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모진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그의 죽음 앞에서는 함께 슬퍼하고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것이 우리 사회의 미덕이다. 하물며 세월호 참사로 어이없이 희생된 억울한 피해자들과 유가족들 앞에서야 오죽하랴. 세월호 사고 이후 우리 국민들은 계획했던 행사를 취소하고 생계를 위한 영리행위도 잠시 중단하는 등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눴다. 그것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일 터이다. 

그런데 전 국민이 비탄에 잠겨 있는 이 상황에서 특정 집단의 이속을 챙기기 위해 국민의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후안무치한 정치적 도발을 한 무리가 있었으니 이 행위의 배경을 정상적인 사고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지난 8일 새누리당은 현행 2500원에서 4000원으로 올린 KBS수신료 인상안을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단독으로 기습 상정했다. 과거 우리의 의정사에서 신물 나게 보아왔던 날치기가 재발한 것이다. 날치기는 남의 물건을 잽싸게 채서 달아나는 도둑질이다. 실제로 수신료를 지불해야 할 국민들은 여야 합의는커녕 최소한의 논의과정도 없이 수신료 인상안을 도둑맞았다. 새누리당 한선교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총대를 멨는데 그가 어떤 생각과 명분으로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처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혹자는 겨우 1500원 올리는데 ‘후안무치’니 ‘천인공노’니 하는 수식어를 갔다 붙이는 것이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우선 이번 KBS수신료 인상안 날치기 상정은 온 국민이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는 시점에 저질러졌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며, 대형 참사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어 수신료 문제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틈을 역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비열함과 교활함이 새삼 개탄스럽다. 

  
지난 9일 오후 열린 수신료 인상안 날치기 상정 규탄기자회견에 참석한 언론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언론노보 이기범 기자
 

이번 세월호 사고를 대형 참사로 키우는데 언론의 책임이 작지 않으며 그런 차원에서 그 중심에 있는 국가재난주관방송사 KBS의 사회적 책임은 결코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KBS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싸늘한 정서는 지난 6일에 있었던 KBS내 젊은 기자들의 양심선언에서도 읽혀진다. 그들은 팽목항에서 KBS잠바를 입는 것이 두렵다고 했고, 현장에 있으면서 현장을 취재 안 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매 맞는 것이 두려워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지 않고 기사를 썼다고 고백했다. KBS를 비하하는 ‘개병신 소리’를 더 이상 듣기 싫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자신들을 ‘기레기 중 기레기’라며 깎아내렸다. 

그 같은 KBS 내부의 동요는 이번 세월호 관련보도 때문에 나타난 것만은 물론 아니다. 그 동안 국정원 관권부정선거, 간첩조작사건 등 이 나라 최고권좌의 거취를 뒤흔들 이슈들에 대한 KBS의 잘못된 보도행태가 누적되어 나타난 결과이며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KBS내 젊은 기자들의 양심이 각성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 구성원이긴 하지만 KBS내에서 이런 반성의 목소리조차 없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KBS의 존재이유를 고민해야 할 절망적 상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KBS내 젊은 기자들의 이런 반성에도 불구하고 KBS 상층부의 인식은 너무도 많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이번 세월호 재난방송에 대해 “잘못한 거 없다”고 강변한 임창건 KBS보도본부장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인식체계는 늦장대처로 구조의 황금시간을 놓쳐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는 상황에서 “80명 구했으면 대단하다. 못한 게 뭐냐”고 항변하는 해경 간부와 그대로 닮았다. 세월호 사망자 수보다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더 많다거나, KBS기자들의 양심선언을 ‘어린 기자들의 돌출행동’이라고 견강부회하는 또 다른 간부의 천박한 인식체계도 마찬가지이다. 

KBS수신료 인상은 지금까지 논의과정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일이지만, KBS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수신료 인상의 주무기구인 방송통신위원회도 인정한 바 있듯이 KBS수신료인상은 재정적으로 열악해진 종편에 생명수를 공급하기 위한 정부여당의 술책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 권력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선출되지 않은 족벌언론의 이익을 챙겨주기 위해 새누리당이 온갖 비난과 비판을 무릅쓰고 총대를 메고 있는 것이다. 여야가 합의했던 편성위원회를 족벌언론들이 반대하자 바로 꼬리를 내리는 여야 정치권의 모습에서도 족벌신문들의 가공할 힘을 읽을 수 있다. 

세월호 사고는 박근혜 정권과 우리 사회의 총체적 난맥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사고 초기 언론의 무더기 오보와 정부의 구조활동에 대한 감시 태만은 결과적으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던 타이밍을 놓쳐 대형참사로 이어지게 한 직접적 원인이기도 하다.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과 해경의 책임자들은 그에 걸맞는 합당한 법의 심판과 문책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참사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은 언론의 문제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지난 8일 밤 유가족들은 KBS를 항의 방문했다. 그만큼 KBS에 대한 국민과 유가족들의 불신이 극에 달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KBS수신료를 인상하겠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며 타들어가는 유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는 지난 7일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가족대책위원회는 여기서 국민들에게 “구조를 위해 함께 해주십시오” “진상조사를 위해 함께 행동해 주십시오”라고 외치고 있다. KBS수신료 인상으로 이들의 외침에 찬물을 끼얹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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