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교회 그리고 내가 속해있는 교회에 순교의 심정으로 쓰는 글

by fallbaram posted Jan 22, 2014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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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를것이냐 아니면 고일것이냐.


역시 사랑하지 않음이 이단이라는 골자의 일갈을 통해서 나를 깨우친 그 사람이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미주 지도자 연수회에서

깨우쳐준 또 다른 이야기 하나를 이 아침에 하려고 한다.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바벨탑을 주제로 한 강의였다. 이를테면

창조후 아담에게 준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와 "땅을 정복하라" 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과 땅을 정복하는 일을 하기 위해선

점점 영역이 넓혀져야 하고 삶의 터전이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아담 이후의 선조들은 항상 나아가는 유목의 생활을 살았다.

그 흐름이 꾾기고 멈춤의 상태에서 쌓아가는 새로운 삶의 양상이 바벨탑이다.


우리는 이 바벨의 뜻을 교만이나 혼잡이라는 주제로만 끌고가지만 바벨은 나아가지 않고 멈추는 것이고 흐르지 않고 고이는것이다.

오히려 혼잡게 한 쪽은 하나님이셨다. 언어를 혼잡게 하시고 흩어지게 하셨다. 창조 이전의 상태는 흐르지 않는 상태 (무생물)의 고임이였고 창조후의 상태는 지구상의 어느부분 에덴동산)이 터져서 흐르는 생명의 약동이 시작된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일 (성적 결합의 형태를 통한)을 위해서 속에는 성적욕구를 집어넣어 놓았고 그 욕구 때문에 에덴의 울타리가 터져서 흘러 넘치다가 오늘에 이른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유다의 아들이 씨 (정액)를 땅에 쏟아버리는 행위를 보고 분노하신 하나님의 엉뚱함을 이해하게 되는것이다.

구약에서 흔히 태를 닫아버리는 형벌을 자주 거론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흐름은 생명이고 고임 (불임)은 죽음인 까닭이다.


아브라함을 멈춤과 고임의 원래의 동네 (고향)에서 불러내어 기약도 없이 나아가는 흐름의 동네로 유리 방황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 (구약의 code)은 거기에만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가나안이라고 부르는 영원한 나라의 표상으로 들어갈때에 하나님의 흐름

이라는 구원의 code 를 건너는 결정적 도장 (인)을 받는다. 요단강은 흐른다는 요르드의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율법에서 은혜로 넘어갈 (전환)때에 있어야할 대 전환점이다. 야곱이 자신의 특심한 노력으로 모았던 두떼의 재산을 끌고 꿈에 그리던 가나안으로 들어갈때에 밤새껏 하나님과 씨름한곳이 요단강의 상류인 얍복강이었다. 거기서 가나안 이전의 이름인 야곱 (움켜 잡는자-넘어뜨리는자)을 벗어내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입었다.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역활이 바뀌는 장소가 요단강이고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역할이 바뀌는 장소도 요단강이다. 그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 침레요한이 자신의 역할을 인계하는 장소도 요단강이었다. 거기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것처럼 예수님의 사생활 (요셉의 아들-목수) 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고 공생애로 들어가셨다. 공생애란 우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기전에 그것은 나에게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남과 이웃을 위하여 흐르는 삶을 말함이다. 요셉(육신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렀던 그 머무름에서 나와 하나님의 집에서 흐르는 삶으로의 대 전환이었다.


흐르지 않고 고이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찌들어가는 성전 (옛 성소) 을 부수고 이제는 흐르는 참 성전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는 채찍을 들었다. 흐르지 않고 고이는것만 챙기고 추구하는 자들은 강도들이고 그들이 지키는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흐르기 위해서 주어졌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의 신앙속에서 그 율법은 흐르지 않고 멈추는 안식일 (결코 움직이지 않아야 할 시간)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전이 고여있는것에서 흐르는 성전으로 바뀔것이라는 예고가 에스겔에서 이미 있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 나오기 시작한 그 물 (피)의 흐름이 일천적 이천척 삼천척 길어지면서 사람이 건너지 못할 강이 되고 그 강은 사해 (고여서 소금물이 된) 로 흘러가서 그 사해를 소성시키게 될 터인데 그 흐름에서 역류하여 진펄과 개펄이 되는 자들은 썩을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에덴에 네 방향의 강만 있고 바다는 없는 이유였고 다시 고여있는 바다를 없애고 땅과 강만 남기는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의 그림을 보여주시는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그 안식일의 주인이 오셔서 하나님 (나의 아버지)이 지금 (이 날)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면서 38년간이나 다섯 율법의 행각 아래서 흐르지 않고 누워있는 그 병자 (실제론 이스라엘)를 일으켜 세우신다. 그리고 그 자리를 들고 흘러가라고 보내신다. 그는 잠시 동하는 물 에서 그것이 낫기를 원하면서 기다리는 백성이다.


율법을 다 지켰다고 단언하는 그 청년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그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람에게로의 흐름) 다시 나를 따라오라 (하나님에게로의 흐름) 고 하신다. 십계명이란 그렇게 흐르는 것이라고....


