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by fallbaram posted Jan 23, 2014 Likes 0 Replies 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성경만큼 이원론으로 도배된 책이 없을것이다.
천지
빛과 어두움 (밤과 낮)
땅과 바다
남자와 여자
하나님과 사람
옛언약과 새언약
주인과 종
생명과와 선악과
율법과 은혜
노동과 쉼

창조에서는 (제 1단계)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이라는 세가지 요소에 쌓여있던
지구에서
첫째날과 셋째날까지는 이원 (두가지)으로 나누는
작업을 하셨다.

그리고 (제 2단계)
넷째날과 여섯째날 까지는
나누인것을 채우는 작업을 하셨다.

마지막날에는 (제 3단계)
그 모든 작업들이 마쳐지고 더이상의
작업이 필요하지 않는 상태 (안식)로 들어갔다.

더 이상의 작업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의 날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를 이루라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능력 밖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그 안식일을 범하는 죄악이었다.
안식일을 더럽힌 죄였다.
더 이상의 작업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가 그들의 범죄 때문에 무너졌다.

히브리서 기자는 4장에서
아담과 그 후손들은 범죄이후 그 이후 안식을 얻지 못했다고 하는
깊은 암시를 하고 있다.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적어도 한번쯤 (창조주일에 속한)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려본것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범죄 (깨어진 안식)로 인하여 각자에게 내려진 저주는 안식에 반대되는
노동과 고통과 쉼이 없는 땅의 역사로 주저 앉았다.

십계명은 아담의 범죄 하나로 깨어진 모든것들을 종목으로 나열한것이다 (itemization)
그것들을 지키라고
지키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고
그리고 돌로 칠것이라고
그토록 준엄하게 명령한
그것들은 죄인들은 사실상 지킬 수 없는것들이다.

그 깨어진 것들을
다시 값없이 복구해 주겠다는 창조주의 용서의 행위가 짐승의 옷을 입히는 것이었다.
깨어진 것을 스스로 복구할 수 없는 그 무능함을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이 바로 용서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대로
율법이란 너희들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것임을 알게하기 위하여 주신것이다.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유혹한 그 뱀의 말이 맞지 않다고 증명하기 위해 주신것이다.
옛뱀은 율법을 니가 스스로 지키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지킬 힘이 너희에게 없으니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용서는 이미 창세전에 계획되고 준비된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다섯행각 아래서 (모세의 율법) 38년이나 누워있었지만 나을 수 없었던 그 병자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때부터 소경인 자가 볼 수있는 길이 세상 역사에 없고 눈을 떴다고 단언하며 본다고 장담하는 너희들 (바리새인들)도
"본다고 (지킨다고) 하니 너희죄가 그저 있느니라"의 의미다.

위에서 언급한 이적 (가르침)이 일어난 날이 안식일이다.
율법으로 아무리 지키려해도 너희들의 안식일은 절룸발이의 날들이요
캄캄한 어둠의 날들이라는 말이다.
지키려 할수록 더 절룩거리고
지키려 할수록 더 캄캄해지는 날일 뿐이다.

특별히 위의 두가지 안식일 사건에서 에수님은 이런 증언을 하신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선한일로 여러가지 일들을 하셨으니 우리도 그런일을 하는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날을 지키는 일에 재 도전하는 무리가 있다.
더러는 예수의 은혜를 힘입어 지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예수의 은혜에 들어간 자는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는 히브리서의
저자의 증언처럼 아담이 깨뜨린 그 모든것이 복구가 된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또 다시 지켜야 하는지 정말 모를일이다.
안식의 주인을 따라 안식의 나라에 가서도 안식일을 지킬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용을 대적하여 일어선 한무리가 하나님의 계명 (특별히 안식일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킨다며
실상은 용의 편 (너는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유혹하는)에 서 있는듯한 묘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용서 받은 자는 십계명을 이미 지킨자이다.
용서받은 자는 그때 아담안에서 깨어진것들이 복구된 사람이다.

율법은 죄의 행동을 용서받으라고 하고
은혜는 죄의 상태를 용서받으라고 한다.

성경의 이원론 안에서 빛은 은혜 그리고 생명으로
우리가운데 오신 분이고
율법은 우리 가운데 있는 어둠이라고 선언한다.

우린 빛의 자식들인가
아니면 우린 어두움의 무리들인가

십사만 사천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무리로 용과 더불어 당당히 서는 그런 무리가 아니고
십사만 사천이란 우리는 할 수 없음을  어린양이 다 해주셨으니 부끄럽지만 또 감사에 사무쳐
그 뒤를 항상 졸졸 따라다니는 무리임에 틀림이 없다.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훨씬 쉬운데 왜들 이러는지?

참 신기한것은 용서의 과정이 창조에서 있었던 3 단계의 그것처럼
3 단계로 이루어 가는것이다.
창조는 구속의 청사진이다.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