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믿음 (성경속에서 발견하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

by fallbaram posted Mar 17, 2014 Likes 1 Replies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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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을 집어 삼킬 수 없다는 간단한 원리만 알아도

우리는 율법때문에 이리도 지루한 논쟁과 공방을 계속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것에 접촉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완전한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도 우린 오늘 구원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이며

빛이 무엇이며 생명의 근원 또한 무엇인지를 겸허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다시말해서 죄인이 그 완전한 율법을 행했다고 해서 의인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시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죄인에게 계명이 주어진 이유를 범법함을 인하여 주었다는 바울의 의도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는 그의 확신을 끌고가는 서론이었다.

결론은 율법의 행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죄가 점점 더 확실하게 보이도록

의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율법의 저주 앞에서

"제발 죄인을 죽여 주십시요 예수 마마!"

"속히 이 훙악한 죄인을 떠나소서 예수 마마!"

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은혜의 손, 구원의 손 그리고 생명의 빛이 죄인의 앞에 나타나고

죄인의 손을 잡아 줄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율법은 몽학선생의 기능을 완전하게  행사 한것이 될 것이고

은혜가 더욱 은혜가 되는 IMPUTED RIGHTEOUSNESS 를 죄인은 얻게 될것이다.


이상은 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이다.


모세에게 계명 (죄인이 감당할 수 없는)이 주어진것의 또 다른 목적은 표상적 의미이다.

앞으로 또 누구에겐가 하나님의 또 다른 계명 (감당할 수 있는)이 주어질 것이라는 표상 말이다.


모세에게 주어진 계명은 첫째 아담이라는 죗된 육신에 주어진 계명이고 그것은 고후 3장의 셜명처럼

죽음의 직분에게 주어진 저주의 계명일 뿐이다.

예수에게 주어진 계명은 둘째 아담이라는 흠없는 육신 그리고 살리는 영에 주어진 

영생의 직분에게 주어졌고 그것은 첫째 아담의 저주를 담당하는 계명이다.


그 계명은 이런것이다.

"아들아 내가 너를 아담의 저주의 땅에 보내노니 가서 그들의 죄 (저주)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라!" 는 것이다.


요한복음 전체는 이 두 계명 (모세의 계명-침례요한의 역활-바리새인의 왜식) 간의 대조와 갈등 (?)을

끌고가는 명확한 그림이다. 요한은 스스럼없이 모세에게 주어진 그 계명 조차도 어두움의 일부라는 사실을

밝히며 시작한다. 그리고 빛 생명 은혜 그리고 진리는 예수에게 주어진 사명 또는 그가 아버재께로 받아온 사명

그것 뿐이라는 결론으로 매장마다 마치 갈바리를 오르는 영적 등산같이 십자가를 향해서 올라가고 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구원의 이중주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             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 것도아버지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여기서 아들 예수는 아버지의 계명의 문자대로 하지 않고 뜻대로 한다는 말이 나에게 상당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문자의 노예가 되어있으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어떤 사전 계획적이고 계약적인 계명대로 아들은 그 계명의 일점 일획도 어긋남이 없이 따라하는 광경을 요한은 소개하고 있다.

그 계명은 돌에 쓴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색다른 모습이다. 그대로 따라하는 아들의 믿음은 결국 갈바리에

이르고 그  아들은 십자가 전날밤의 기도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계명을 이제 이룰것이고 그로 인해서 아버지가 영광을 얻을 것이며 세상은 구원을 얻을것이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고 하신 말씀은 그가 스스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다는 독백이 아니라 전날 아버지에게 기도로 확인한 그 아버지의 계명을 이루었다는 이 땅의 오직 하나의 믿음 죽 아들의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계명의 실체)와 아들 (믿음의 실상)이 빚어낸 십자가는 영생의 첫 열매 그리고 유일한 복음이 된 것이고

영원한 복음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과 우리사이에 돌에다 새긴 그런 율법이 아니고 아버지가 행동으로 아들에게 보여준 그 계명처럼

아들이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준 그 계명을 주신것이고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인 것이다


돌에다 새긴 의문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결코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행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지킴(행함을 포함)

예수의 복음-믿음 (행함을 포함)


지키려 하던지 믿으려 하던지 선택은 여러분의 것이지만

그 대상은 위와 같이 다르다는 말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던 아들의 믿음을 따라 우리도 그 바라는 실상을 보는것처럼 따라가는 어린양의 행동이다.


안식일 하나를 살려보려고 이 영원한 복음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 을 꼬부려서 십자가를 폄하하는 일은 실로
BLASPHEMY 이다. 비록 그가 선지자라 하여도...


우리는 어쩌다가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다가 성경의 아름다움을 팔아먹는 가룟유다의 직분을 맡게 되었는지 모를일이다.


예수 믿음이라는 부분은 헬라어의 격 (다섯개의) 중에서 여격이냐 소유격이냐를 두고 한때 재림교회의 석학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


결국은 예수믿음이라는 여격을 선택했지만 예수의 믿음이라는 소유격이 된다해도 그 의미는 상실이 되지 않는다.

다만 갑자기 하나님의 계명 (의문의 게명-그중에서도 안식일 계명)으로 둔갑하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다.


요한이 한 얘기이니 요한에게서 그 뜻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요한은 안식일 계명을 포함해서 의문의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이 어둠이라는 암시를 요한복음 1장에서 이미 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계시록에서 요한복음에서 어둠이라 불렀던 것을 복음 또는 빛이라고 다시 들고 나왔을리도 없는것이 아닌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있었던 언약 (가죽옷의 의미) 은 앞으로 예수에게 행하라고 주어진 아버지의 계명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가 달려있는 그 온전한 십자가를 우리는 언제나 쳐다 보아야 할 일이다.


온전한 믿음 속에 거하려면 예수의 그 믿음속에 함께 들어갸야 한다.

온전한 계명을 지키려면 예수의 그 믿음 안에 거해야 한다.

요한 계시록에서 어린양을 항상 따라다니는 무리들은 어느 특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예수믿음의 소유자 들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백번 동감하는 말이다.

그 행함은 오직 사랑의 행동 (십자가의 행동) 그것뿐이다.

그것으로 염소와 양의 무리를 나눌 것이니까.

(염소는 일요일 그리고 양은 토요일이라는 공식을 은근히 즐기는 자들이 있다면 바로 그가 염소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그것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우리가 이제 기쁘게 할 길이 없다(비록 안식일에 온갖 마음이 다 매달려 있다해도)


그것을 예수안에서 하지 않는 이단들이 있다면

썩 물러가거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특권이다.


다만 지킴의 주체가 죄인이 아니다.

지킴의 내용도 그런 율법이 아니다.


그러나 모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아!

주체가 죄인인 바리새인들아 썩 물러가거라.

꼴도 보기 싫다.

지긋지긋 하다.

다시는 그 꼬리조차도 보기 싫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율법을 지킬 능력을 주었다고

둘러대면서

오직 율법을 옹호하고 율법의 지킴을 옹호하기 위해서

십자가까지 팔아먹는 무리들아!


율법을 지킴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고

십자가 자체가 우리 성도의 삶과 죽음의 목적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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