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신은 세월호의 희생자들과 함께 수장되었다--어느 목사의 고백

by 김원일 posted May 02, 2014 Likes 0 Repli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4 4 27 / 부활절 후 첫째 주일

 

침묵할 때가 아니라 소리 지를 때다!

누가 13:1-5

 

곽건용 목사

 

암흑 같았던 지난 열하루

 

4 16일부터 오늘까지 열하루는 암흑이었습니다. 세월호에 갇혀 속절없이 죽어간 사람들에게만 암흑이 아니라 바깥에서 매일 뜨고 지는 해와 밤을 밝히는 달과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지난 열하루는 캄캄한 암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루 이틀 지내고 구조작업이 엉망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걸 보면서 ‘세상에 이런 멍청이들이 있나.... 이런 자들에게 구조작업을 맡길 수 있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조작업이 엉망인 게 그들에게 뭔가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사람 생명 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나 보다, 그게 돈이 됐든 뭐가 됐든 사람 생명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으니 저러는구나 싶으니까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악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사람은 정말 한없이 악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치를 떨었습니다.

 

사람이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나오는 자연스런 반응은 이런 참사를 빚은 책임자에 대한 울분과 분노, 그리고 울부짖는 외침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열하루 동안 국내외에 사는 우리 겨레는 온통 울음바다였습니다. 눈물이 많은 사람은 말할 것 없고 평소에 눈물을 보이지 않던 사람도 이번만은 울음을 억제하지 못하더군요.

 

그런데 이 와중에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최고책임 당사자인지도 모르고 책임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서 엄벌하겠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울부짖는 가족들을 두고 ‘미개하다’고 조롱한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이 사건을 종북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떠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상식을 믿어서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진 침묵하며 기다리자는 사람들과 이 사건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으니 함부로 사람을 정죄하지 말자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침묵하고 균형을 유지하자고? 아니, 분노하겠다!

 

온 겨레가 눈물바다인데 침묵하고 균형을 유지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다음에 화를 내도 내고 울분을 터뜨려도 터뜨리라는 겁니다. 이들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라고 합니다. 침묵과 성찰, 균형과 평정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내 얼굴을 비춰볼 수 있는 잔잔한 호수가 아닙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평정이 절로 유지되고 균형이 잡히는 그런 곳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TV가 별로 보급되지 않아서 라디오가 주된 매체였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라디오를 많이 듣고 자랐는데 제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라디오 연속방송은 <격동 20>이란 프로그램입니다. 해방 전후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한국 정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여러 명의 성우들이 입체적으로 낭독하는 방송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기억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제 기억에는 이 프로그램의 첫 제목이 <격동 20>이었는데 그 후 이것이 <격동 30> <격동 40> <격동 50>으로 숫자만 바꾸더군요. 아마 지금껏 방송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한국사회는 지난 40년 동안 내내 ‘격동기’였다는 얘기입니다. 이번에 세월호가 침몰한 맹골도 앞바다처럼 조류가 세고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였던 겁니다. 이번 참사에서 초기 탈출자 외에는 생존자를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이유가 물살이 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맹골도 앞바다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파도가 엄청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침묵하라는 말은 곧 거센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물살이 거센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물살에 휩쓸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균형을 잃지 말라고 하는데 누군가가 저울을 조작해놨다면 균형을 잡고 있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균형을 잡고 있는 게 아니지요. 고장이 난 저울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 균형은 사실 균형이 아닌 것이지요. 그 말은 곧 저울을 조작해놓은 범죄자를 도와주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해야 하고 욕을 해야 할 때는 욕해야 하며 울어야 할 때는 소리 내서 울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우는 자와 함께 울라!” 하지 않았습니까. 침몰 열흘이 지난 어제 한 엄마가 세월호가 가라앉은 바다를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는 아이에게 “딸아, 그만 버티고 가거라. 살아 있어도 구해줄 것 같지 않아. 그만 가서 쉬어. 깜깜한 데서 춥고 배고프잖아. 엄마가 곧 따라가서 안아줄게.”라고 조용히 울부짖더란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듣고도 울음이 터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에 있는 힘을 다해 분노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시며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셨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이놈들아, 너희는 천하보다 귀중한 어린 생명들을 너희들은 하찮은 돈과 바꿔 먹었다!”고 외치면서 분노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분노를 표시해야 합니다. 말을 하든지 글을 쓰든지 이메일을 보내든지 정부기관에 항의하든지, 어떤 방법으로든 분노를 표현하십시오. 그래서 책임자들에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을 알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비록 우린 태평양 너머에 살고 있어서 몸으로 같이 하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기도로써, 그리고 분노함으로써 같이 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럴 때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분노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분노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터질 때 엄청난 에너지도 같이 폭발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껏 기억합니다. 경찰에 끌려간 박종철 군이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경찰이 발표했을 때 국민이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말입니다. 그 힘이 결국 전두환 독재를 끝장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분노에 사랑이 없다면 그렇게 폭발한 에너지가 엉뚱한 곳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터져 나오는 분노의 에너지에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분노에 올바른 방향을 잡아줍니다. 저는 사랑으로 방향을 제대로 잡은 분노의 에너지가 이번 참사를 계기로 해서 한국사회를 뿌리에서부터 바꾸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들 죄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회개하라.

