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월호가 45도 정도 기울었을 때 한 단원고 학생이 선실 복도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위치를 어른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 학생은 결국 구조됐다. (2) 세월호가 기울면서 자판기 등이 넘어져 있다. (3) 선실을 빠져나온 단원고 학생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4) 어른들이 소방호스를 선실 쪽으로 던져 학생들을 갑판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5) 단원고 학생 한명이 갑판의 난간을 붙잡고 위태롭게 서 있다.(6) 출동한 해양경찰 구조대가 선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른들이 학생들을 구하는 모습을 바깥에서 지켜보는 모습. 앞은 김홍경씨 얼굴. (7) 단원고 학생 한명이 갑판 바닥을 붙잡고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이 학생은 세월호와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되다가 수면 위로 떠올라 목숨을 건졌다. (8) 해양경찰 헬기가 출동해 갑판 위의 승객들을 구조하는 모습. 사진 김홍경씨 제공 |
“구조 요청하던 4층의 100명…60명은 못 구해 김씨는 지난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야 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간신히 회복한 뒤 제주도에 새 직장을 잡았다. 새로 생기는 대규모 빌라촌의 배관 설계를 도맡게 되어 김씨는 기뻤다. 4월15일 밤 인천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세월호를 탔다. 공사 현장에서 쓸 승합차를 갖고 가야 해서 비행기 대신 배편을 이용했다. 이날 안개가 많이 끼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16일부터 근무를 해야 해서 그는 배가 무사히 출항하기만을 바랐다. “원래 15일 저녁 6시30분 출항할 예정인데 안개 때문에 언제 출항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밤 11시까지만 기다려보자며 대기하고 있었는데 밤 9시30분에 출항을 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지요.” ‘쏴아’ 소리와 함께 세월호가 인천 앞바다를 가르며 움직였다. 갑판으로 나간 김씨는 밤바다의 바람을 온몸으로 받았다. 반짝이는 인천대교가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오랜만에 얻게 된 새 직장에 내일부터 출근한다는 설렘이 김씨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선실 안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선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던 아이들이었어요. 바닥을 뒹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하마터면 안개 때문에 출항을 못할 뻔했는데 수학여행을 예정대로 가게 됐으니 아이들이 무척 기뻐했어요. 그런 아이들이 다음날 찍소리도 못 내고 죽었으니….” 김씨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객실만 5층 규모이고 높이 30m, 길이 146m에 이르는 여객선이 침몰할 거라고는 김씨도 학생들도 상상하지 못했다. 기자는 지난해 가을 세월호를 타고 제주에 간 적이 있다. 당시에도 비상시 탈출 방법과 구명조끼 안내 등을 받은 적이 없다. 배는 다소 낡아 보였지만 대형 여객선이니 어련히 안전점검 과정을 거치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청해진해운은 안전불감증에 걸린 회사였어요. 1년에 직원 안전교육비가 54만원이라고 보도에 나오더군요. 그러니 비상시 대처요령이 그랬던 것이죠.” 김씨가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4월15일 이른 밤에 5층 객실(침대칸)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의 방은 배의 오른쪽에 있었다. 부웅거리는 엔진 소리에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6시30분에 눈을 떴다. 객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아침 7시30분 ‘아침식사를 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침 식사는 8시30분까지 제공됐다. 김씨가 식사를 마친 것으로 기억하는 시각은 7시55분께다. “아침을 먹고 갑판 산책을 잠깐 한 뒤 제 방으로 돌아왔어요. 정확한 시간은 기억 안 나는데 8시30분이 좀 지났을 때였어요. (해경 발표 세월호 사고 시각은 오전 8시48분) 배가 갑자기 왼쪽으로 기울면서 쿵 하는 소리가 났어요. 배가 (왼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었어요. 그 상태로 15분 정도 지속되더군요. 처음에는 사고인지 몰랐어요. 그냥 거센 파도 같은 것을 만났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요. 어떤 안내방송도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도 (9시3분께) 배가 점점 더 기울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더군요. 세번 나왔어요. 배가 더 기울어 45도까지 기울었어요. 그 상태로 40분 정도 유지됐어요. 만약 그때 해경이 투입됐더라면 더 많은 학생들을 구했을 텐데….” -가만있으라는 방송이 나왔는데 밖으로 나온 이유는 뭔가요? “처음에 저는 죽을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다못해 바다에 뛰어들면 어떻게 되겠거니 했어요. 그런데 배가 15도 기운 상태로 가만있는 게 아니고 45도까지 기우는 거예요. 사고라는 직감이 들었어요. 더이상 가만있어선 안 될 것 같아 바깥 상황을 파악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바로 선장이 승객들에게 객실 밖으로 나오라고 했어야 했어요. 그러면 수십명은 더 구했을 텐데. 해양경찰 구조선이 곧 도착한다는 방송만 나왔어요.” -나오니까 어떤 상태던가요? “다행히 제 5층 (선미 쪽) 객실은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에 배가 왼쪽으로 기운 상태가 되니까 저는 수면으로부터 가장 위쪽에 있게 된 거예요. 바깥으로 탈출하기 좋은 위치였지요. 탈출을 하려고 복도를 걷는데 ‘아저씨, 아저씨’ 하고 (단원고) 애들이 애절하게 부르는 거예요. 순간 아래를 보니 아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배가 기우니까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서 앉아 있었던 거죠. 눈동자가 마주쳤는데 아이들 첫마디가 ‘여기 학생들 많아요. 도와주세요’였어요. 겁에 질려 있었어요. 엉엉 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구명조끼는 끈을 단단하게 묶어야 하는데 그냥 걸치고만 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끈을 잘 묶으라고 말도 해주고…. 내가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생들은 몇명이나 있었나요? “4층에만 100명 정도 있었어요. 내가 왔다갔다 하면서 40여명 정도를 구했으니 나머지 60여명은 못 구한 거죠.”
