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어린이에게 다같이 무상 급식을 주어야 되는 이유!

by 아기자기 posted Jan 08, 2011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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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에 카스다에도 한번 올렸던 글 입니다.)

 

 

며칠 전 한국의 한 뉴스를 들으면서 문득 어렸을 적의 한 친구 생각이 났다.

 

나는 60년대 초반에 군산에서 초등(국민)학교를 다녔다. 당시에는 한국 전쟁이 끝 난지 몇 년이 되지 않아서 전쟁고아들이 많이 있었고 특히 서울이 아닌 농촌이나 어촌 마을에서는 아직 경제 사정이 그리 좋은 편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학교도 부족하고 교사도 많이 부족해서 내가 다닌 군산 초등학교도 한 학년에 약 10반씩이 있었고 한 반에 거의 6~70명씩이나 되었던 소위 콩나물 교실이었는데 우리 반에도 항상 1~20명의 고아들이 있었다. 나머지도 극소수의 아이들을 빼고는 대부분이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그 중에 점심 도시락을 싸올 수 있는 아이는 대략 절반 정도에 불과 했던 것으로 기억 된다. 당시에는 교회에서도 구호 물품이 있어서 우유가루를 배급 받은 기억이 있는데 학교에서는 주로 옥수수 빵이나 죽을 점심을 못 가지고 오는 극빈자 학생들에게 주기도 했었다. 지금 먹으면 어떨지 몰라도 당시에는 고소하고 약간은 달콤한 이 옥수수 빵이 참 맛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 옥수수 빵이 나오는 날을 기다리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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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때 정도였던가 내 바로 옆에 앉은 짝이 고아였는데 당시 많은 고아들이 그랬듯이 제때에 학교를 못 다녀서 그도 우리 또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다. 덩치도 우리보다는 머리 하나 더 있고 또 험하게 자라서 그런지 그야말로 요새 아이들 말로 하면 학교 쌈짱이었다. 웬만한 상급반 아이들도 거의 이 친구한테는 꼼짝을 못했었다.

 

그 날도 마침 점심시간에 옥수수 빵 배급이 구수하고 먹음직한 냄새와 함께 한 쟁반 가득 나왔고 담임선생님의 호명에 따라 하나씩 나가서 급식 대상자들이 배급을 받는데 마침 내 짝인 이 친구 차례가 되자 선생님만큼이나 덩치가 큰 이 친구 성큼 성큼 앞으로 나가서 선생님이 건네주는 한 덩이 작은 옥수수 빵을 두 손에 받아 들고는 그날은 그답지 않게 완전 90도로 허리를 굽혀 배꼽인사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꽝 소리와 함께 그의 이마가 선생님 책상 모서리에 있는 옥수수 빵 쟁반에 부딪치면서 교실 바닥으로 쟁반과 같이 빵들이 우르르 쏟아져 버리고 말았고, 이 엉뚱하고 급작스런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그만 모두가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보통 아이들보다 덩치가 2배나 큰 이 고아 친구, 고아원의 모자라는 작은 급식으로는 항상 다른 아이 보다 더 배가 고팠을 것이 뻔한데, 비록 작지만 구수한 냄새의 그 옥수수 빵을 받아들고 얼마나 먹고 싶고 고맙게 생각 됐으면 학교에서 가장 거친 전교 짱이 90도 배꼽인사를 했겠는가! 내 기억으로는 그 날 크게 웃다 걸린 몇 몇 그 짱 친구에게 곡소리 나게 혼난 기억이 있다.

 

그런 수모를 당하고 얻은 성과물치고는 너무 작은 그 옥수수 빵 하나가 주는 행복은 당시의 수많은 부모 없고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밥 굶기를 밥 먹기보다 더 많이 하여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런 불우한 환경에서 맛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횡재이기도 하면서 작은 행복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짱 친구가 그 옥수수 빵 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내 점심 도시락이었다. 당시에 그래도 나는 부모 잘 만난 덕분에 도시락을 잘 싸가지고 다니는 편이었다. 흰 쌀밥에 계란 후라이 깔고 멸치복음에 콩자반이었으니까 그야말로 당시에는 최상급의 럭서리 도시락 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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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나는 가끔 내 똑같은 도시락보다는 그 구수한 냄새의 옥수수 빵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었고 그럴 때 마다 이 짱 친구의 그 옥수수 빵과 바꾸어 먹곤 했는데, 내 이 도시락의 힘은 커서 그 거칠고 안하무인 무법자 쌈짱도 내 앞에서는 완전 순둥이로 변했고 그 스스로가 나의 보디가드임을 온 학교에 알리고 다녔다. 그래서 한 때 나는 본의 아니게 학교 쌈짱을 보디가드로 거느리는 특권을 누리면서 국민학교를 다녔었다. 6학년 때 반이 갈리면서 그 친구는 다른 반이 되어서 도시락을 바꾸어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도 그 친구는 끝까지 나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날 저녁 뉴스에 한국의 한 도의회에서 전 학생 무료 급식을 실시하고자하는 예산 통과가 압도적으로 부결 되었다 한다. 이제는 전쟁이 끝 난지도 50여년이 지났고 우리 한국도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려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점심을 못 싸가지고 오고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어린이들이 있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리고 같은 교실에서 누구는 값비싼 최고급 음식을 먹고 누구는 눈치 보면서 급식쟁반 앞에 큰 절을 하여야 하는 그 눈물겨운 안쓰러운 광경을 이제는 그만 멈추도록 나눌 마음이 없단 말인가? 아니면 뉴스 해설자의 말대로 정치적인 상대가 싫어서 아이들 밥그릇을 담보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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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잘못 만나고 나라 잘못 만난 죄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그것도 먹을 것 가지고 너무 인색하거나 정치적 색깔을 따지는 옹졸함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좀 더 있는 우리들이 없는 아이들과 점심 도시락 하나는 똑같이 나누어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 가지 또 미안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짱 친구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굵은 뼈마디의 큰 덩치에 우락부락 하지만 왠지 서글퍼 보이는 그 얼굴은 생각이 나는데... 그날 뉴스를 들은 후 식사 시간이면 너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구나!

 

친구야, 보고 싶다! 오늘 점심 많이 먹었냐? 만나면 내가 진하게 한 번 쏠께!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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