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1장과 요한복음 3장

by fallbaram posted Jan 25, 2014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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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중에 니고데모라하는 유대인의 지도자가 밤시간에 예수를 찾아온다.

많은이들이 니고데모가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 밤에 찾아 왔다고 말하거나 설교한다.

요한은 1장에서부터 예수는 낮이고 모세는 어둠이라고 나누었다.

율법은 어둠이고 은혜는 낮이다.

몽학선생은 밤이고 참선생 (하나님께로 부터 온)은 낮이다.

요한은 율법의 저주가 깔린 모든 상태를 밤이라고 묘사했다.

바리새인들이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 안식일에

날때부터 소경인 병자를 낫게 하였다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요한은 그 무리들이 바로 날때부터 어두움의 지식들이라는 말을 하고있다.

"너희들이 본다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어두움의 눈 (율법)

죄책감의 눈

그것으로는 볼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보는것은 들어가는것이고

들어가는것은 보는것이라는 말이다.


육 (율법으)으로 난것은 육이요

영 (뮬과 성령)으로 난것은 영이니

육이 영으로 들어감이 거듭남이다.

요단강 이전의 경험이 아니고 요단강의 경험이다.

반드시 그 강을 건너야 들어가는 나라가

가나안이다.


율법의 기르침 속에는 없는 이야기가 거듭남이다.

옛 모세의 성소에도 없는 이야기가 거듭남이다.

그래서 날마다 용서 받아야 하고

날마다 양을 잡아야 한다.


재림교회의 가르침이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거듭남의 과정도 없이 죄의 대속을 위하여 날마다 드리는 옛 성소의 제사와

거듭남의 경험 이후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선언은 십자가 하나만큼

차이가 나고 다른것이다.


계시록에도 거듭난 자들이 날마다 거듭남의 주인에게서 거듭남의 옷을 빠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번 구원받음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그렇게 되려면 날마다 그 구원을 빨아야 한다.


한번의 구원 (거듭남의 경험)을 얻지 못하고 날마다 죄를 빠는 행위가 율법의 행위이고

옛 성소에 머무름이다.


한번의 구원 (거듭남)을 받고도 날마다 그것을 빨지 아니하는 사람도 머무른 사람이다.


그러나 율법에도 거듭남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레위기 11장에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이야기가 나온다.

문자 그대로 읽거나 평평하게 읽으면 먹지 말아야 할 짐승과 먹어도 되는 짐승을

구분한듯이 보여진다.


굽이 갈라졌으나 되새김하지 아니하는 짐승과

되새김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한 짐승은 부정한 짐승이라는 말이다.

오직 정한 짐승은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하는것이어만 하는것이다.


굽이 갈라지는것은 딱 한번 태어날때의 일이다.

그러나 되새김은 날마다 해야하는 일이다.


이 두가지를 할때에야 정한 짐승이다.


비늘이 있고없고는 딱 한번 생겨날때에 결정이 되는것이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매 순간마다 흔들어야 머무르지 않게 되는것이다.


물의 거듭남이란 요단강 (십자가-예수)의 거듭남일까

그렇다면 성령의 거듭남은 날마다 죽노라의 경험일까


이렇게 되면

거듭나기 위하여 예수에게로 가지않고 

거듭나기 위하여

혼자의 힘으로 온갖 발악을 하게되는 악순환이 있을 수도 있지.


그렇게 거듭난자 (공상 임신)들은 대체로 육안으론 더 거룩하게 보이고

남을 정죄함이 좀 뛰어나다고 할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얻게하려 하심이라


믿음은 거듭나게 하고 맏음은 날마다 자신을 죽게 하는 이

십자가가 그대의 것인가?


나는 부정한가 정한가?


안식일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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