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예배의식을 와장창 때려부수는 "깨달음"

by 김원일 posted Feb 14, 2014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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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것 2

마태 13:10-17

 

곽건용 목사

 

종교는 언제, 왜 발생했을까?

 

종교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인류에게 종교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수만 년 전에 그려진 동굴벽화에서도 종교의 흔적이 엿보인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의 종교는 제도와 체제를 갖춘 종교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원초적인 종교심이란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 역시 살아가면서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던 겁니다. 물론 그들이 남겨놓은 게 별로 없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이므로 그림 외에는 남길 수 있는 수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입니다.

 

문서가 됐든 유물, 유적이 됐든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종교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는 문자의 발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곳을 문명의 발상지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제도로서 자리 잡은 종교입니다. 제도로서의 종교란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종교행사가 있고 그것을 주관하는 제사장이 있으며 종교행위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 예컨대 재정지원 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는 종교를 가리킵니다. 인류 역사에 제도적인 종교가 시작된 때는 지금부터 약 4-5천 년 전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종교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왜 종교를 가졌고 유지했을까요? 당시는 먹고 살기도 힘든 시대였습니다. 하루 종일 일해도 먹을 것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행사에는 공동체가 만들어낸 재화가 대량으로 사용됐습니다. 인력이 투여된 것은 물론이었고요. 먹고 남는 게 거의 없던 시대에 공동체가 만들어낸 재화와 노동력을 신에게 제물 바치는 데 써가면서 종교행위를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확실한 이유를 담은 문서가 남아 있지는 않으니 우린 있는 자료를 갖고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수 없고 우리의 지식이 정확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이 살았던 세상에는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들, 그래서 사람이 어찌 해볼 수 없는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과학적으로 원인이 밝혀졌지만 그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자연재해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러분도 상상해보십시오. 어느 날 개기일식이 일어나 갑자기 세상이 캄캄해졌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지금이야 개기일식이 왜 일어나는지 다 알고 있고 심지어 언제 일어날 거라고 예고까지 되지만 옛날에는 그게 왜 일어나는지 몰랐으니 정작 일식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런 두려운 일을 일으키는 누군가에게 빌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이런 일들이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신의 힘을 빌려 재난을 피하려 했던 겁니다. 이런 일들은 신이 분노해서 벌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신을 화나지 않게 하려 했고 일단 신이 분노했다면 그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던 겁니다. 종교행위는 이런 목적으로 행해졌다는 겁니다.

 

또한 고대인들은 전쟁 역시 신들끼리 벌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실제 전쟁은 사람들끼리 하지만 그것은 신들끼리 벌이는 전쟁이 반영된 것이라고 믿었지요. 고대사회는 다신교사회였습니다. 부족이나 도시국가들은 각각 자기들의 신을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믿는 신 이외에 다른 신들도 존재하지만 자기들이 믿는 신이 제일 힘이 세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전쟁에 나가면서 반드시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승리 여부를 물었습니다. 신이 이길 것이라고 알려줘야 전쟁이 나갔지요. 하지만 그래도 진다면 그들은 가차 없이 섬기는 신을 바꿨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쉽게 개종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전쟁에서 패했으면 승리한 부족을 섬겨야 했으므로 섬기는 신도 갈아타는 게 당연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좌우간 고대인들은 자연재해든 전쟁에서의 패배든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런 일들은 자기들이 신을 제대로 섬기지 않아서 벌어졌다고 믿었으므로 최선을 다해서 신을 모시고 섬겼던 것입니다. 매일 신에게 푸짐한 제물을 바치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좋은 옷을 입히고 최고의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신을 찬미했던 것입니다.

 

종교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이것이 인류에게 오랫동안 지속된 종교의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신의 비위를 맞추고 신을 화나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종교행위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제사를 드렸고 예배를 했습니다. 신을 기쁘게 하고 노여워하지 않게 하는 게 종교행위의 목적이었던 겁니다. 온갖 귀한 제물을, 흠이 없는 제물을 바친 것은 전적으로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구약성서 역시 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기본 목적과 원리는 앞에서 얘기한 그대로입니다. ‘설마 야훼 하나님이 그렇겠어..... 그럴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요.

