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위기? 기회?

by Windwalker posted Jan 08, 2011 Likes 0 Replies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한국 보수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장로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보다 더 보수적인 재림교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  세.기.연에서 퍼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오는 사상들은 항상 극단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다.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의 역사는 모두 순교의 역사였고 유입되는 온갖 사상들도 모두 극단의 길을 선택했다.

조선사회가 받아들인 유교도 현실적이기보다는 무척이나 이론적인 (실제로 시행된 예가 없었던) 성리학이었고,

20세기의 현대사상이 정착되는 과정에서도 남측은 가장 극단적인 재벌자본주의를, 북측은 스탈린주의를 받아들였다.

아마도 우리 민족이 어떤 사상이든 원본 (originality)을 중시 여기기 때문인듯 하다.

 

 

그 때문에 한번 정착된 사상은 목숨을 걸고 지키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지켜야 할 것이 종교일 경우 타협은 거의 불가능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종교 갈등은 사실상 이런 국민성과 한반도 역사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하고 있고,

실제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기독교의 문제점에 대해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이번 정권 들어 기독교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들이 보다 심화되고 있고

기독교에 대한 호감지수는 기독교 박해가 끝난 19세기 말 이후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기독교가 큰 곤란을 겪는 것에 비해 한국 기독교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기독교인들을 포함해도) 많지 않다.

     1) 기독교 안에 포함된 소위 크리스천들은 그 ‘종교적 진리성’을 강조한 나머지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에서 어떤 위치쯤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하고

     2)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예 ‘무관심’하거나, 한국사회에 비쳐진 기독교인들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는 경우만 있을 뿐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기독교’에 대한 명칭이 분명하지 않은 것도 그 중의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Christianity)’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하여 말한다.

기독(基督)이라는 말 자체가 ‘Christ’의 직역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종파는 기독교에 포함시켜야 옳다.

따라서 이 어원에 근거하여 로마제국 시대에 갈라진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orthodox),

그리고 그 당시에 소종파였던 콥틱교까지도 기독교 범주에 포함된다.

물론 종교개혁 이후의 종파들인 각종 개신교도들 모두 기독교에 포함되는 것이 옳다.

문제는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그들과 가장 근접해 있는 종파인 천주교를

‘기독교의 범주’에 넣기를 거부한다는 것이 ‘기독교’라는 명칭을 정의하는데 있어 혼돈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개신교인들이 천주교, 즉 로마 카톨릭을 기독교라는 범주에 넣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종교개혁을 강조한 나머지 카톨릭이 그 이전의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며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천주교의 문제점들,

가령 교황 등의 성직제도, 성모 마리아 숭배에 관한 문제, 성찬에 대한 신비주의적 견해 등을

지속적으로 지적하며 천주교인들의 신앙을 거짓된 것으로 폄하하곤 한다.

(심지어 천주교인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므로 ‘기독교’의 카테고리에 넣으면 안 된다고 믿는 개신교인들도 많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이후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기독교 내의 종교분쟁이

오늘날의 서방세계에서도 여전히 전개되고 있을까?

물론 북아일랜드와 같이 아직 갈등이 끝나지 않은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러한 갈등을 겪는 곳은 유럽에서는 이제 흔하지 않다.

20세기에 홀로코스트나 이념갈등과 같은 큰 홍역을 치러서인지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종교에 큰 차별을 두지 않는다.

혹 차별은 두더라도 그것을 표출하여 갈등으로 표면화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국 같은 경우 기독교 외의 종교에 무척이나 관대한 입장을 표명한다.

리처드 기어가 불교인이 되고, 달라이라마가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기독교의 영성(spirituality)을 설명하는데 있어

이슬람이나 불교, 도교의 원리를 끌어들이는 것에 주저하긴 커녕 오히려 큰 관심을 보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서방세계에서는 학문적인 성찰을 통해,

기독교 자체가 수많은 다른 종파로 이루어져있고

그 종파조차도 지역성, 역사성과 같은 컨텍스트나 배경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타종파를 비롯하여 타종교에 대한 관용으로까지 이어진 듯 보인다.

진리의 문제로 나뉘어진 기독교의 수많은 종파들에 대해 공통 분모를 통해

서로를 인정하는 통합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따라서 유럽이나 일부 미국의 신학교에서는 동방정교, 로마 카톨릭, 루터교, 개혁교회,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교단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과정을 중요시 여긴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는 위의 나열된 교단 중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조차도 자신들의 종파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믿는 것이 가장 진리라고 믿는

우월주의에 빠져 있으며 따라서 다른 종교와는 물론이고

다른 기독교 종파와도 비교되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 그 중 특히 개신교의 뿌리는 미국 북장로교이다.

19세기 말,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의해 각 종파별로 합의하에

지역별로 선교지를 나누었지만 알렌, 언더우드 등 교과서에서 배웠던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이곳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견되었다.