 

그 다음으로 이 와중에 허튼 짓을 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 선두에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신교 목사들이 있습니다. 제가 과문해서인지 이번에는 쓰나미나 카트리나 때처럼 이 참사가 회교도나 동성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식의 허튼소리를 하는 정신 나간 목사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긴 남의 나라 일이 아니라 자기나라 일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상황이 워낙 엄중하니까 그렇게 말했다가 몰매 맞을 것 같아서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좌우간 이런 참사에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그 어떤 신비한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으므로 함부로 부화뇌동하지도 말고 사람 탓도 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갖다 쓰는 성경구절이 오늘 읽은 누가복음 13 1-5절의 말씀입니다. 복음서에서 이 구절만큼 오해되는 구절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오해의 결과가 이보다 더 치명적인 것도 없을 겁니다.

 

빌라도는 널리 알려진 폭군입니다. 그가 제물을 바치려 성전에 온 몇 명의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에 섞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잔인한 살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에게 제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죽인 것도 천인공노할 일인데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었다는 건 유대인의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니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동족을 살해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욕했으니 말입니다. 유대인들 간에는 왜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 이게 누구의 죄 때문이냐가 논쟁의 초점이었을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사람들이 당한 변이 그들 죄 때문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면 물론 그들도 죄인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지어서 그런 변을 당한 것은 아니니 그들이 당한 참변은 그들의 죄와는 무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왜 ‘회개’라는 말이 나옵니까? 죄 때문이 아니라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갈릴리 사람들도 죄인이지만 너희보다 더 큰 죄를 졌기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죄 때문임은 사실이다. 너희도 그들 못지않은 죄인이니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처럼 죽을 수 있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건 엄청난 왜곡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단한 신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선입견 없이 그저 상식 수준에서 읽어도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관건은 ‘회개’가 뭘 뜻하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회개는 개인이 지은 죄에 대한 회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들이 참변을 당한 것은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아니란 겁니다. 그러면 뭡니까? 그들을 죽인 건 빌라도 아닙니까. 하나님이 죽인 게 아니라 빌라도가 죽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청중이 해야 할 회개는 개인적인 회개가 아니라 사회적인 회개, 공동체적인 회개입니다. 곧 빌라도가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놓은 데 대한 회개 말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리인들을 죽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단순히 그가 폭군이어서도 아니고 순간적으로 객기를 부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치밀한 의도를 갖고 의도적으로 그들을 죽였거나 자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런 일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그런 점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으면’이란 말은 ‘빌라도가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면’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점을 확인해주는 얘기가 다음에 이어지는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고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웬일인지 탑이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거기 깔려서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에서도 죄 타령이었을 겁니다. 그들이 남들보다 더 큰 죄를 져서 죽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죄를 져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희생자가 된 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럼 우연이었을까요? 그들이 남들보다 더 재수가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회개’는 탑에 깔려죽은 사람이 지은 개인적인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말은 탑을 그렇게 엉터리로 건설한 사람들의 죄, 그걸 묵과한 사람들의 죄, 그리고 거기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이런 말이 낯선 분도 있을 겁니다. 그 까닭은, 그 동안 교회에서 죄와 회개를 전적으로 개인의 차원의 일로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개인의 차원과 공동체의 차원이 있듯이 죄와 회개 또한 두 가지 차원이 다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쏟아낸 쓰레기 청소부가 아니다!