 

하지만 저는 야훼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그런 것을 원하신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믿었을 따름입니다. 물론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한 걸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당시의 문화와 종교상황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구약성서 역시 제물을 바침으로써 신을 기쁘게 하고 신의 노여움을 피하자는 패러다임 안에 들어 있지만 거기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큰 목소리는 ‘제물=신을 기쁘게 하는 행위’의 패러다임이지만 작지만 그것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가 구약성서에는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한다.”는 선언이고 더 나아가서 야훼 하나님은 짐승의 피와 고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자비와 정의와 긍휼을 원하신다는 예언자들의 선언입니다.

 

물론 예언자들은 짐승제사보다는 정의와 자비와 긍휼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곧 정의와 자비와 긍휼 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행하라는 겁니다. 여기서도 종교행위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란 점에서 과거의 패러다임과 다르지 않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는 짐승제사를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으로,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 사이’의 정의와 자비와 긍휼이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대단한 변화입니다. 혁명적인 변화라도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 마침표를 찍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바꾸셨다고 말하기보다는 부숴버렸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것을 다시는 되살릴 수 없게 산산조각 내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하신 행동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고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외쳤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행위를 ‘성전 정화’(purification)라고 불러왔는데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강도의 소굴을 무슨 수로 ‘정화’합니까? 강도를 몰아내지 않으면 강도의 소굴이 어떻게 정화되겠나 말입니다. 따라서 ‘정화’라고 부르는 것은 옛 패러다임을 유지하려는 자들의 속임수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다시 말씀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 아니라 부숴버리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너무 더러워졌고 부패해서 깨끗이 씻으신 게 아니라 아예 부숴버려서 다시는 거기서 제사를 못 드리게 하시려 했던 겁니다. 곧 제사제도 자체를, 제물을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모든 시도를 폐기해버린 겁니다. 기름진 제물을 바치고 화려한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하느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서 뭔가를 얻어내려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하신 겁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이렇듯 제물을 바치는 예배가 필요 없다면 모든 예배는 무의미한 걸까요? 예수님은 예배라는 것 자체가 아예 필요 없다고 하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날이 온다고 말입니다! 동물을 죽여 바치는 제물과 사람이 동원할 수 있는 온갖 미사여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여기냐 저기냐를 따질 필요가 없이 하나님과 사람이 영과 진리로 소통하는 예배,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결국에는 하나가 되는 예배,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가 무엇일까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게 어떻게 하는 걸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학자들은 이를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해석하지만 저는 ‘깨달음’이라는 한 마디가 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은 바로 깨달음이고 거기 이르는 길이란 얘기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니면 뭐가 깨달음일까요? 그리고 깨닫는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게 아니라면 대체 뭐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말입니까?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가 뭔지에 대해 수많은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해석들이 하도 다양해서 어느 걸 택해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영과 진리가 히브리 사상에서는 무슨 뜻이다, 희랍 사상에서는 무슨 뜻이다 하면서 말입니다. 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영과 진리’는 한 마디로 ‘깨달음’이라고 이해합니다. 간단해서 좋지요?

 

이렇게 간단하게 이해하는 근거는 이겁니다. 예수께서 성전제사를 부숴버린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특정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란 중재자 없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동물이나 곡식제사를 드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 또는 예배는 본래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입니다. 과거 오랫동안 이 만남의 광장은 제물이 드려지는 성전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모두 부정하시고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나님과의 소통을 영과 진리로써 이루어진다, 영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람은 영과 진리로써 하나님과 만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건을 표현하는 말로 ‘깨달음’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도 당신이 아버지께로 올라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을 깨닫게 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마태복음 13장 얘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마태복음 13장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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