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 교황님, 우리 교황님

by 김원일 posted Mar 15, 2014 Likes 3 Repli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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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9 / 사순절 첫째 주일

 

부유하게 되려고 가난해지다

고린도후서 8:9

 

곽건용 목사

 

크리스마스 다음날 발표된 사순절 메시지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봄’란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인데 사순절을 계산하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점으로 해서 거슬러 올라가 계산하는데 그 가운데 있는 주일을 뺀 나머지 40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고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한편 왜 하필 ‘사십’일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사십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숫자입니다. 사십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기간이고 모세가 시내 산에서 금식한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다음에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한 기간이 사십 년이었습니다. 곧 사십이란 숫자는 성경에 여러 차례 고난과 갱신을 상징하는 기간으로 등장한 셈입니다. 이런 등등이 교회가 전통적으로 사순절을 지키게 된 유래가 됩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기간을 절제와 금식 등을 하며 자선을 행하고 구제에 힘쓰는 기간으로 삼아왔습니다. 요즘은 세태가 좀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이 기간 동안 약혼이나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좌우간 적어도 이 기간 동안이라도 절제하고 이웃을 돕는 데 주력하시기를 권고합니다.

 

제가 요즘 들어 프란시스코 교황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이십 년이 넘는 제 목회 기간에 이번 교황이 세 번째인데 돌아보니 과거에는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과거엔 교황에 대해서 별로 말할 것이 없었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교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의 교황들과 사뭇 다릅니다. 아마 사람들이 대부분 저처럼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프란시스코 교황에 대해서 자주 얘기했다곤 하지만 대개는 단편적이었고 상세하게 얘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오늘은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교황은 2013년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날 놀랍게도 2014년 사순절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말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입니까?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 최대의 축제날이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에 고난을 상징하는 사순절 메시지라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다음날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사순절 메시지를 발표한다는 게 이치에 맞느냐 말입니다!

 

대체 교황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했을까요? 이제 곧 내용을 소개하겠지만 교황의 사순절 메시지는 ‘가난’이 주제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가난’의 메시지라…….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가난’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고 싶었던 걸까요? 그는 기독교인들을 가난으로 초대했습니다.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려고 그분은 가난해지셨다!

 

저는 교황의 메시지에 담겨 있는 이 역설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저는 메시지를 읽고 나서 교황이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오늘날 어두운 세계 현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가 교황이 되기 전에 어떤 사목을 했는지 세상이 다 압니다. 그는 자기 조국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는 그 어떤 교황보다 세상 현실을 잘 아는 분입니다. 그는 오늘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분명히 아는 지도자로서 그의 확신을 사순절 메시지에 담았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에로의 초대입니다. 이 초대는 고린도후서 8 9절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짧은 한 구절에 심오한 복음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다고 했습니다. 교황은 바울 사도의 이 말이 결코 말장난이나 구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논리, 곧 하나님의 사랑의 논리라는 겁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바로 이 한 문장이란 겁니다. 그리스도는 부요한 분이지만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 무엇 때문에 가난하게 되셨을까요? 바로 우리를 위해서라는 겁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가난해지셨다는 겁니다.

 

이 구절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한 동정이나 풍족한 가운데서 베푸는 자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함께 있어 주는 것, 버려지고 내쫓긴 사람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자비롭고 온유하며 연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의 사순절 메시지 가운데서 몇 구절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셨으며 우리 각자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시기 위해 당신의 영광을 제쳐두셨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정말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이유는 바로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은총이며 관대함이며 가까이 가려는 열망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는 사랑입니다. 자비, 곧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공유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서로 닮게 만듭니다. 사랑은 평등을 창조합니다. 사랑은 벽을 무너뜨리고 간격을 없앱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그것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가난해지셨다는 단순한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사랑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의 가난이 실상은 가장 큰 부유라고 말합니다. 또한 교황은 진정으로 비참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서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가난이 좋았기 때문도 아니고 그 자체를 추구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힘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높임을 받고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에게 회개해야 할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용서받을 필요가 있는 백성들 한가운데 계시기 위해서, 죄인인 우리 가운데 계시기 위해서, 우리 죄의 짐을 스스로 짊어지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저는 교황의 사순절 메시지를 읽으면서 최근에 본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떠올렸습니다.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라는 이탈리아 영화가 그것입니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희극이지만 여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도 꼭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교황님, 우리 교황님!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의식을 ‘콘클라베’라고 부르지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교황이 죽은 다음에 추기경들이 모여서 비공개 투표로 새 교황을 선출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후보를 추천하는 절차 없이 그냥 투표를 하니까 교황 선출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물망에 올랐던 후보들이 치열하게 경합한 몇 번의 투표에서 교황이 선출되지 않았고 어렵사리 재투표를 통해 교황이 선출됐는데 그게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어쨌든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기를 학수고대하던 베드로 광장의 수많은 군중들은 성당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새로운 교황이 선출됐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이제 광장과 마주한 발코니에 신임 교황이 모습을 드러내야 할 순간이 됐습니다. 그런데 새로 선출된 교황은 그 직전에 그만 발작을 일으키고 도망쳐버립니다. 평생 온화하게만 살아온 그에게 교황이란 직무가 너무 무거웠던 겁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는 교황 자리가 무섭고 두려웠고 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느꼈기에 도망쳤던 겁니다.

