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에 드리는 글

by fallbaram posted Jan 27, 2014 Likes 2 Replies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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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민초가 십오년의 역사를 가졌다는것을

최근에야 알았읍니다

몇년전에 누군가 그런곳이 있다하여 한번 기웃거렸었는데

어찌나 댓글을 쏘아올리는 정신들이 어지럽든지

들어오지 않다가 글을 쓰는 공부를 좀 하려는 마음으로

다시 들어와서 요즘엔 주말을 제외하곤 노상 여기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열심으로 붙어 잇읍니다.


오늘은 이 민초에 드리고 싶은 말을 좀 하려고 합니다.

민초에는 생각의 폭이나 깊이가 남다른 분들이 여럿이 계시고

그분들의 생각을 담은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을 듣게되는

일종의 샘터라고나 할까요.


그 여러분들의 생각은 절대로 획일적이지 않으나

그분들의 태도는 획일적으로 보여집니다.

신사적인 태도 말입니다.

진보적인 생각 말입니다.

열려있는 마음 말입니다.


어느분은 정치에 더 관심을 표명하기도 하고

어느분은 교회나 교리에 더 관심을 표현하고

어느분은 교회가 갖는 사회적 위치에 더 관심을 표현하는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리꾼들 중에는 이 분들을 싸잡아

한통속으로 집어넣는 우를 범하다 못해

그 분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근접하지 못하고

껍데기만 붙들고 전쟁을 불사합니다.


내가 보기엔 그 분들은 절대로 한통속이 아닙니다.

같은 생각의 집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각은 서로 다르고 방향은 서로 달라도

그들은 서로서로 좋은 친구들일 뿐입니다.

나도 친구가 되고 싶지만 이놈의  필명 때문에...


글을 잘못 이해하는 예를하나 든다면

동성애 입니다.

그 동성애를 논하는 그분은 동성애 자체를 장려하거나

두둔하는 생각은 아예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수없이 늘어나는 동성애자들을 이제는 사회악으로 보지말고

어쩌면 내 새끼가 또 내 손자가 어느날 그런 모습이 되어있음을 보기전에

우리는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인적인 정신의 어떤 따뜻함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보여집니다.


동성애는 구약에서 그리고 사도바울의 편지서에서 죄의 한 모양으로

취급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읍니다. 간음도 죄의 한 모양이듯이 말입니다.


간음한 현장에서 율법의 아들들에게 잡혀 끌려온 그 여인을 동성애자로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다.  모세는 분명히 그런 죄를 범한자를  돌로 치라 했읍니다.

간음한 그 여자만 돌로 치는 그 율법의 핵심은

요 2장에서 성전의 모든 제사 행위를 채찍으로 뒤엎고 그런 행위가 이제는

강도의 행위라고 꾸짖으시는 예수의 사역에서 다시 생각되어야 할 일입니다.

간음한 남자는 없고 간음한 여자만 데려와서 예수 (은혜)앞에 세우는 율법의 고발 (죽음의 직분)은

교회를 상대로 일어날 어떤 핵심적 교훈 내지는 그림이라고 요한은 보았읍니다.

동성애 중에 잡혀온 여자.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보내줄 유대인은 예수 한분 뿐입니다.

십자가를 담보로 잡고 그 동성애자를 놓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왕 죄를 규명하는일에는 성공한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죄를 처리하는 과정을 잘 이해하거나 적용하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율법은 죄를 취급하지만 은혜는 죄인을 취급합니다.


죄는 돌비 (피도 눈물도 없는 의문)앞에 서게되고

죄인은 십자가 (피도 흐르고 눈물도흐르는 육신) 앞에 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를 위해 온것이

죄인을 위해 온것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말입니다


용서와 사랑.

그것만이 죄를 이기게 하는 길입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간음을 일삼았읍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동성애를 저질렀읍니다.

지금도

우리도


그 교회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지막 죄인이 있다면

그들은 고발자 들입니다.


다소 삼천포로 빠진감이 있지만 남이 하는 이야기의 중심에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고 그런 이해에 미치지 못할 경우엔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그리스도인적인 태도를 견지하는것입니다.

아니면 조용히 지나가든지.


안식일 또는 동성애를 다루는 게시판이라고 챙피해 하기전에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정신에서 나오는 쇠꼬챙이같은 심뽀를 챙피하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대부분의 그 쇠꼬챙이들은 실명이 아니고 필명으로 나옵니다.

그것도 필명을 그대그때마다 바꾸면서...


나는 필명을 내가 원해서 사용하기 보다는 집안의 간구와 친구들의 부탁으로

그리하고 있읍니다. 많은이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어떤 친구는 빨리 필명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나는 내 필명을 실명처럼 사랑합니다.

나는 내 필명에 피를 묻히고 싶지가 않습니다.

똥물이 튀게 할수는 더더욱 없읍니다.

그 필명은 나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민초여

필명의 민초들이여

그대들의 필명을 더러운 댓글로 더럽히지 말고

부디 자신의 이름 (비록 가면이지만) 을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하십시요.


당신들의 가면을 더럽히면 그 속에 숨어있는

당신의 본 얼굴이 더러워 집니다.


그리고 남의 생각이나 의견도 존중 하십시요.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다시 그대들의 더 나은 의견을

올리고 수렴하는 신사들이 되십시요.


나는 민초에서 적어도 이런 필객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한분이 있읍니다.


여기다 실명을 거론해서 죄송합니다만 박 희관 님입니다.

그 분은 정말 신사입니다.

절대로 과격한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방항을 이해하는 이해의 폭이 상당하게 느껴집니다.

한때는절에서 뛰어놀고

한때는 성당에서 그 엄숙함에 젖어보고

또 한때는 재림교회의 극단의 기관에서 수행자 (?)로 살아도 보고

그래서 그런지 그는 어떤 갈구가 분명해도 그 어떤 것에도

피눈물 나는 원망이 젖어잊지 않고

이따금씩 배꼽을 흔드는 유모어를 할줄아는 여우만만한

신사입니다.


여기 아래에다  짤막한 시 한수 올립니다.



경계_박노해


겨울이 꽃핀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버리거나,
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



시 한수 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함은 용서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이해하고도 그 시가 잘못되었다고

억지를 부리는일은 용서에 앞서서 절망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함께 타고 가는 이 민초의 나룻배가

여러분들의 제각기 다른 생각의 무게로 적당히 방향을 잃지않고

잘 갔으면 합니다.


동성애 논란에도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해방신학 논란에도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겨울도 꽃을 피운다는 시인의 마음들이 모이면

이곳에서 벌어지는 어떤 주제에도 꽃이 만발하리라 생각합니다.


쇠꼬챙이로 구멍을 뚫으려 하지 마십시요.

우리 모두에게는 쇠꼬챙이가 태생적으로 있읍니다.

그러나 쇠꼬챙이가 꼴리는대로 말하지 마십시요.

제발!

지나가는 이들이 볼까봐 걱정입니다.


결국 당신의 영혼과 마음에 뚫어질 구멍입니다.


교리가 잘못되어도 용서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예수의 정신을 갖지 못한자는 용서받기가....


이 아침에 상당한 부담으로 쓴 내 편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가을바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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