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로마서나 편지서에서 보듯이)
그가 비록 유대인이라는 혈통을 언제나 내세우고
또 그가 다메섹에서 빛으로 만난 예수를 보았다는것을
근거로 사도의 직분을 언제나 내세우지만
그가 쓰는 표현의 문체나 사상의 패턴은 거의 백퍼센트
로마의 것이거나 희랍식 (Hellenistic)표현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의 표현은 직접화법이거나 철학적 표현을 지향한다.
그래서 요한복음과 로마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똑같은 내용의
글들이지만 대부뷴의 신학자들은 같은 배경과 사고의 틀을 물려받은
우리의 정서에 부합하는 로마서를 더 좋아하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루터도 로마서를 통해서 종교개혁의 불을 당겼고
나도 한때는 로마서에 관한 주석책을 서너 박스가 될만한 분량을
별로 읽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있었다.
그 로마서를 연구하고 읽는 도중에 로마서는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니라는
결론이 빨리 들었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단 한가지다. 우리의 육정과
생각과 의지와는 정 반대로 되어있는 복음의 원리 그자체가 어렵게 이해되는 부분일
뿐이다. 우리가 할것이 하나도 없고 십자가만이 할 수 있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나도 모르는 새로운것이 자라나면서 또 다시 십자가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나누는 자들이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된 상태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전부인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면에서 순종(토종) 유대인의 사고방식과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표적을 사용해서 그 의미를 알리고 숫자를 사용해서 뜻을 알리는 방식이다.
히브리 언어가 모음을 사용하지 않는 뜻글자이듯이 글자 하나하나 숫자 하나하나
그리고 사건 하나하나가 기별이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읽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요한복음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다행이도 요한복음의 핵심인 3 장16절 만큼은 직설적 표현을 사용했다. "이처럼"
이라는 단어만 제외하고는...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싸우는 상대는 자칭 모세의 제자라고 우기는 바리새인들이다.
소위 예수가 말하는 "독사의 새끼" 들이다. 율법의 저주에 메인 자들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어린양이 싸우는 상대는 옛뱀이라고도 하고 용이라고도 하는 마귀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모세에게 그의 책 오경을 염두에 두고 다섯 (5)이라는 숫자를 부여한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요한은 옛뱀이라고 하는 용에게 여섯 (6)이라는 숫자를 부여한다.
그러나 예수와 어린양은 완전수인 일곱 (7)을 부여한다.
요한복음을 강해하는 많은 분들이 다섯이라는 숫자를 건너뛰고 일곱이라는 숫자로
성급하게 넘어가는것을 볼 수 있다. 예수가 행한 일곱번의 이적에다가 포커스를
맞추다 보면 그 일곱속애서 예수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빠뜨리게 된다.
다섯 다음에 오는 일곱.
다섯을 꾸짖는 일곱.
다섯은 결코 일곱이 될 수 없다는 의미.
다섯이 아니고는 결코 일곱도 이룰수없다는 의미가 요한복음의 핵심이다.
4장에서 남편이 다섯이었던 여자와 일곱의 남자가 만난다.
5장에서 행각 다섯아래에 누워 38년이란 장구한 세월에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병자를 찾아온 일곱(완전)의 사람. 그날은 일곱이라는 안식일이니...
가나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던 그 숫자의 날이다.
6장에서는 모세의 빵 (광야의 만나) 다섯을 떼어 오천으로 늘어나고도 다시
광주리에도 담을 수 있었던 일곱의 떡 (하늘로서 온)을 이야기 한다.
독사의 새끼들에게 부여한 숫자는 다섯 다섯 다섯 (555) 이다.
계시록에서 그 아비는 그래도 한단계 높은 666 이다.
불완전한 다섯을 채우시고 불완전의 완전인 마귀의 악을 영원히 멸망케할 분의 숫자는 777 이다.
그대와 나는 666 은 결코 될 수 없다.
555 이거나 777 둘중에 하나다.
이 아침에 깊이 생각해야할 선택의 갈림길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믿음이 어찌해서 안식일 게명인가?
우리는 성경위에 있고 하나님의 뜻 위에서 사는 888 인가?
또다른 어두움이 우리에게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