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게임 <하나님의 거시기는 ...>, 곽목사님

by 아기자기 posted Apr 16, 2014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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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 건용 목사님의 새 책 <하나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를 읽고

책에서 문제 제시하신 몇 가지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봅니다.



<한국 엄마 같은 하나님>


한국의 엄마는 가마솥에 뜨거운 국을 팔팔 끊이다 외출하면서 집에 남겨져 있을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거 만지지마, 만지면 니네 죽는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한 ‘만지면 죽는다‘는 말의 의미는?

1) 아이들이 만지면 정말로 죽이겠다는 굳은 의지의 명령이다.

2) 아이들이 만지면 혹 뜨거워서 데이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엄마가 안전하게 줄 때까지 만지지 말라는 사랑의 당부 말이다.


설마 1)번이 엄마의 본심이라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성경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0


여호와가 사람들에게 한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는 말의 의미는?

1) 사람들이 여호와를 보면 정말로 죽이시겠다는 변치 않는 율법이다.

2) 사람들이 여호와를 보면 그 영광의 찬란함으로 눈이 멀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

허락을 받고 안전하게 보라는 사랑의 당부 말씀이다.


엄마의 말을 2)번이라 했다면 설마 하나님의 말씀을 1)번으로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도 한국적인 정서를 가지고 계신가 보다.

아니, 한국 사람들의 말투와 정서가 아직 하나님을 많이 닮았나보다!^^



<하나님의 거시기는 ...> 진실 게임


하워드 아일버그-슈바르츠의 <God's Phallus>는 접장님도 이 누리에서 2,3번 언급,

추천한 책이다. 곽건용 목사님도 이 책으로 그의 책의 ‘여는 글‘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신 이유나, 하나님의 등이나 팔 발등은 보아도 정면은

보거나 표현하지 못하게 하시고, 사람 또한 감히 표현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2)에서 예상한대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함 때문이라면 정면뿐 아니라

뒷모습과 팔도 마찬가지로 보거나 표현 하지도 말아야한다.


그래서 말 못할 다른 이유는 혹 하나님의 거시기를 보여 주지 않으려는 게 아닌가하는

어떤 불경스러운(?) 이의 그럴 듯한 생각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왜 하나님은 혹은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면 즉 거시기를 표현하지 못했을까하는 불경한 생각을 해본다.


가설 1. 하나님의 거시기를 보니 남성이었다. 

그래서 그걸 사실대로 감히 표현하기가 불경스러워서 못하고 ‘여호와’를 문법적으로만 남성으로 표현했다.


가설 2. ‘여호와’가 히브리어 문법으로 남성이라 그럴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이럴 수가!

하나님의 거시기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감히 다시 보려고도 남에게 발설할 수도 없었다.

또한 하나님이 여성이라 밝혀지면 이제까지 누려왔던 남성들의 우위적 지위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기에 절대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 하나님‘이라니!

아마 이 사실이 당시에 밝혀졌더라면 여성차별이 수 천 년 전부터 없어졌을 것이다.


가설 3. 하나님의 정면을 보고, 놀라 자빠져서 죽을 뻔 했다.

‘양성‘ 이었다.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양성 평등의 하나님! 이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남성들의 기득권을 빼앗기고

남녀평등이 이루어지는 정도의 충격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성정체성의 혼란은 물론 도덕적 기반이 흔들릴 것이다.

동성애자들까지 정죄하지 못하고 허용해야하는 일이

당시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그래서 이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지켜야 할 비밀이었다.

누가 감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양성애자)라고 말하겠는가.

누가 감히 벌거벗은 임금님의 모습을 발설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 이 사실이 당대에 밝혀졌더라면 성 소수자 차별과 정죄도 성경에는 없었을 것이다.


3번에 한 표 던지면 너무 불경스러운 것인가!?



<시멘트에 갇힌 하나님> 신의 노마디즘


광야의 성막은 하나님의 의지대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인도하셨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을 인간의 건물 속에 감금하고

필요할 때만 찾는 알라딘의 램프의 노예 지니로 만들었다.


