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입다의 딸이 아버지의 방정맞은 서원때문에 처녀인 상태로 제물로 바쳐졌느냐
아니면 처녀로 평생을 살아가는 벌을 받았느냐의
내용을 물어보는 질문을 던졌는데 나도 마침 궁금한터라 여기저기어떤
고찰을 찾아내고 내 나름의 발견을 나누고자 한다.
사사기는
광야의 지도자 모세가 죽고 (율법의 지도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함께하던 여호수아 (은혜의 지도자) 도 죽고
이제는 뚜렷한 계통의 지도자도 없이 그때그때마다 보내주는 다양한 종류의 지도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역사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사사기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 표현은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는 말이다.
굳이 신약에서 그와 비슷한 형태의 setting 을 하나 소개하자면
예수 (여호수아) 께서 임마누엘로 자기 백성의 삶 가운데 오셔서
옛 성전, 옛 언약, 옛 지도자 모세(율법)를 끝장내고 정결케 하신다음
복음의 역사와 내용이 마무리 되고 승천하신 후에 이제는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의 역사가 이끌림을 당하는 사도행전 (은혜의 왕국) 의 역사와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그 사사들의 이야기 속에는 앞으로 사사의 한사람처럼 목수의 아들로 오실
예수의 사역이 그림자처럼 박혀있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어 그림자의 실제로 오신
예수를 거기서 발견해야 한다.
"너희가 성경 (구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이 성경을 자세히 읽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말하느니라" 는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를 전제로 해야 이해되는
역사이다.
성경은 영생이라는 진리를 담은 그릇이고
짜장면의 그릇처럼 그릇자체를 먹을 수 있는것이 아니라 그릇에 담긴
내용을 먹는것임을 알려주는 예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입다가 서원을 뱉아낸 시기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후의 일이다.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한 말이지만 성령은 다 알고 있는 말이다.
오히려 성령이 어떤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의 입술에 역사하신 것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성소에서 드리는 다섯개의 제사중에 화목제가 있고 화목제 속에는 서원제 라는 제사가 있다.
서원제의 신약적 적용은
"죽어야 할 나를 위해 흠없는 제물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에게 완료된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헤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것 곧 나를 드리는 것이다."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 행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측에서 완료시켜 놓으신 어떠한 사건에 대해 감사와
찬송으로 화답을 하는것이 서원제가 속한 화목제의 의미요 기능이다.
성령에 충만해진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최대의 조건을 부여 받았다.
전쟁에서 이기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전쟁을 이스라엘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입다는 전쟁의 중심이 자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으로 발전하고
하나님을 단지 자신을 도우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내가 싸우는 이 싸움을 당신께서 이기게 해 주시면 그것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기뻐하는 자를
당신께 드리겠다고 하면서 화목제와 서원제의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하나님 회유라는 방향으로 몰아갔다.
무엇보다도 제물을 드리는 주체도 자신의 것으로 몰고갔다.
단 하나뿐인 딸.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처녀
단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
죄를 모르는 순결한 어린 양
그것 만이 육신의 죄를 정복하고 이기게 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이레요 방법인것을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지도자에게 나타내고
앞으로 그런일이 훗날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하다.
입다의 딸이 아버지에게 하는 말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입으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섰음이니이다."
다시 말해서
입다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시면 처녀인 내 딸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한 것이나
입댜의 딸은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게 하셨음으로
전쟁의 주체이신 여호와께 자신을 드림이 마땅하다는 방향으로 끌어간다.
십자가는 내가 싸워 이기는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전쟁을 하나님의 유일한 육신인 아들의 살과 피를 드려서
이기게 하는 이 전쟁에 우리가 함께 하는것일 뿐이다.
그이후에 아마도 입다는 죽은 자신의 딸의 정신과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내 나름의
각본을 생각해 본다.
종종 우리의 상식을 깨고 뛰어넘는 성경속의 이런 일들이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또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게 되는데
그 일의 중심인 예수를 찾게 되면 .....
그래도 입다의 딸 그리고 처녀성이 그냥 죽었다고 하기엔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이 된다면 살릴 방도가 하나
있는데 이삭을 제사로 드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 힌트가 있어 보인다.
독자 이삭은 독생자 예수를 표상해서 모리아에서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죽지않고 대신 양을 준비하셔서
죽게하신 그 일처럼 입다의 딸도 살아났을 수가 있다는 나의 생각이다.
구약에서 에수의 표상을 한 대역들이 많았지만 직접 죽음을 대역한자는 하나도 없다는것에
의미를 굳이 둔다면 말이다.
죽음 만큼은 어떤 대역도 할 수가 없고 예수가 직접 해야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