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옷(7) - 목불인견

by 열두지파 posted Jan 07, 2014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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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절절했지만 거기에 매몰될 수 없었다. 우리는 떠나야했다. 나무토막 같은 어머니를 땅에 묻었다. 아버지는 검은 돌에 비문을 새겼다. “세상에 단 하나의 여자, 라헬

 

검은 묘비와 함께 세워진 어머니의 묘는 그 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베들레헴 외곽의 랜드마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어머니를 찬 땅에 묻고 우리 진영은 대오를 출발시켰다. 내 나이 16, 어머니가 없는 나의 마음 축은 크게 균형을 잃었다. 어머니가 머물렀던 내 마음의 빈 공간은 그대로 댕그라니 비었다. 독립독행은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지표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격한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가 더 없이 측은해 보였다.

 

핏덩이 베냐민은 바지런한 하란태생 유모가 전담하였다. 아우 베냐민의 이름은 우리 형제 중 아버지가 유일하게 작명한 이름이다. 난산 끝에 어머니는 죽었지만 베냐민의 체형과 골격은 미숙하지 않았다. 울음소리는 우렁찼고 거동은 민첩하고 그 반경은 넓었다. 유모는 아침저녁으로 양의 젖을 짜 베냐민의 수유를 얻었다.

 

우리 대오는 에델망대를 지나며 다시 숙영에 들어갔다. 언제나 목부들은 조직적이었고 그들의 손은 빨랐다. 노련한 그들의 손이 있어 우리의 잠자리는 늘 신속하고 안락하였다. 취침을 위한 장막은 일사분란하게 가설이 되었다.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의 침소에는 양탄자를 푹신하게 깔아주었다. 긴 노정에 지친 짐승들과 우리 모두는 빨려들듯 숙면에 들어갔다.

 

단잠을 깨는 소란함은 이른 새벽에 시작되었다. 빌하엄마의 흐느낌, 단형과 납달리형의 거친 고성은 새벽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한쪽에는 레아엄마가 서있고 그 바로 뒤편에는 맏형 르우벤이 장승처럼 서있었다. 단형과 납달리형은 맏형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평소에 차분하고 맏형에게 늘 고분고분하던 두 형이었다.

 

레아엄마는 앙칼지게 빌하엄마를 다그치고 있었고 실바엄마도 옆에서 큰엄마의 역성을 들고 있었다. 고성은 점점 높아지고 가솔 모두가 잠에서 깨어났다. 분위기는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새벽의 진풍경에 집사와 목부들, 남녀종들이 모여들자 어머니들은 당황스러움이 역력하여졌다. 갓난 아우 베냐민을 제외한 모든 권속이 상황을 알아가고 있었다.

 

단과 납달리형은 많이 격양되어 맏형을 해코지할 기세였다. 항변과 고성이 날카롭게 이어졌다. 동물들의 울음소리도 요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함을 더해가자 시므온형과 레위형이 나섰다. 세겜에서 칼질을 했던 두 형이었다. 두 형은 단호한 태도로 사태를 수습해 나갔다. 우리 형제를 제외한 모든 식솔을 해산시켰다.

 

두 형은 어머니들과 우리 형제들을 아버지의 천막으로 이끌었다. 아버지는 이미 깨어 계셨다. 밖의 소란함에 모든 상황을 진즉 알고 계시었다. 판관의 자리에 선 두 형은 맏형과 빌하엄마를 향해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면전에서 고개 숙인 장형은 이미 장형이 아니었다.

 

상황은 단순하고 간결하였다. 모두가 곤히 잠든, 깊은 야밤에 르우벤형이 빌하엄마를 불러낸 것이었다. 두 사람은 주변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목부들에게 들킨 것이다. 바스락 소리에 긴장한 야경 목부들은 짐승을 도략하는 외부인의 침입으로 간주하였다. 목부들이 고함을 치며 생포하려 자 놀란 둘은 엉겹결에 줄행랑을 놓기 시작하였다.

 

목부들은 도망자들을 쫓기 시작하였다. 일부는 쫓고 일부는 잠자는 권속들을 깨워 증원을 요청하였다. 새로운 추적자들은 사냥견들을 몰고 왔다. 힘을 합해 멧돼지와 사자를 이긴 개들이었다. 개들은 이내 냄새를 맡았다. 컹컹컹 신명이 난 개들은 달리며 짖어대었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개들은 더 이상 짖지 않았다. 익숙한 냄새에 사냥개들은 짖는 대신 꼬리를 흔들었다.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괴인들의 신원이 밝혀지자 목부들은 많이 당황하였다. 맏형은 허둥지둥 쫓기느라 민소매에 맨발차림이었다. 빌하엄마의 차림새 역시 목불인견이었다. 후발 추적을 하던 납달리형은 절친한 목부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전해 듣고 이내 뒤따르던 단형에게 직고하였다.

 

아버지 앞에서 맏형은 다 죽은 사람처럼 되어 있었고 단형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레아 큰 엄마는 저 년이 꼬리를계속 되뇌고 있었고 빌하엄마는 봉두난발로 그 수치를 견디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용을 다 들은 후에도 끝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도 형들도, 그 누구도 "이번이 처음이냐?" 고 묻지 않았다.

 

아버지의 침묵은 호통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모습은 그날 부쩍 늙어 보이셨다내게도 세상의 페이지 뒤가 조금씩 비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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