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9일 / 송년주일
안녕들 하셨습니까?
마태 25:21
곽건용 목사
한 신학자의 악몽(惡夢)
한 유명한 신학자가 죽어서 천국 문 앞에 갔습니다. 그는 곧 천국에 입성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의외로 입성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그는 문지기에게 “어서 날 들어가게 해주시오. 나는 평생 하나님을 연구하며 산 사람이요.”라고 말했지만 문지기는 들은 척도 않고 기다리라고만 하더니 도서관 사서 한 사람을 데려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자는 ‘지구’라는 별에서 온 ‘사람’이라는 종이라는데 지구와 사람이 창조주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둥 자기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둥 이상한 얘기를 하는군. 자네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 바라네.” 그러자 사서는 그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한참 후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난 ‘지구’라는 별이 속한 성운을 찾으려고 수천 명의 사서들을 동원해서 가까스로 찾았고 그 중에서 ‘태양’이란 행성과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라는 별을 찾느라 또 수천 명 사서를 동원해야 했네. 드넓은 우주에서 특정 은하계를 찾는 것도 어려운데 그 은하계 중에 별 하나를 찾는 일이 얼마나 더 힘들었겠나. 한 은하계에는 3천억 개의 별이 있다네. 그 중에서 태양이란 행성을 무슨 수로 찾겠나 말이요. 언제까지 찾는다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원한다면 사서들을 시켜서 찾아보겠네.”
그 후 몇 년이 흘렀습니다. 신학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몇 년의 세월을 허송했습니다. 드디어 사서가 신학자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결국 찾아냈네. 그런데 왜 그 별이 관심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네. 그 별은 은하계에 있는 무수한 별들 중 하나일 뿐인데. 크기나 온도도 평범하고 작은 별들이 그 주위를 돌고 있더군요. 지구는 그 별들 중 하나인데 거기에는 수많은 종류의 생물이 살고 있더군. 조사에 의하면 인간이란 종은 지구라는 별에 사는 생물들 중 하나더군.” 이 말을 듣고 신학자는 화를 내며 외쳤습니다. “왜 창조주는 천국이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단 말인가! 난 일생동안 그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고 그분이 내 노력을 알아주셔서 천국에서 큰 상으로 보상해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내 존재조차 모르는 것 같군요. 나는 무수히 많은 별들 중 하나에 살았던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에 불과했군요. 그렇다면 나는 창조주를 경배한 걸 후회할 수밖에 없군요.” 그러자 문지기는 “그렇소? 그럼 그렇게 하든가…….” 이 대목에서 신학자는 잠에서 깼는데 온 몸이 진땀에 젖어 있더랍니다.
우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크고 거기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fact)입니다. 믿고 싶든지 믿고 싶지 않든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 지구에 75억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75억이란 숫자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도 다 셀 수 없는 숫자랍니다. 더욱이 사람 외의 생물체 숫자를 다 합하면 얼마나 될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별들이 수없이 많고 그 중에는 분명 생물이 사는 별도 많겠지요. 앞의 얘기는 저명한 무신론자 버틀란드 러셀이 만들어낸 얘긴데 하나님이 이렇게 광대한 우주의 창조주라면 그 창조주가 ‘나’라는 한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믿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제 정신이 아닌 정신병자일 겁니다. 그래서 그는 만일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신이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을 리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보잘것없이 미미한’ 존재인 한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놓고 계신다.”고 말씀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러셀의 말대로라면 ‘정신병자’라고 해야겠지요. 정말 그렇습니까? 드넓은 우주의 창조주께서 나라고 하는 한 사람에게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믿는다면 정말 과대망상증 환자나 정신병자일까요?
한 신앙인의 길몽(吉夢)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러셀처럼 얘기를 하나 만들어봤습니다. 한 유치원생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선생님의 주목을 받으려고 늘 앞자리에 앉아서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다가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저요, 저요!”하며 손을 쳐들곤 했습니다. 자기를 지목해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늘 다른 아이를 지목하곤 했습니다. 아무리 목청껏 “저요, 저요!”를 외쳐 봐도 늘 그랬습니다. 그는 그런 선생님이 야속했습니다. 혹시 선생님이 자기를 미워해서 일부러 자기만 안 시키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요, 저요!”를 그만 둘까도 생각했습니다. 이쯤에서 그만 두는 사람도 있지요.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까 하나님 부르기를 그만두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없거나 있더라도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신다고 결론짓고 신앙을 버리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다가 아이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자기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랍니다. 거기엔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이 앉아있음을 알게 된 겁니다. 그 아이들도 선생님의 주목을 받으려고 열심히 손을 들고 “저요, 저요!”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우주에 3천억 개나 되는 많은 별들이 모여 있는 성운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걸 알게 된 사람처럼 아이는 자기 같은 수많은 아이들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는 갈등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많으니 선생님이 단 한 번이라도 자기를 주목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걸 어린 아이도 느낀 것이죠. 그렇다면 “저요, 저요!”를 외치는 걸 그만두는 게 합리적입니다. 자기가 선생님의 주목을 받을 확률은 거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걸 알면서도 계속 손을 들기로 했습니다. 그는 선생님을 ‘신뢰’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 번도 자길 지목해주지 않아도 그게 선생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길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며 다른 아이 부모에게 ’촌지‘를 받아서도 아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시느라 너무 분주하시기 때문이란 걸 알기 때문이지요. 자기보다 선생님이 더 필요한 아이들이 있고 그래서 선생님은 우선 그 아이들을 돌보신다는 걸 이해하게 됐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 그래서 더욱 그는 열심히 “저요, 저요!”를 외치고 손을 들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이 자기를 지목하지 않아도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선생님이 모든 아이들을 다 지목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건 확실히 믿기에 마냥 신뢰하게 된 겁니다. 저는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놓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런 신앙을 표현하신 걸로 믿습니다.