사랑 (아가페)은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에게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 땅에서 흐르는 것 (사랑)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흐름이 어머니가 자식에게 흘려보내는 헌신이듯이...


야곱의 우물은 마르는 우물이 아니다. 오랜세월이 흘러도 그 우물에서 한 여인이 물을 길고 있듯이 말이다. 예수 자신을 표상하는 그 우물에 영적 이스라엘의 야곱 (예수)이 영적 라헬 (사마리아의 여인-적법한 아내가 아닌-교회))에게 물을 길어서 한모금 달라 하시고 대신에 자신의 마르지 않는 우물을 소개하셨다. 언제나 흐르는 그 우물이 있다면 다시는 목마름이 없을 것이라는 생명수는 영원히 흐르는 생명의 강이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우리의 육신에 흐르는 물을 떠서 (퍼서) 예수 (가난한 자 또는 목마른자들)에게 주면 그는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적 우물의 물 (영생)을 주시겠다는 암시이다.


용서도 흐르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도 부정한 자들 (여자들의 피 또는 의심의 죄)를 씻는 방법으로 흐르는 물을 이야기 했다.

용서는 돌아서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멈추는 자 (사단)의 자식들은 생래적으로 돌아서서도 다시 멈추게 된다.

돌아서 놓고도 흐르지 않을 것이라는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으시는 분께서 용서의 강을 흐르게 하셨다.

십자가의 그 옆구리에서 터져 흐르는 그 피는 지금도 흐르고 있다. 우리의 죄악을 따라서 흐르고 있다.

그 피에 사도 바울은 날마다 씻기를 (멈춤의 자신을 죽이는) 원했다. 십사만 사천이란 실수가 되었던 아니 되었던 간에 날마다 이 어린양의 피에 씻는자들이다. 돌아서는 자들에게 흰 예복 (십자가)을 주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그 예복을 날마다 빨게 하셨다. 피흘림을 피흘림으로 씻어주시는 그 용서. 죄를 죄의 모양으로 씻어 주시는그 오묘한 용서 앞에서 사단은 무슨 할말이 있을까 그리고 우주의 거민들은 얼마나 감동스럽게 지켜볼 것인가.


침례란 그 막힌것을 죽이고 다시 흐르는것으로 태어남을 경험하는것이다.


죽음이란 흐름의 멈춤이고 흐르는 것의 고임이라는 것을 경제학자들은 절감하고 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원리를 우리모두가 이제는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소비지수가 올라가면 경제가 살아났다고 한다. 미국은 이 소비의 미덕으로 세계 강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아직도 그 흐름을 막지않고 열어 놓았다. 그러나 중국은 그 돈들이 고이는 나라다.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중국사람들의 주머니 처럼 중국은 닫힌 주머니를 지향하고 있다. 며칠전에 중국의 한 장군이 자신의 별장에 세트럭분의 뇌물로 받은 귀중품 3조원어치를 숨겨두었다가 발견되어서 그 돈들을 빼앗기고 심판대에 서는 일정앞에 그의 운명이 놓여있다.나는 그런 중국이 염려스럽다.


역대의 강국들은 고여있기를 거부하고 흐르기를 지향한 나라들이 었다. 

조선은 쇄국으로 한때 망할뻔한 나라였다.

게르만의 대 이동. 스물네시간 국기가 펄럭이던 대영제국등.


에덴 동산에서 흘렀던 그 흐름을 막기 위해서 사단은 어지간히 수고하고 있다.

율법에 들어와서 그것의 흐름을 막고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들어와서 흐름을 막는일을 전심으로 하고 살았다.

모세를 앞세우고 사흘길 광야로 흘러가서 흐름의 예배 그리고 흐름의 백성이 되려고 하였으나

사단의 심복 애급왕 바로는 그 흐름을 막았다. 열번이나 막았다. 그리고 다시 그 흐름의 백성들은 홍해 (붉은 피의 가로막음) 앞에 선다.

하나님이 막으셨다. 그것을 믿음으로 허물고 건너면서 그들은 진정한 히브리인 (건너가다는뜻)이 되었다. 그리고 흐름과 막힘의 사십년 역사후에 다시 막힘이 있었다. 흐름이라는 의미의 강 요단강이다. 흐름이 막힌 백성들이 건너야 할 강이다.

그 십자가의 상징을 건너며 그들은 또 다시 막는 세상의 권세 여리고를 쉽게 무너뜨리고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흐름의 주인이신 예수를 만난다.

그 흐름을 막는 권세가 철의 나라 로마이고 위정자 들이고 또 바리새인들 (율법)이다


흐름을 막는 선고가 죽음의 심판이다.

그러나 그 준엄한 심판속에서 다시 흐르는 것이 은혜다.

사랑이다

흐르는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리고 구원이다.


간음한 현장에서 여자를 잡아온 바리새인들이 그 여인의 둘레에 간음은 죽음이라는 울타리를 쳤다.

그 막힘을 뚫고 예수는 나도 너를 정죄하니 않노라고 하면서 그 울타리를 허물고 그 여자를 다시 흘러가게 하였다.

