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 10월 22일을 새삼스레 말하는 장로교 목사

by 김원일 posted Feb 21, 2014 Likes 2 Replie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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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16 / 주현절 여섯 번째 주일

 

그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것 3

마태 13:10-17

 

곽건용 목사

 

예수에 대한 여론과 기독교인에 대한 여론의 차이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일반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질문은 “‘예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였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놓은 대답은 ‘지혜’ ‘수용적’ ‘긍휼’ ‘은혜로움’ ‘겸손함’ 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기독교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비판적’ ‘배타적’ ‘스스로 의롭다 함’ ‘편협함’ ‘억압적’ 등의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슬픈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이 여론조사가 많은 것을 의미하겠지만 제게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보입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과거의 습관을 끊어버리지 못한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예를 들면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직껏 점을 치고 사주팔자를 보러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젠 기독교인이니까 점을 치거나 사주 보러 다니지 말라고 점잖게 가르쳐야 할까요? 그걸 끊어야 제대로 된 기독교인이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 끊어내지 못해서 고쳐야 할 것에 집중하지 말고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과거의 습관을 끊지 못한다 할지라도 새롭게 노력하는 부분에 집중해서 칭찬하고 격려하는 게 옳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많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깨달음으로서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면서 복음서에 나오는 믿음이 대개의 경우 ‘신뢰’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가 말하는 신뢰로서의 신앙은 ‘의존’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모든 걸 하나님께서 다 해주실 것으로 ‘믿고’ 감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게 신뢰는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소원성취와 같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응답 여부뿐 아니라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내 소원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믿음을 뭔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게 되면 그것은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 앞에 길은 여럿이 있습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택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게 바른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내 길이 옳다고 믿는다고 해서 남이 가는 길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그걸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더욱이 정말 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입니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믿음은 곧 깨달음'이라는 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주의 깊게 들은 분들은 지금쯤 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은 곧 깨달음이란 주제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종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얘기하는 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 대한 얘기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세상 마지막 날에 대한 얘기가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이 얘기는 마가복음 13장과 병행하는 공관복음서 말씀에 집중되어 있는데 먼저 그것을 발췌해서 읽어보겠습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이 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며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근이 들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보아라, 그리스도가 저기에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환난이 지난 뒤에 그 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습니까? 정말 마지막 날이 올 걸로 믿습니까? 그때가 다가오면 이런 일들이 정말 벌어지리라고 믿습니까? 여기엔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런 일들은 언제나, 늘 일어나는 것 아닌가? 이런 일이 없었던 적이 있는가?’라는 반응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읽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인자가 구름 타고 올 거라는 대목 말고는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니냐는 겁니다. 전혀 새로울 게 없다는 거죠.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때가 없습니다. 기아와 지진 역시 마찬가지죠. 따라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말세가 다가왔다고 믿는 것은 늘 말세란 얘기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둘째로, 이런 얘기를 어떻게 믿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마 이런 일들이 일어나겠느냐는 겁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 얘기를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읽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했다고 해서 믿어지지도 않는데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남들이 ‘멍청하게 그런 걸 어떻게 믿느냐?’고 핀잔을 줘도 믿어진다면 억지로 안 믿을 수 없는 것이고요.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읽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하기 전에 예수님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는 제대로 알고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뭘 믿는지, 뭘 안 믿는지는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 믿든지 말든지 하자는 얘기입니다.

 

지금의 것과는 다른 세계관이 전제된 이야기

 