지금의 하나님도 바로 교회나 성당의 건물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잘들 아시는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와

안병무의 <시멘트에 갇힌 예수>-“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1986, 한길사

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연극 <금관의 예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어느 동네 어귀에 예수님께서 서 있는 조각물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금관을 쓰고 있는 왕의 형상이었다.

그런데 추운 겨울에 거지 부부가 매일 그 조각물 앞에서

신세 한탄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이야기 이다.


세상 저주하고 욕하고, 별의 별 한탄하다가, 여자가 아이디어를 낸다.

"어차피 굶어 죽는 바에는 예수님 왕관을 훔쳐 팔아서 살고 보자!

예수님에게 할 짓이 아닌 것은 알지만, 지옥가게 되더라도, 아! 어쩔 수 없어!" 라고 하는데,

남편이 반대하는데, 결국은 둘이서 예수님의 금빛 왕관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그러고 있는 중에, 예수님 형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본다.

예수님이 눈을 뜨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시는 말이 "너희가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구나 고맙다.

그동안 이 금관에 갇혀서 긴 세월을 보냈는데... 고맙다."


금관을 쓰고 큰 교회당에 갇혀 있는 하나님은 부자와 성직자들의 우상일 뿐이다.

가난한 자들과 이방인과 죄인들을 위해

시멘트의 교회와 성당 건물에 갇힌 하나님을 해방 시켜라.


거지가 묻는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저희들에게 올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예수의 말은 다음과 같다.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 같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핍박받으면서도 어진 사람들이 아니면 안 된다.

네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였다.

네가 나를 해방시켰다.

자,

가까이 오너라.

가까이 와.“


“네가 내 입을 열게 했듯이 내 몸을 자유롭게 하라.

내 몸에서 시멘트를 벗겨내라.

내 머리 위에는 가시관으로 족하리라.

내겐 금이 필요없고,

금은 네게 필요하다.

금을 가져다 네 벗들과 함께 나누어라.“


그러자 이때 지나갔던 배 큰 신부,

사장,

경찰 등이 다시 나타나서

그 금관을 뺐아 예수의 머리 위에 다시 씌우고

그 거지를 절도범으로 잡아간다.

이로써 그 시멘트의 예수는 다시 이전처럼 표정도 없고

말 못하는 한갓 시멘트덩어리가 되고 만다.-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안병무, 1986, 한길사


“성전과 백성 중에, 형상과 이름 속에, 초월성과 내재성의 경계에서”

시멘트에 갇힌 “금관의 예수”를 해방시키는 ‘神의 노마디즘’은 ‘역설의 신학’이다.



<가출한 하나님 귀가시키기>


하나님이 집(교회, 성당)에서 나간 이유는 소나 양, 헌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집나간 며느리를 돌아오게 하는 것은 ‘굴비’ 굽는 냄새이고,

집나간 하나님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자비’ 베푸는 향내이다.


하나님은 소, 양의 고기나, 돈 냄새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정의와 자비의 향을 좋아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그런 하나님과 같이 먹고 자고 동행 동거 공감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결혼이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교회나 성당에 다니고

성경 읽고 기도한다는 것이 다가 아니라,

굶주리고 목마르고 아프고 갇힌 자를 돌보는 것이다.



<구걸하는 하나님> 간구하시는 성령


옛말 중에 틀린말이 있다.

사람이 ‘지성이면 감천’(하늘이 감동)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지성이면 감인’(사람이 감동)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찾는 하나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참조.


하나님을 물질적인 존재로 보는 이스라엘의 인식은

“유대적 세계관은 (영혼과 육), 하늘과 땅이 분명 객체로 존재하며 

분리되지 않고 현재에 섞여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은 저 멀리 ‘하늘’에서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현존이다.“는 톰 라이트(<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의 관점과도 같겠다.



주) 읽으면서 나름 적어 논 제 생각을 스포일이 될 것 같아 이제 올립니다.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곽 목사님 책 <하나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곽목사님 감사합니다!


꼭들 읽어 보시기를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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