

많은이들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존경해 마지않는 한 분이 기독교의

변증으로 이끌어가면서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하는 투쟁 중심의

목적이 담긴 번역 또는 제목으로 둔갑시켰다.


변증의 중심에는 토요일 안식과 일요일 안식이 맞서고 있고
율법과 은혜라는 주제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들어있다.
다시말하면 토요일은 빛의 날이고 일요일은 어둠의 날이며
말씀대로 (구약과 신약에 쓰여진) 살아가는 것은 빛의 자식이고
값싼 은혜로 살려하는 비 안식교의 교리는 모두가 어둠이라는 것으로
끌고 갔다.

그 변증의 주인공이 십여년을 식음과 수면을 줄여가면서 연구하셨던 이야기.
피골이 상접하도록 온갖 서적을 다 뒤져가면서 집대성한 그 책에 얽혀있는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집념의 behind story 를 직접 들었기에 나는

그 책을 품에 안듯이 끌어안고 탐독했고 읽은 후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후에 그 제목을 끌어냈던 요한복음을 읽으며 생각을 완전히 달리하게 되었다.
이 생각을 그분에 대한 도전이라고 절대 생각지 말기를 바란다.
또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라는 신사적인 마음 한쪽이면 족하다.


창세기의 밤은 하루를 가리키는 하나의 시간적 리듬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두움은 빛과함께 영원의 한 단면을 가리키는 이땅의 영적 리듬이었다.
어두움을 탓하려하는 저자 (요한)의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다만 빛이 왔으되 그 빛을 알아보거나 알지 못하는것에대한 준엄한 채찍이다.


너거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왕 (메시야)이 욌는데

율법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그 완성이 왔는데

충만에 이르지 못하고 생명에 이르지도 못하고

영적 빛에 이르지 못하는 너거들에게

그 빛이

생명이

충만이 왔는데...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 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라고
어둠이 내리는 저녁시간 부터 어둠이 가장 짙어진 한밤중까지 주로 울어대던
그 뒷마당 숲속 소쩍새의 울음을 국화꽃을 피우는 길고 긴 어둠의 한 작업으로 보았던
서 정주의 시각처럼
사도 요한은 생명과 구원의 빛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오시기 까지 구약의 선지자와
율법의 대표인물로 지적한 침레요한의 외침 (율법의 역활)을 서 정주의
소쩍새 같은 역활로 보고 있는것이다.

서 정주는 국화꽃 앞에서 그 국화꽃의 아름다움과 황홀함 속에 베어있는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과 번개 비 그리고 바람들을 기억해 내고 있듯이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 빛 한줄기가 비칠때까지 있었던
구약의 온갖 울음과 천둥과 비 그리고 바람의 역사들을 기억해내고
다시 그것을 영적이고 구속적인 단계로 재구성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

리고 국화꽃 앞에서 서 정주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누이의 얼굴을 기억해 내듯이

요한도 그 십자가 사건 앞에서 그토록 그리워 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기억해 낸다.

누이를 닮은 그 국화 옆에서 잠도 오지않는 밤을 지샌것이 그 누이 때문이었구

라고 생각하는 서 정주 처럼 우리도 그 십자가의 옆에서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잠도 오지않는 밤을 지새는 일이 있었는가.


주님 십자가 고난 당할때

너는 그의 곁 (옆)에 간일 있는가?

오오오오

그 생각 떠오를때

이몸 떨려 떨려......


어둠과 빛은 하루의 리듬이지만 어둠이 빛을 가리키지 못함이 더 큰 어둠이다.
율법 (심판)과 은혜 (용서)는 신앙의 리듬이지만 율법이 은헤를 깨닫지 못함이
어둠이고 공허이고 또 혼돈이다.

요한은 이 주제를 놓고 앞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만이 구원의 계시이며
그 분의 삶과 죽음만이 구원을 베푸는 유일한 몸짓이라는 논쟁을 끝낼때 까지
여덟장에 걸쳐서

모세와 예수

율법과 은혜

옛것과 새것

땅에서 온것과 하늘에서 내려온것

선악과와 생명과

의 대조를 반복한다.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특별히 요한복음은 계시록과는 달리 이웃 (우리가 적그리스도라고 쉽게 생각하는)과의

전쟁을 위한 계시가 아니다. 역사속에 있는 옛뱀을 잡기 위한 어린양의 투쟁의 메쎄지가 요한

계시록이라면 요한복음은 내속에 있는 옛뱀을 향한 어린양의 투쟁의 메쎄지다.

특별히 재림교인들에게 자신의 속 투쟁을 바라보고 그 속투쟁이 더 중요하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만 뱀을 가리키는 손가락질에만 시간을 보내게 하는 사단의 유혹일까?

라는 노파심이 드는것은 또 괜한 초로의 노망일까?


한가지만 잊지말고 성경을 읽어가자.

어둠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뱀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사단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율법도 하나님이 만드셧고

나일스라는 죽음의 바이러스를 보유한 모기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죽음과 심판 또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 손바닥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고 하자


그 하나님의 계획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엉뚱한 뱀들을 잡으려고 애쓰는

땅꾼들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이 계획이 상세하게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그리고 성장하고 팽창하는 절묘한 성경을 졸졸 읽으면서

하나님의 속보이는(?) 청사진

즉 땅에서 당신을 닮은 허다한 백성을 맹글어 내고

허다한 반역의 무리들 (최고의 재질로 맹글은)이 구측한

악을 지구뿐이 아닌 우주에서 영원히 제거한 후에

그 비어있는 자리에 십자가로 다시빚은 흙들로 채우고

그 흙에 심은 영으로 우주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실로 광대한 우주적 청사진에

배시시 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다.

그것 위해서 흘리신 신의 아들의 피를 생각할 때는

눈물도 나고...


에이고

불쌍한 양들끼리 서로 코피 터주지 말고

말씀에 의거하여

어린양을 졸졸 따라만 다니면 될일을....

                                   
아래의 글은 내가 평소에 그의 강연을 듣기를 좋아하는 장로교회  목사의 글을
퍼서 온것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5

구절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둠이 역사 속에서 강한 힘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에 의해 힘의 허무함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어둠은 번도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 우리가 어둠,
허무의 앞에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것이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오늘 우리가 우리를 비추시는 그리스도의 빛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재 어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의 안에 있다고 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재 어둠인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 오심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진정 그리스도의 앞에 나아가 회개함으로
추하고 더러운 우리의 어둠이 씻어지고.
빛의 자녀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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