어느 정도로 이 종파가 영향력을 끼쳤냐 하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한국의 기독교 메카는 평양이었는데,

이 지역의 정신적 영향력까지 고려하면 95% 이상을 북장로교에서 장악했으리라 추측한다.

실제로 아직도 감리교회에서도 장로교에서나 들을 법한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많이 있다.

(가령, 이중예정설 -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전지의 하나님이 미리 구분했다는 칼뱅의 교리 - 은

감리교에서는 웨슬리 전통을 따른다면 거절해야 마땅하나 많은 한국 감리교 목사들은

장로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 때문에 설교 강단에서 예정설을 설교하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북장로교가 전 세계 기독교를 분류했을 때 가장 보수적인,

소위 ‘근본주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가장 민감하면서도 알기 쉬운 이슈가 성서 해석에 관한 것인데,

성서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문자 그대로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종파가 가장 보수적이라고 한다면

성서의 진리성은 인정하면서도 저자에 따라 그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종파는 중도,

그리고 성서 자체도 오래된 책들 중 하나로 이해하여 다른 고전서적처럼

역사적, 지역적 배경에 의해 (심지어 성서 저자간의 갈등까지 포함하여)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진보 종파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이 북장로교가 가장 근본적이고 보수적인 위치에 있는 종파이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 역시 융통성 없이 근본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는 종파가 대세가 되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이 근본주의 신앙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기독교는

미국 보수 교단과 이들의 선교로 인해 영향을 받은 아주 적은 수의 남미인들과 한국인들 뿐이다.

더 있다면 한국의 선교를 받은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이다)

중국과 동남아 일부이다.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인 서유럽은 이런 근본주의 기독교가 가진 폐쇄성 때문에

20세기에 완전히 그 색을 바꾸었다.

(물론 근본주의 기독교는 이러한 ‘변화’를 신앙의 ‘변질’이라 비난한다.

대표적인 비난의 근거로 서유럽은 일요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숫자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 기독교는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신앙과 외래 사상에 대한 한국인의 극단성과 시너지 효과로 인해

한국사회의 골치거리가 될 갈등요소를 이미 오래 전부터 배태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교리에 있어서 비기독교인들을 ‘어차피 지옥에 갈 사람들’로 명명하면서

(앞서 말했듯이 이는 칼뱅의 영향을 받은 북장로교의 교리이다) 인격적인 존중보다는

‘우리 편으로 오지 않으면 마귀에게 속한 자들’로 이해하였고

그 대화 자체를 단절하여 종교 갈등을 증폭시켰다.

게다가 90년대 중반부터 둔화된 기독교인의 양적 성장은 그 포화상태를 견디지 못하여

안으로 (특히 윤리적으로) 곪아터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두 번의 장로 대통령의 무능한, 혹은 적절치 못한 대처로 인해,

기독교는 이제 비기독교인들에게는 혐오의 종교로 전락하였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지만 비기독교인들이 느끼는 혐오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폐쇄적인 교리 안에서 살고 있던 이들이 (이때까지는 봐줄 만 했지만)

비윤리적인 보수집단과 결탁했을 때 자행된 작태는 비기독교인들에게 혐오집단 이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혹은 나처럼 기독교인이면서도 이런 혐오감을 함께 느낀 이들에게조차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기독교인들에게 느낀 혐오감은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1) 기독교의 모든 교리 자체가 세속시대에 없어져야 할 미신이라는 무신론적 반응,

     2) 예수는 옳았으나 그 제자들은 옳지 않다는 교권종교에 대한 혐오 반응,

     3) 기독교의 순기능은 있을 수 있지만 현재 한국 기독교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반응 등이 있다.

 

그와 반대로 기독교를 옹호하는 글들은 모두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간단하게 기독교인들은 결국 천국에 갈 것이고 이를 비판하는 이들은 죄를 짓고 있다는 논리로

자신의 우월감을 표현함으로써, 다른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정당한지 몸소 보여주는 작태를 펼친다.

 

 

솔직히 나 자신도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고작 100년 (카톨릭을 포함하면 200년) 남짓한

기독교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이런 우월주의적 시각을 지니고 있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보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 시기가 홍역처럼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시기라고 믿는다.

한국 기독교는 그간 너무 지나친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그 곪아터진 각종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하게 한국 기독교인들을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또 다시 이 위기를 기회로 보다 폐쇄적이고 근본적인 울타리를 치고

자신들만의 영역을 성스럽게 보존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껏 그들은 다른 이들을 정죄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교활한 방법을

성스러운 교리인 듯 치장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는 변해야만 하고 변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와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사회가 변했고 교회 구성원들의 마인드가 단순히 “믿쓥니다~”로 해결되는 때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 인터넷 상에서 울려 퍼지는 기독교인들의 비판이

보다 성숙한 한국 기독교의 초석이 될 것이라 조심스럽게 기대하고 싶다.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