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이란 창조의 주일에서 묘사되는 내용을 간접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 이룬 상태 또는 더할것이 없는 심히 좋았던 상태를 말하거나 그 상태에서 선언 되어지는 완전한 시간이고 그 상태와 시간이야 말로 하나님과 피조물이 함께 쉼을 누릴수 있는 가장 평안한 상태로 소개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안식 (Sabbath)을 이해한듯한 사도 요한이 두번에 걸쳐서 (요한복음 5장과 9장에서) 안식일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안식일 범법 행위가 이런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는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 이유를 이렇게 달았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쉬는 안식일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아들도
일을 해야 하는 인식일에 대한 갑작스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죄인이 지킬수 없는 율법의그것처럼 하나님은 율법에 포함된 안식일을 기억하여거룩히 지키고 모든
객이나 짐승까지 그리 하라는 육적인 계명 (안실일 신학)을 주셨다.
요한복음에서 하고자 하는 요한의 생각과 히브리서에서 “여호수아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하면서 안식과 안식일을 모세의 의문하고는 다르게 소개하는 두 신약성경의 저자들을 통해서 유추해 보면 안식이란 우리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고 안식일의 안식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로 접근해 볼 수가 있다.
우리는 해지는 저녁부터 다시 해지는 저녁까지 지키는 구약적 안식일 그것 자체가 율법의 요구
인것처럼 소중히 보듬고 살아왔지만 그 안식일 신학 을 모세에게 율법으로 주었던 율법의 시여자가 직접 이땅에 오셔서 그것을 율법적 안식일에서 복음적 안식일의 개념으로
전환시켰다는 사실을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안식일은 내 (예수)가주는 평안이나 치료가 없이 죗된 상태의 우리가 스스로 지켰다고
생각지도 말아라는 말이다.
그리고 안식일 신학은 시간에다 맞추어 졌지만 실상은 안식이라는 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삼십팔년이나 다섯행각
(모세의 오경아래) 아래서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지킬줄만 알았지 참
안식을 모르는 백성이라는 말이다. 그 상태가 자리를 들고 일어서서 다니지 못하는 상태이며 자리만 지키며 살아가는
모세의 군상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앉아 있는 불구의 안식일 (요 5장의 의미)에서
안식의 주인인 예수를 만나니 일어서게 되더라는 교훈이다.
날때부터 소경인 죄인들에게 예수가 함꼐하면 (요 9장의 의미)
환히 보게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 안식일의 올바른 기능이라는
말이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자들의 안식일!
앞을 보지도 못하는 소경들의 안식일!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도
그러한가?
이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려 하지 말고 예수를 만날 일이다.
만나서 일어서고 눈을 떠야 할 일이다.
안식일 신학속에는 사람이 안식일에 메여 있을 수 밖에 없으나
안식일 신앙속에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므로 그 메여있음에서 자유와 쉼을 누릴때 비로소 안식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히브리서에서 사도 바울도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히브리
4장의 내용이다.
그야말로 안식일이란 안식할 때 인것이다.
육신의 온갖걱정이 마음을 누르고 이웃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한
우리에게는 안식할 때가 아직은 아니고 장래에 남아있는 어느 날의 약속일 뿐이다.
그러나 대개 안식일 신학에 몰두한 자들은 귀막고 눈막고 마음도 막고 억지로 안식일의 시간으로
마치 혼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것처럼 경건의 왜식속으로 자신과 가족의 귀중한 영혼들을 쳐 박는다.
때로는 눈도 부라리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를 선언하시기 까지 예수는 안식일을 지킬 수도 없었고 지키지도
않으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똑같이 안식일에 쉬지 않으시고 아들과 함께
일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후에 처음으로 그분
(둘째 아담)은 영혼의 안식에 들어가셨다. 마치 창조가 끝이 나고 모든것이 심히 아름다워진 시간에 첫째 아담의 육신의 안식일이 시작하듯이 말이다
그날이 영적으로 복음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늘과 땅에서 완전한 쉼을 누리는 첫 안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그 안식을 추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완성) 안으로 들어 간 자는 자기일을 쉬고 이 영적 안식을 누린다는 약속이다.
이 안식을 지키지 못한자는 영생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자는 이 영적이요 복음적 안식에 동참하는 자이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해지는 저녁부터 해지는 저녁까지 지키는 안식일은 구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신학적 (몽학선생) 안식일이지만
예수의 안식은 뭇 영혼이 시간에 얽메이지 않고 지키는 신앙적인 영적 예배일 것이다.
언제나 일곱이라는 숫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숫자이다.
그래서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거늘 그 주인의 생각하고는 관계없이 왜 우리는
이리도 제 칠일에 집착하는가.
앉은뱅이 상태로 그리고 눈먼 상태로…
예수가 규례를 따라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일이나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던 일들이
신학하는 자들에겐 제칠일 안식일을 증거하신 일로 보일 것이고 신앙을 하는 자들에겐 그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요 인류 (죄인들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안식 그 자체라는 말로 읽게 될것이다.
창조주간에 주신 이 제칠일 안식일은 수난주간에 주신 영적 안식의 표상이요 몽학선생이었다는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개진해 본다.
다시말해서 모세의 안식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앉은자리 (육신)를 박차고 일어서게 못하였고
또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하지도 못하였지만
예수의 안식일 (치료하는 안식일-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안식일)은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것에서 일어서게 하고 영적인 세상을 보게 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 날은 우리모두의 영적인 첫 안식일이었다.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창조주간에 주신 이 제칠일 안식일은 수난주간에 주신 영적 안식의 표상이요 몽학선생이었다는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개진해 본다.
다시말해서 모세의 안식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앉은자리 (육신)를 박차고 일어서게 못하였고
또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하지도 못하였지만
예수의 안식일 (치료하는 안식일-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안식일)은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것에서 일어서게 하고 영적인 세상을 보게 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 날은 우리모두의 영적인 첫 안식일이었다.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그대의 영혼은
안식할 때를 기다리는가?
지금이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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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진하여지는 맛이 더욱 일품이다
존재와 소유처럼
시간속에 안식일을 공간의 세계로
소유속에 갇힌 안식일을 존재의 세계로
유대인의 ( 바리세인 ) 안식일을 예수님의 안식일로
형식적인 안식일을 십자가 감격의 안식일로
갇힘의 안식일을 열림의 안식일로
노예의 안식일을 자유인의 안식일로
병든 안식일을 치유의 안식일로
죽음의 안식일을 생명의 안식일로
그대의 애씀이 결코 허지는 아니리라고 믿는다
해지고 - 해지고 = 시간속에 갇혀버린 형식의 그 날이
진정 감동과 감격으로 감사가 충만한 은햬로운 날이기를
근심과 걱정의 날이 아니라
환희의 날이기를 소망함이 결코 허상은 아니리라
한 평생 안식일을 지키고 바라보고 누린 자로서
이젠 평안하고 아늑하고 달콤한 십자가의 안식일로 행진하리라
친구야 고마우이
더욱 정진하여라 펼쳐라 하늘 높이
개나리가 만발하여 대지를 노랗게 물들이는 아침에
너의 이 글이 누리를 온통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