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적인, 너무나 편파적인? 웃기는 주관의 객관

by 김원일 posted Feb 26, 2014 Likes 1 Replies 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야! 한국사회] 객관의 신기루 / 이라영


이라영 집필노동자


몇년 전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77일 옥쇄파업을 다룬 다큐멘터리 <저 달이 차기 전에>를 보았을 때다. 학살 현장을 ‘구경’하는 일처럼 어색하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극장을 나왔는데 마침 아는 사람을 만났다. 날 보고 왜 그렇게 얼이 빠져 있냐 묻길래 방금 본 다큐멘터리 얘기를 했다. 영화를 보고 이글이글 가슴이 끓어오르던 나는 잠시 후에 그가 부은 기름에 꺼질 줄 모르고 활활 타올랐다. “다큐멘터리는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이렇게 분노하는 관객이 있다면 영화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뜻이군요.”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아니, 그보다 먼저, 내가 묻고 싶은 건 ‘객관’, 그 자체다. 도대체 객관이 무엇인지 묻고 싶을 때가 많다. 객관은 ‘진실’인가. 객관의 가능성에 대한 순진한 믿음과, 그 객관이 곧 중립이며, 나아가 중립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관념이 늘 의아하다. 주관과 사실 왜곡은 다르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이미 주관이 개입된다. 주제의식에는 생각하는 주체자의 주관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인간은 다만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인 주관적인 동물이다. 객관과 주관은 잘 구별되지 않으며, 각자의 주관이 가진 권력의 크기가 다르다.


법은 객관적인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이 얼마나 웃긴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명백한 불법해고를 귓등으로 흘려버리던 사람들이 왜곡된 ‘불법파업’에는 갑자기 법치주의자가 되는 ‘객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권력이 되어버린 주관’ 앞에서는 객관을 잘 요구하지 않는다. ‘성공신화’를 다루면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비판이 거세게 등장하지 않지만 약자나 소수자의 입장을 보여주면 꼭 “너무 편파적이다”라는 말이 돌아온다. 보통 이런 말은 자기가 듣기 싫은 소리를 고상하게 배제하고 싶을 때 사용한다.


최근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 황유미씨 가족의 투쟁을 다룬 극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한 두 개의 글을 읽었다. ‘객관적 진실’에 대한 나의 불쾌한 기억을 소환한 계기다. 하나는 전 반도체 공장 노동자가 영화 관람 후 인터넷에 올린 글이며 다른 하나는 삼성전자 ‘부장님’이 쓴 ‘삼성의 첫 반응’이다. 전자는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었으며 ‘진실’이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후자는 ‘그럴 리가 없다’는 자신의 믿음을 강조하는 글로 ‘진실’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등장한다. 진실?


최근 ‘이석기 유죄’와 ‘김용판 무죄’, 두 판결을 떠올려보자. ‘일어나지 않은’ 내란 음모는 ‘이미 일어난’ 국정원 선거개입과 수사 조작보다 더 진실이 되었다. 가상의 ‘통일대박’은 현재의 피로사회를 뒤덮고 있다. 어떤 진실은 가공되며 어떤 진실은 소멸한다. 하루아침에 아무나 간첩단으로 둔갑되는 마당에 누군가의 진실이 유언비어가 되기는 얼마나 쉬운가.


우리는 표현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 말을 할 수 있는 집단은 소수다. 대부분은 말할 기회가 없거나, 말하고 싶어도 해본 적이 없어서 방법을 모르거나, 괜히 말했다가 손해만 본다. 이 구조 속에서 객관은 권력자의 주관이기 쉽고, 중립은 결국 목소리 큰 사람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 그렇게 진실은 권력의 희망사항에 따라 조작된다.


<변호인>이 ‘천만 영화’가 되어도 자본은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정치적 민주화와 ‘과거의’ 인권 문제는 얼마든지 시장 속에서 유통시킬 수 있을 만큼 자본은 이제 충분히 관대하다. 시민의 울분조차 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장 속에서 벌어지는 현재 진행형인 죽음을 알리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그들을 불편하게 한다. 권력이 선호하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