 

회개는 뭔가를 바꾸는 겁니다. 회개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꾸는 것을 가리킵니다. 특히 공동체적으로 회개는 공동체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바꾸는 겁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가 저지른 죄의 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죄의 경중과 책임의 정도는 다 다릅니다. 일차적으로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 책임을 나눠가지는 게 맞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그저 눈물 좀 흘리고 “내가 죄인입니다!”고 울부짖고 가슴 쥐어뜯는 걸로 끝나선 안 됩니다. 회개는 나의 죄로 인해 발생한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짊어지는 걸 뜻합니다. 회개랍시고 한다면서 그 책임은 몽땅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회개가 아니고 ‘발뺌’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침묵하고 골방에 들어가서 참회하고 기도할 때라고 하는 일부 목사들의 말은 매우 신앙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대단히 비신앙적인 말이고 매우 정치적인 발언입니다. 자기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말입니다. 우리 모두 회개해야 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회개는 골방에 들어가 가슴을 쥐어뜯는 회개가 아니라 책임을 물을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묻고 또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을 짊어지는 겁니다.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에게 엄중하게 책임을 묻고 나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지는 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회개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모르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는 신이란 겁니다.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당신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서 다스리신다는 게 곧 ‘섭리신앙’입니다.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게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세상을 당신의 계획과 의도대로 섭리하신다고 믿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다 좋은데 여기서 덧붙여야 할 새로운 ‘신앙고백’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 역시 전지전능하고 자기들의 의도와 계획대로 세상을 만들어나간다는 고백입니다.

 

사람이 아는 게 적고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었을 때는 하나님이 엄청나게 대단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른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예가 좀 그렇긴 하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한꺼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숫자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고작해야 수백, 수천 명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였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이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해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사람은 이 지구를 수십 번, 수백 번 날려버릴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달에 간 것은 오래 전 일이고 그보다 더 먼 우주 저 곳을 향해서 우주선을 날려 보냅니다. 지식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 사람은 굳이 몰라도 되는 것까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면 틀린 말일까요? 제가 하려는 말은 오늘날 사람은 하나님이 하셨던 일까지 다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수천, 수만 톤의 배를 물 위에 띄웁니다. 그 무거운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대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뭘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참사를 두고 하나님을 찾는 겁니까? 왜 하나님께 “오, 하나님,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저 순진한 어린 학생들이 죽어야 하나요?”라고 묻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자기들이 참변을 저질러 놓고서는, 자기들이 배를 그따위로 불법개조하고 과적하고 안전하지 않게 만들어 놓고서는, 구조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발로 걷어차 버리고서는 왜 아쉬울 때는 하나님을 부르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싸질러놓은 쓰레기나 치우는 청소부입니까? 그래서 제게는 이런 상황에서 “오, 하나님, 대체 왜....”라는 기도는 신앙적인 기도로 들리지 않습니다. 왜는 왜입니까, 사람의 탐욕이 이런 재난을 만들어내고서는! 정말 그걸 몰라서 “왜? 대체 왜?”라고 기도하는 걸까요? 제게는 하나님을 편들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맞서면 사람 편을 드는 게 목사의 일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건 아닙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사람들과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이 그들 죄 때문이 아니라고 하시고선 회개하라 하셨지요. 이건 하나님이 관여하신 일도 아니고 따라서 책임지셔야 할 일도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은 사람의 지식과 능력이 커질수록 작아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점점 전지전능해져 가는데 하나님은 반대로 점점 무력해지는 게 아닌가 말입니다.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은 반비례하는 게 아닐까요? 다만 사람은 커져만 가는 지식과 능력에 비해서 지혜와 책임은 자라지 않는 불균형의 상태에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네 신앙은 현실세계를 제대로 반영해야 하고 그 변화와 발 맞춰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지는 신앙’입니다. 내가 만든 쓰레기는 내가 치우겠다는 게 바로 책임신앙입니다. 저는 초월적 유신론을 믿지 않습니다. 비록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할지라도(대체로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동떨어진 저 머나먼 초월의 세계에서 원격조종기로 세상일을 좌지우지하신다는 초월적 유신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신학이고 현실세계와 맞지도 않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세월호의 희생자들과 함께 수장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거기서 빠져나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려면 사랑하는 자녀들을 버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무력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정도로 무력한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을 포기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택하신 분입니다. 모든 걸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사람들의 만행을 막지 못하고 무력하게 그 만행의 피해자들과 함께 수장 당하신 하나님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무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많이 울고 많이 분노하며 지내십시오.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의 분노를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더불어 분노하고 함께 우는 사람들과 어떤 모양으로든 연대하십시오. 눈물과 분노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노란 색상 배경은 퍼온이의 것.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