요즘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가 인기가 있지요. 거기에는 4백 년 전에 뭐가 잘못 되어서 지구에 내려와 살고 있는 외계인이 나오는데 그가 조선시대에 살 때 일어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그가 동료 관원에게 지구는 둥글다고 얘기하니까 그 동료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고 반박합니다. 만일 지구가 둥글다면 사람이 어떻게 똑바로 서 있겠느냐고, 다 넘어지지 않겠냐고 말하지요. 그러면서 만일 지구가 둥글다면 넌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인공은 ‘멀리서 보면 안다.’라는 상대방은 알 수 없는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드라마에 나오는 김수현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구에 대해서 지구인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외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문화와 환경 안에서 사셨던 분이란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과 다른 세계관과 시간관을 가진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시진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영성과 지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면이 있었지만 세계관이나 시간관은 그 시대의 것을 공유하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에도 이 사실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시간과 역사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작은 물론 창조이고 끝은 종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시간과 역사가 시작됐다고 믿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다고 믿었는지는 우리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창조론자들처럼 그들도 6천 년 전에 세상이 창조됐다고 믿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빅뱅이론에서처럼 150억 년 전에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믿지는 않았다는 겁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큰 숫자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종말은 미래에 오겠지만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이 중에는 인자가 구름 타고 오는 걸 죽기 전에 볼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끝나는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그 시대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럼 언제 시간이 끝나는가, 이게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종말이 언젠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주장을 내세웠던 게 당연하지요.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한 마디로 정리하셨습니다. 그때가 언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때가 언젠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심해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이 쏟아져 내릴 것이란 얘기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얘기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이런 얘기는 당시 묵시론자들 사이에선 널리 알려진 흔한 얘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만들어내신 얘기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시중에 회자되던 얘기를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도 시대의 아들이었다고 말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지금 여기 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시대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가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고 제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지점도 바로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시대와 공유하셨던 내용이 아니라 공유하지 않았던 내용, 곧 예수님만의 독특한 것에서 예수님 특유의 메시지를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나라와 종말에 있어서도 예수님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면이 있었는데 학자들이 그것에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제 그게 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종말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무슨 뜻인지는 다 알지요. 다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속뜻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날은 아무도 모르니 사람들은 거기에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마지막 날이 언젠지 계산해서 특정 날짜를 예언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예언은 다 틀렸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나오면 틀릴 가능성에 100%입니다. 따라서 그날이 언젠지 우리가 신경 쓴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날이 언젠지도 모르고 그날을 당기지도 미루지도 못한다면 왜 신경을 쓰겠냐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뭔지 찬찬히 돌아봅시다. 예수님의 복음은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로 시작됐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저기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나라가 그들 것이기 때문이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한 까닭도 하느님나라가 그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하셨고, 예수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나님나라의 잔치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에서 하나님나라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미래의 일입니다. 문제는, 누가 거기 들어갈지가 전통적인 생각과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에선 거기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당시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까지 말씀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지만 여전히 하나님나라는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관한 말씀 중에서 진정 독특한 점은, 그 나라가 지금 그리고 여기서(here and now)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는 여기 있다고도, 저기 있다고도 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유명한 말씀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독특한 생각을 봅니다. 이런 말씀에서 하나님나라는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왔습니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왔습니다! 벌써 이루어졌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아무도 모르는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여기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현재의 사건으로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현재냐 미래냐 하는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앙의 중요한 본질을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잔치 같은 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지는 나라이고 정의와 자유와 평등, 평화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해 더 얘기할 수도 있지만 이만큼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가 현재 이루어졌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런 나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 기근으로 고통 받는 세상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연적, 인위적인 재해로 고난당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 시대라고 해서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못지않게 부자유하고 불평등하고 평화롭지 않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다고 하셨는데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저는 그 하나님나라는 내가 삶에 대한 시각과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버림으로써, 성서적 용어로 말하면 ‘회심’(메타노이아)하여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에서 질적인 전환을 이룸으로써 새롭게 펼쳐지는 영적인 새 세상을 가리킨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에서 ‘종말’입니다. 시간의 끝으로서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가치관의 시작으로서의 종말 말입니다. 길이로 펼쳐지는 시간이 아니라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질적인 시간으로서의 종말, 곧 깨달음의 때를 가리키는 종말 말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메타노이아’ 곧 ‘회심’이라고 불러왔습니다. 회심은 도덕적, 윤리적인 죄를 참회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식구조가 전면적으로 바뀌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과 삶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신앙의 회심, 이것을 메타노이아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회심의 때가 왔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이런 의미의 회심과 깨달음에 대해서 적지 않게 말씀하셨음을 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태 6:22-23)라는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눈은 몸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고 빛은 태양빛이 아니라 내면의 빛을 가리킵니다. 곧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면 내면의 빛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채로 어리석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믿음은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미몽(迷夢) 같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의인들과 예언자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얘기를 대부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하는 게 참 얄궂은 구석이 있습니다. 비유란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주지만 동시에 뭔가를 감추기도 합니다. 뭔가를 쉽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을 감추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비유를 들었던 사람들은 매우 쉬운 이야기 같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했을까요? 마음이 무디어져 있어서 그랬습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전까지는 믿음은 곧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게 믿음이라고 믿었고 기껏해야 의존 아닌 신뢰가 믿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무디어진 마음을 갈고 닦아서 깨달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본문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영의 눈을 떠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는 게 아니었을까요? 무디어진 마음을 갈고 닦아서 지금 이 자리에 이미 와 있는 하나님나라를 느끼는 게 아니었을까요? 닫혔던 귀를 열고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나님나라의 잔치자리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서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축제를 즐기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을까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아낌없이 선물로 부어주시는 사랑, 그것을 알고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나옵니다. 이 사랑을 그저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깨닫고 느끼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이라고 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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