 

교황청은 거짓 해명으로 일단 시간을 번 뒤에 교황청 소속의 정신분석의사를 불러 교황이 정신적으로 안정되도록 애씁니다. 하지만 이 조치는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초조해진 교황청은 교황을 바깥세상으로 데리고 나가서 외부의 저명한 정식분석의사를 찾아가기에 이릅니다. 사실 이는 관례에 어긋난 일이지만 워낙 사태가 위급하니까 교황청이 몰래 그렇게 했던 겁니다. 교황 선출을 위해 투표했던 추기경들 몰래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외부의 정신분석의사를 만난 교황은 그 의사에게 어렸을 때 부모의 애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말을 듣는 등 이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가 새로 선출된 교황인지 모르는 의사가 그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자 그는 ‘배우’라고 엉겁결에 거짓말을 합니다. 이 거짓말이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니었던 것이, 그는 젊은 시절 한때 배우가 되고 싶어 배우학교에 지원했지만 오디션에서 탈락해서 꿈을 접은 적이 있었습니다. 대신 여동생이 배우의 길을 걸었지요.

 

그는 의사를 본 다음에 갑자기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혼자서 세상 구경에 나섭니다. 이때 그는 짧은 기간이지만 다양한 세상 경험을 하지요. 그는 혼자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묵으려고 들어간 호텔에서 한 극단 배우들을 만납니다. 이들이 공연하는 레퍼토리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입니다. 연극 단원들 중에는 약간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배우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날 밤 그가 갑자기 호텔 로비로 나와서 자신의 대사를 큰소리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할 대사는 물론이고 다른 배우들의 대사와 대본의 괄호 속에 들어있는 지문들까지 모조리 외워대는 게 아닙니까. 암기에 대한 강박 때문인지, 아니면 광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복도를 뛰어다니며 연기에 몰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친 듯 대사를 외던 그가 갑자기 대사를 까먹은 순간, 교황이 그 대사를 이어서 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결혼하고 싶었지만 결혼도 못했고 늘 도시에 살고 싶었는데 여기 시골에서 삶이 끝났어.”라고 말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교황청으로 돌아왔고 첫 메시지를 발표하는 발코니에 섰습니다. 그는 광장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를 교황으로 선출한 추기경들이 듣는 가운데 자기는 교황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자신은 남을 이끌 사람이 아니라 남에게 이끌림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끝납니다.

 

누군가의 고통 덕분에 누리는 기쁨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됐음을 알았을 때 프란시스코 교황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는 교황이란 직책의 무게를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았을 텐데 자신에게 그 짐이 맡겨졌음을 알게 됐을 때,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을 때 그의 심정이 어땠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말입니다.

 

저는 그에게도 영화 주인공 같은 깊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영화 주인공은 잠시지만 세상을 돌아다녀본 다음에 자기를 교황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교황은 그 무거운 직무를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그가 무엇 때문에 이 버거운 직무를 받아들였을까요?

 

저는 그의 사순절 메시지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제 주관적인 생각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교황은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기로 결단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런 결단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방법이라고, 곧 복음적인 사랑의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난해지심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부유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선별해서 들어줄 건 들어주고, 들어주고 싶지 않은 건 들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오셔서 친히 우리 친구가 되어주시는 방식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참된 구원, 그리고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은 하나님의 연대와 동정과 사랑입니다. 교황은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백성입니다. 하느님의 부유함은 우리의 부유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변함없이 그리고 절대적으로 우리의 인격적이며 공동체적인 가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활기를 띤 가난을 통해 실행됩니다. 우리의 스승을 흉내 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형제자매의 가난을 바라보고 그것을 만지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지난 주일에 오스카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못 봤는데 나중에 기사를 보니까 여우조연상을 받은,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운 배우가 수상소감으로 이런 말을 했다는데 저는 거기서 크게 감동을 받았기에 소개합니다.

 

It doesn't escape me for one moment that so much joy in my life is thanks to so much pain in someone else's. 한 순간도 제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은 내가 누리는 기쁨은 다른 누군가의 고통 덕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친구가 부요해지게 하려고 스스로 가난해지는 삶을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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