(9)선실 안에 물이 차 올라오는 모습. 2번 사진 속에 있던 자판기가 물에 둥둥 떠올랐다. 김씨는 선실 안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10) 90도로 기울어버린 세월호. (11) 180도로 뒤집혀 바닷속으로 사라져가는 세월호. 사진 김홍경씨 제공 |
“탈출을 하려고 복도를 걷는데
애들이 애절히 부르는 거예요.
눈동자가 마주쳤는데 첫마디가
‘학생들 많아요, 도와주세요’
겁에 질려 우는 애들도 있었고”
“공사 현장에서 일해온 덕분에
평소 안전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극한 상황을 평소에도 생각했죠
어려운 상황 처해도 차분히
행동하는 게 성격이기도 하고”
배 안에서 커피 팔던 밝은 표정의 박지영씨 -아이들을 구하고 계실 때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도망친 후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나요?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탈출했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괘씸했어요. 그런데 선장도 1년 계약 비정규직으로 270만원 월급 받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일을 할 때 그 사람이 보람과 긍지를 가지려면 그만한 처우를 해줘야 해요. 의무감만 요구할 게 아니라 긍지를 갖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사원으로서 적절한 예우를 받아야 책임감이 생기는 것이죠. 청해진해운이 선원과 선장의 처우나 복지에 더 신경을 썼어야 해요.” -고 박지영씨 같은 승무원 9명은 사망하거나 실종됐습니다.(세월호 총 승무원은 29명. 아르바이트생 4명은 승무원 명단에서 누락됐다가 나중에 발견됐다.) “박지영씨가 아이들에게 구명조끼 양보하다가 죽은 승무원이죠? 그 사람 기억나요. 사고 당일 아침에 배에서 봤어요. 배 안에서 커피 팔고 있었어요. 식사 배급 때는 그분이 밥도 퍼주고 온갖 잡일은 다 하더군요. 그런데도 표정이 참 밝았어요. 누리꾼들이 의사자 지정해달라고 하는 것 같던데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배에 실은 승합차는 어떻게 되었나요? “바닷속에 다 잠겼지요. 배상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그걸 요구할 때는 아닌 것 같아서….” -배가 뒤집히고 나서는 생존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국민들은 구조 시스템이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인지 답답해하는데요. “저는 생존자가 더 나올 수 없을 거라고 봤어요. 배 안에 물이 어떻게 차오르는지를 본 사람이거든요. 에어포켓 얘기가 나오던데 그것은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하는 말이에요. 우리나라 해상 재난 구조 시스템은 정말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고 초기 미숙한 대응이 결정적으로 재난을 키웠어요. 승무원들이 승객을 제대로 대피시키지도 못했고, 해경 구조대는 출동해 놓고 배에 진입도 못 했고. 우리나라가 겨우 이 정도였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구조 시스템만 제대로 갖춰져 있었으면 50~60명은 더 구했을 거라고 봅니다.” -재난이 닥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충고 좀 해주세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지만 절대 흥분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면 됩니다.” -이번에 아이들은 차분하게 행동했는데요. “그러게요. 어른들이 참 할 말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지요.” 영웅으로 비칠까 부담…악플에 가족들 상처도 김씨는 언론 인터뷰 뒤 자신이 영웅처럼 그려질까 부담스러워했다. 언론이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김씨가 방송사에 건넨 영상에는 김씨의 얼굴 모습이 일부 찍혔다. 가끔 김씨가 웃는 듯한 모습도 영상에 담겼다. 그대로 방송을 탔다. 일부 누리꾼은 “사고 당시에 웃는 사람이 어디 있냐. 저런 사람이 어떻게 영웅이냐”고 악성 댓글을 달았다. 김씨와 그의 가족들은 상처를 받았다. 김씨는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너무 황당하고, 내 인생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악성 댓글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해봤다. 더이상의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다가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에 대해 초기 해경 구조대원의 어설픈 대응을 알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인터뷰 도중 커피숍 주인은 김씨의 얼굴을 알아보고 김씨에게 오렌지주스를 무료로 가져다주었다. 커피숍 주인은 “김씨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우리나라가 유지되는 것 같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인터뷰는 밤 10시가 넘어 끝났다. 김씨가 인근의 숙소로 돌아가야 해서 택시비를 챙겨주겠다고 기자는 말했다. 기자가 커피값을 계산하는 사이 김씨는 먼저 커피숍을 나가 바로 사라졌다. 김씨에게 전화를 걸자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냥 올바른 보도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서귀포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제법 찼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