안녕들 하셨습니까?
2013년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여러분의 2013년은 어땠습니까? 1997년에 방송됐던 ‘파랑새는 있다’라는 드라마가 기억납니다. 이른바 달동네 드라마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김운경 작가가 쓴 드라마입니다. 달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차력사, 창녀, 사기꾼 무술인, 술집 바지 사장, 술집 종업원 등등 밑바닥 사람들이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는 얘기로서 참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입니다. 이들 주인공들이 웃고 울며 속이고 속고 싸우고 화해하며 찾아가는 보통사람의 행복을 작가는 ‘파랑새’라고 불렀습니다. 작가는 파랑새는 분명히 있다고 믿고 드라마를 썼다고 하는데 저도 역시 그렇게 믿습니다. 파랑새는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이 뭔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고 행복을 추구합니다. 신앙인에게 행복은 무엇일까요? 신앙인은 어떤 행복을 추구할까요? 신앙인에게 파랑새는 무엇일까요? 저는 신앙인에게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안에서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에서 자기 삶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자기가 갖고 있는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한국에서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이 전국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라는 말은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인사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한 대학생이 손으로 써서 자기 학교에 붙인 대자보 때문입니다. 이 대자보 때문에 전국이 온통 술렁이고 있는 겁니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토익 점수 올리고 스펙을 쌓아서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취직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한 학생이 동료 학생들에게 물은 겁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지난 수십 년 동안 공들여 쌓아온 소중한 사회적 가치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은 겁니다. 최근엔 “안녕들 하십니까?”와 관련된 힙합 곡도 만들어졌고 주부들은 이를 차량용 스티커로 만들어 나누어주고 스마트폰용 어플까지 만들어지는 등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 현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학생의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인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진심을 담아 여러분에게 인사 겸 묻고 싶습니다. “2013년, 여러분 모두 안녕들 하셨습니까?”
신뢰하고 용서하십시오
매년 그렇지만 우리 모두에게 2013년 연말의 화두는 ‘신뢰와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에서 제가 만들어낸 얘기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말씀했습니다. 얘기에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여러분도 올 한 해 하나님에게 지목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하나님을 신뢰하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신뢰하시라고 말씀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신뢰하십시오. 여러분은 75억 인구 중 하나이지만 그저 그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을 받고 있는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남의 가치도 안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이 남도 소중히 여기고 신뢰하는 법입니다.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신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도 소중히 여기고 신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용서하십시오. 남을 용서할 뿐 아니라 여러분 자신도 용서하십시오. 올 한 해 정말 잘 사셨습니다. 비록 이루지 못한 일이 있더라도,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이젠 다 잊고 용서할 때입니다. 한 해를 살면서 어찌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남과 좋은 관계만 유지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은 적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 털어버리고 용서하십시오. 남을 용서하기 어려우면 여러분이 그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그였다면, 그 사람의 처지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용서하기 어려웠던 사람도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우린 때로는 남의 모자도 써봐야 하고 남의 신발도 신어봐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기 어렵다고 느끼시면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보십시오.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2013년 한 해를 최선을 다해 사신 여러분,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지 못 한다고 애태우지도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사랑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아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한 거기까지가 우리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세상의 모든 꽃과 잎은 더 아름답게 피지 못 한다고 안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이름으로 피어난 거기까지 꽃과 잎의 한계이고 그것이 최상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한 해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사신 여러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고하는 것으로 송년주일 메시지를 마감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 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갈라디아 6:9). ♣
색상 배경은 옮긴이의 것.
조오타! 증말 조오타
아무렴
우리가 티끌이지
우주를 누비고 다닐
그 신학자가 낡고 거칠은 십자가 하나 가슴에서
빨리 끄집어 냈더라면 당장에 통했을 낀데...
호옥시 그 신학자가
접장님?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