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따라하기와 예수 따라가기

by fallbaram posted May 02, 2014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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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내 삶속에서 그리고 내 생각속에서 일어나는 육신적인 가난 (유혹에 넘어지는 현상)이 극심하여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지난 주말에는 "예수 학교"라는 명제로 한 장노님이 오셔서 "예수의 생애를 듣고 보고 따라하기" 라는 말을 전하면서 시대의 소망을 읽고 외우고 그대로 따라하기를 희망했다.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 분은 진정 예수에게 온 생애를 바친 사람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이미 가장 어려운 선교지에서 가족과 자신의 생애를 다 바친 사람이다.

그것도 20년이 가깝게...


그런분에게 느닷없이 이건 아닙니다 라는 내 나름의 성경적 이론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듯한 나의

궁색한 싦을 두고 생각하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부분의 이야기는 과연 우리가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따라 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부분이다.

내가 평생 하고 있는 일은 사람의 인체의 한 부분을 재생 (피는 통하지 않지만) 하는 것인데  원래의 그것과 가장 가깝게 만들어서

끼우는 것이다. 


비슷하게 만드는 것과 똑같이 만드는것의 차이는 실상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다고 할까.

"예수의 생애를 재현한 그 글을 읽고 그 분의 음성을 재현한듯한 내용을 들으며 그대로 따라한다"는 의미와

"그 분의 말씀을 읽고 듣고 감동하여 그 분을 따라간다" 라는 의미 사이도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남은 무리는 "따라하는 자" 들인가 아니면 "따라가는 자"들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만을 위한 분이신가?  아니면 우리의 모본이신가 라는 질문앞에 서는 것이다.

칭의의 한계와 성화의 한계는 어디에서 선을 그어야 한다는 말인가?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은 율법은 지키기 위해 주신것이다 라고 매우 원시적인 자세를 고수 하지만 그것에 한계를 느끼는

좀 깨어있는듯한 무리들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율법을 지키는 자리에

우리가 설 수 있다고 역설을 하고 있다.


율법의 영적 내용을 지켜야만 (마음으로 음욕을 품지 아니하는 경지) 한다는 율법의 궁극적 요구가 우리앞에 살아있는 남편처럼 그 요구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필시 100 퍼센트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 땅에서 우리는 백퍼센트 영적인 변화를  체험해야 하는것이다.

  1. 결혼여자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풀려납니다.
  2.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여자는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남자에게로 갈지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간음중에 잡힌 여인에게 너를 송사할 그 남편이 없다라고 한다. 그 남편이 죽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남편인 복음(예수자신)도  너를 정죄할 의도가 없다고 말 하고 있다.


바로 이 싯점이 시작인가 아니면 마침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이것이 마침이 아니고 시작이라면 어디까지가 마침이 되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그 마침은 따라하는것인가 아니면 따라가는 것인가의 질문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구속을 받은자의 삶에는 구속을 베푼자에게 돌려 주어야 할 증인으로서의  속성이 있어 보인다.

그 증인의 속성이 백퍼센트 그 분의 은혜라는것을 우리의 심중에 역사하는 믿음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아님 행함이 함께 하는 증명인가?


만약에 믿는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그들이 전하는 바가 이 증인의 속성 (따라하기)을 포함하는 것인가?

아니면 믿고 구원을 얻는 전적으로 은혜로 되어진 칭의 (따라가기)의 차원에 머무는 것인가?


더러 도중에 오락가락하는 말씀의 전개도 있었지만 그가 육신의 온갖 유혹을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온갖것을 바치고

살아간다는 의미메서 얼마나 보기가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까지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나름 많은 생각과 번민을 갖게 되었다.


이 문제를 놓고 내 나름의 생각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이번 기회에 칭의 와 성화 라는 주제로 보아도 좋고

"예수 따라하기" 와 "예수 따라가기" 라는 쪽으로도 좋으니

민초의 많은 생각들을 들어보고 싶어진다.


사단은 언제나 광야에서 따라하라는 쪽 (율법의 요구)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예수(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따라오라 는 쪽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는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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