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스님에 그 목사: 그대의 목사는?

by 김원일 posted Mar 29, 2014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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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3 / 사순절 셋째 주일

 

사순절에 기억해야 할 사람들 2

레위기 20:13 고린도전서 6:9-10

 

곽건용 목사

 

왜 사순절에 이들을 기억해야 할까?

 

2014년 사순절에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사람들로 ‘성소수자’를 택했습니다. 오늘 말고 앞으로 두 주일 더 ‘사순절에 기억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 얘기할 텐데 그 순서는 중요성과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준비한대로 순서를 정해서 얘기하는 것이니 순서에 비중을 두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성소수자,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의 첫 글자를 따서 ‘LGBT’라는 약자로 표현합니다. 이 가운데서 숫자로 보나 뭐로 보나 요즘 가장 크게 관심을 끄는 사람은 동성애자, 곧 게이와 레즈비언이므로 오늘 얘기는 여기에 국한시켜 해보겠습니다.

 

왜 우리가 사순절에 이들을 기억해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졌습니다. ‘우리는 왜 사순절에 동성애자들을 기억해야 하나?’ 제가 2-30년 전 사순절에 같은 주제로 설교했다면 성소수자들을 포함시켰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포함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성소수자 문제가 오늘처럼 첨예한 사회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는 빈곤과 착취, 억압의 문제이고 다른 문제들은 부수적인 문제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부수적인 문제에 몰두하는 것은 일종의 ‘사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빈곤과 억압, 착취의 문제가 가장 큰 사회적 문제인 것은 여전히 사실이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은 그 밖의 문제들도 이것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같이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성적인 불평등이나 성소수자 문제가 가진 자의 사치가 아니란 얘기입니다. 사실 성소수자 문제는 한 번에 다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문제지만 이것만 갖고 씨름할 수는 없으므로 오늘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어떤 사람이 학식이 높고 수행이 깊다고 유명한 한 큰스님을 찾아가서 자기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불교는 성소수자에 대해서 그나마 우호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대를 품고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스님은 이렇게 반응하더랍니다. “동물도 동성애를 하지 않는데 사람만 동성애를 한다. 이건 네 욕심의 문제이고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다. 네가 이성과 성관계를 가져보지 않아서 그게 주는 쾌락을 몰라서 그런 거니 이성과 성관계를 가져보라.” 스님이 이성과의 성관계가 주는 쾌감에 대해 얼마나 알아서 이렇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그는 이 말을 듣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후다닥 자리를 떴답니다. 그는 집에 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스님의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는 겁니다.

 

또 다른 사람은 신뢰하는 목사를 찾아가서 자기의 성정체성을 밝히고 어떻게 해야겠냐고 물었더니 목사는 “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창조질서에도 어긋나는 죄다. 네가 동성애가 죄라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교회에 나올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하지만 이 동성애자는 “나는 한 번도 여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 물론 여자와 사귀어보려고도 했고 결혼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사랑 없는 결혼을 해선 안 되지 않나. 나는 새벽마다 여성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나를 바꿔주시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동성애자 중 동성애자가 되기를 원해서 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동성애를 그만두기 위한 노력해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거다.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하는 수많은 동성애자들을 더 외롭고 괴롭게 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동성애자로 만드셨다.

 

성경 안팎에서의 논란

 