교회 (여자)는 이미 간음한 역사의 중심에 있다. 어디 순결한 여자가 있으며 교회가 있을것이냐가 율법의 준엄한 울타리다.


그러나 흐르는 물 (십자가)에 씻은자들은 순결하게 변했다. 그 간음을 동에서 서가 먼것같이 옮겨 놓았다는 하나님의 선고를 받았다.


이스라엘은 흐르지 아니하는 (다스리는) 왕을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흐르는 왕 (왕중 왕-섬기는 왕)을 보내 주셨다.

왕같은 제사장이란 흐르는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하늘에 가면 흐르지 아니하는 왕이 되는것이 아니고 흐르는 왕이 되는것이다.


지금의 이 흐름은 영원한 흐름의 삶을 연습하는것이다.

이땅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빛좋은 개살구 같은 성품 (그것도 하나님을 닮았다고 으시대는)가지고 하늘나라

가는것이 아니다.

목사도 섬김 (흐름)으로 흐르고 장노도 섬김으로 흐르고 집사도 섬김으로 흐르는 세상이 천국이다.

성경의 친구란 목슴을 내어주는 진짜 흐름의 관계이다.

선생과 제자의사이도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그 흐름의 사이이다.

하나님과 백성,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 흐름만이 확인하는 사이인 것이다.

율법도 그렇게 흘렀던 장소와 시간 (십자가)만이 영원한 복음이다.

어린양의 인침이다.


당신들의 친구사이는 흐르는 사이인가?

당신들의 부부 사이는 흐르는 사이인가?

당신들의 부모와 자식 관계는 흐르는 사이인가?

당신들의 교인관계는 흐르는 사이인가?


흐르기 위해서 예배를 드렀는가?

흐르기 위해서 새벽에 기도를 드렸는가?

흐르기 위해서 직분을 맡았는가?


분명 응답하실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흐르는 삶을 원하지 않고 

눈앞에 당한 고통에서만 살려달라고 소리지른자에겐

아무 응답이 없으셨던 그분이 흐르는 미래 (당신의 나라)를

달라고 할때에 고통중에서도  응답하셨다.

오늘 너와 내가 그 흐름의 나라로 함께 갈것이라고...

오늘 너와 내가 죽는이 십자가의 일도 그 낙원에 이른는 흐름의 일부라고 하는 말이다.


그날이 안식일 어쩌고 저쩌고 다시 영혼 불멸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우리의 신학은 그 막힘과 답답함이 끝이 없다.


내 앞에서 다시는 흐르지도 않는 율법 이야기 하지 않기를 빈다.

다시는 흐르지도 않는 막힘의 안식일을 함부로  이야기 하지도 말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막힘의 안식일에서 그 막혀있음을 뚫을 수 있는자는

오직 그날의 주인 예수 뿐이다.

그 예수와 함께라면 안식일에 요리를 하고 이웃을 불러서 나누어 먹는것이

막힌채로 앉아 있는것보다 훨씬 나은것이다.


오늘은 안식일이어서 갚을 수 없는 외상값.

오늘은 안식일이어서 도와줄 수 없는 이웃들.

그 막힘에서 풀려나와야 산다.


나는  이 땅에서 구할 수 없는

그 흐름의 철학

    흐름의 신학

    흐름의 삶

    흐름의 초청

    흐름의 교회 앞에서

내 막힌것의 모든것을 내어놓고 용서를 빌것이다.

날마다 용서를 빌것이다.


몸이 막히면 우리는 운동을 해서 그 막힘을 뚫어야 한다.

마음이 막히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으로 그 막힘을 뚫어야 한다.

사랑으로만 그 막힘이 뚫리는 것이다.


흐르지 않는 안식일은 바벨탑이다.

흐르지 않는 교회는 바벨론이다.

흐르지 않는 신학은 언제나 이단이다.


사랑의 종교

흐름의 종교

나는 나에게 가르쳐 주신 십자가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영원까지 흘러갈 교회는 십자가의 교회다.

나는 그래서 이 교회도 떠날 수 가 없다.


나는 지금도 내가 속한 곳에서

흐르는 삶 그리고 흐르는 열매를 맺고 사는가

성경에는 율법을 지켰나 안지켰나를 가지고 온른쪽 왼쪽으로 나누지 않는다.

흘렀느냐 아니 흘렀느냐를 가지고 염소가 되거나 양이 되는것이다.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흘러가는 무리가 십사만 사천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새하늘과 새 땅에는

막힘의 시간인 밤이 없고

막힘의 장소가 된 바다도 없고

오직 흐름의 강변에 흐르는 것으로 달리는 (달마다 새것으로 열리는)

생명의 나무들만 있을것이다.


어린양이 지성소로 들어가심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막혀 있음에서

막힘을 풀어내는 용서의 마지막 행동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는것이고

(왼편은 늘 막혀 있다는 상징으로 쓰셨고

오른쪽은 늘 흐른다는 구원의 표시로 쓰셨으니까.)



교회를 맡긴 베드로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여다오!"


"네가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플릴것이고

네가 이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을것이다."


풀기를 원하는 자들아

하늘나라감을 두렵게 생각하지 말아라


묶이면 어렵고 풀리면 쉬운것이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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