결국은 ‘성경’입니다. 모든 논란의 맨 밑바닥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고 있다.”는 겁니다. 최고의 권위를 갖는 성경이 금하는데 무슨 딴 말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동성애를 허용하거나 인정하는 구절이 한 군데도 없는 게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성경은 동성애를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늘 읽은 레위기와 고린도전서 말씀도 명백하게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0 13절은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것이다.”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6 9-10절은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구절들을 마음 단단히 작정하고 파고 들어가면 의미가 생각하는 것처럼 명확하진 않습니다. 동성애를 지칭하는 단어의 뜻이 그리 명백하지는 않다는 뜻이고 문맥에 따라서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동성애를 정죄하는 데 반대하는 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달리 해석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동성애를 옹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걸 권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성경 밖의 세상으로 나가보겠습니다. 성경은 동성애를 명백히 금지하는데 성경 밖의 세상은 어떨까요? 놀랍게도 성경 밖의 세상은 완전히 딴판입니다. 동성애는 이미 1973년에 미국 정신의학회가 발간하는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에서 삭제됐습니다. 동성애는 장애도 아니고 비정상도 아니며 질병은 더 더욱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서 보수기독교계는 동성애자들의 조직적인 운동과 심지어 협박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오랜 연구 끝에 동성애를 장애나 비정상으로 간주할 만한 어떤 과학적인 근거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한 동성애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하는 문제도 오랜 논쟁거리였습니다. 비록 성경이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라면 동성애를 비난하기 어려워지니까 말입니다. 이에 대해선 아직 확고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답니다. 제 생각에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문제가 단순히 과학이나 의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과학과 정치가 얽혀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투명하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 거란 말씀입니다. 하지만 현재 정신의학계와 심리학계 주류의 입장은 동성애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학계에서 ‘선천적’이라는 말을 쓰는 데 신중한 까닭은 과학이 사용하는 용어는 엄밀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용법에 따르면 동성애가 ‘선천적’이라고 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가급적 반대하는 쪽과 찬성하는 쪽의 입장을 공정하게 소개하고 싶은데 시간의 제약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것이 ‘신성한 혼인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부인한다는 겁니다. 성경이 남녀 간의 혼인을 신성한 것으로 보호하고 있는데 동성애는 거기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옳습니다. 성경은 혼인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성한 제도로 여기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남녀 간의 혼인을 신성한 제도로 여기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이 제정하셨으니까 신성하다고 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무슨 목적으로 남녀 간의 혼인 제도를 제정하셨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동성애 반대론자들은 이 이유는 따져 묻지 않고 그저 신성한 제도라고만 말합니다. 그저 하나님이 그렇게 제정했다는 말만 반복하지요. 왜 하나님은 혼인을 남녀 간의 결합으로 못 박았을까요? 그것은 종족보존과 번식 때문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이것이 사활을 건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첫 명령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첫째 명령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동성애 금지 계명은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성경의 명령에 따라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첫째, 왜 성경이 명하는 ‘그대로’ 행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이들이 성경을 따른다고 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동성애를 그냥 반대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동성애자를 ‘죽이라’고 명합니다. 오늘 읽은 레위기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이 명령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라면 그냥 반대만 하지 말고 동성애자들을 찾아다니며, 아니면 찾아다니기까지는 안 하더라도 만나는 족족 죽여야 하겠지요. 그냥 반대만 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둘째, 남녀 간의 혼인제도의 목적이 자녀 출산을 위한 것이므로 그것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개인이나 단체, 기업 등에 가서 항의하고 시위하고 결국 회사 문을 닫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임하면 안 되고, 피임기구 만드는 회사, 중절수술해 주는 의사 등등 모두에 반대해야 합니다. 사정이 이런데 왜 이들 보수주의자들의 목표가 얼마 안 되는 동성애여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셋째로, 동성애만 반대할 게 아니라 성경에 명하는 모든 계명을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과 똑같은 열심과 열정으로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동성애 금지 명령에만 목숨을 거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짐 윌리스 목사 얘기 하나만 인용하면 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짐 윌리스 목사가 하루는 너덜너덜해진 성경 한 권을 높이 쳐들어 교인들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너덜너덜한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에 관심을 갖고 도우라고 말씀하는 구절들을 모조리 오려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언급을 다 오려내고 나니 이렇게 손에 들고 있기 힘들 정도로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이 성경이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 기독교인의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고작 10번 이내로 언급된 동성애에 대해서 이렇듯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면 2천 번 이상 언급된 가난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미국 기독교인들은 모두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 주장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동성애를 금하는 성경구절을 몰라서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 관계상 더 말하지 못하지만 동성애를 금하는 성경구절들의 의미가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음은 지적해야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과연 이 말을 ‘동성애’로 번역하는 게 맞나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절들을 달리 해석하려는 시도가 왠지 구차하게 느껴진다는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과연 이렇게 한다고 해서 보수주의자의 생각이 달라질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럴듯한 유신론 백 개가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그럴듯한 무신론 백 개가 하나님 믿는 사람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 경우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하십니까? 저는 동성애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동성애 문제는 교회에서 하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얘기를 하고 있는 제 입장이 뭔지는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저는 동성애를 옹호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이 오해할지 모르지만 저는 동성애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든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든 저는 그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동성애에 대한 성경말씀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제게 동성애자는 성경이 금하는 짓을 하는 죄인이 아니라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주일 얘기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매 맞고 옷까지 빼앗겨 벌거벗고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 말입니다. 제게 동성애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로 이 사람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만일 동성애자 커플이 제게 결혼식 주례를 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해왔습니다. 제 입장은 그건 그때 가서, 실제로 그런 부탁을 받았을 때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그런 부탁을 받으면 주례 할 것입니다. 사회와 교계의 비난, 그까짓 거 무시하고 주례를 하겠습니다. 저는 자기 성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찾아온 동성애자에게 짐승은 동성애를 안 한다, 오직 사람만 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라고 결코 말하지 않겠습니다. 성경을 들어 그를 교회에서 내쫓는 만행은 더더욱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그 동안 얼마나 고민이 많았고 고통이 컸겠느냐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나의 호불호와 상관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메시지입니다. 오로지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느냐 하는 점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에서 주인공의 아버지인 장로교 목사는 둘째 아들을 잃고 나서 한 설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생의 한 번쯤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에 처한 걸 보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기꺼이 돕겠습니다. 주님!” 그러나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돕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무엇을 도와야 할지도 모르고 때로는 그들이 원하지도 않는 도움을 줍니다. 가족들 간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랑합니다.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이 말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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