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노무현이다

by fallbaram posted May 16, 2014 Likes 0 Replies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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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노아와 아들 함의 이야기

노아홍수에 대한 과학적이고 고고학적인 증명이란 나같은 평범한 범인에겐 너무나 버거운 주제일 수 있으나
그 이야기 속에서 전개하는 성서적이요 표상적인 영적 의미나 기능에 대해서는 나름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나의 생각과 고찰을 여기다 올리고 그것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어떤 바람직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추출해 내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담으로 민초 앞에 앉았다.

바깥에는 오월의 중순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눈송이가 하늘에서 탐스럽게 내려오고 이 소식 또한 나성에 사는 나의 친구들에게 전한다면 얼마나 신가힌 소식이며 믿기 힘든 이야기 일까 라는 생각도 곁들이면서...

최근에는 한국의 카이스트에 근무하는 중년의 기러기 아빠요 교수인 서울대 출신의 의사하고 교회에서 만나서
성경 이야기로 많은 시간을 서로 보냈다.
그도 삼육은 안다녔지만 돌아가신 어머님이 교인이어서 어느정도는 재림교회의 배경과 기독교의 기본을 갖춘 지성의 한 사람이다. 성경부터 엉터리 투성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재림교회는 그의 아내 (한국삼육 출신)의 교회일 뿐 한수 더 나아가 또 다른 엉터리의  집단일 뿐이라는 고정 관념을 가진 상대하기 어려운 과학도요 의학인이다.

문자적으로 그에게 접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창조 과학이라는 시도조차 그에겐 말이 되지 않는 종교놀이일 뿐이다.
창조가 칠일 만에 이루어 졌는지 그리고 그런 순서대로 육천년전에 착착 순서대로 이루어 졌는지는
나에게도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노아방주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느냐 하는 문제는 접어두고 1400년이라는 세월속에
44명이라고 믿어지는 각기 다른 성경의 저자들이 그 이야기를 어떤 프레임에 넣어서 전개하고 어떤 줄 (연속성)에다 엮어서 끌어 가고 있느냐는 내 나름의 의미를 여기 올리고 또 그 분에게도 이 글을 드리고 싶다..

솔직이 성경이 형성이 되는 과정 또한 얼마나 인간적이고 fragile 한 과정인지 그도 알고 나도 알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가 생각하는 엉터리 처럼 또는 조작에 가깝다고 보는 뒤죽박죽의 성경 이야기들을 반박하는 소위 성경구절 인용 (문자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렇게 볼수 있는 가능성부터 인정하고 이렇게 보면 어떨까 라는 제안을 했는데 의외로 서로간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가 늘 성경의 깊이를 이야기 할때에 자주 인용하는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라는 문구 보다도 나에겐 더 깊은 의미를 던지는 말씀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지만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가 성경의 전부요 방향이요 깊이요 의미다.

창조의 이야기도 제 칠일의 이야기도 성소의 이야기도 의식이던 도덕이던 그 많은 법들의 이야기도 다 내게 (예수)대한 이야기라는 프레임에 넣고 생각하고 가르쳐야 할 의미가 그  말씀속에 있는것이다. 그분이 하신 그 말씀들도 당시엔 그 깊이를 잘 알지 못할 수 있으나 그 의미를 구속적 의미에서 다시 성령이 인도해 주리라는 요한복음의 다름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두 증인은 하나는 성경이요 또 하나는 성령이라는 생각에 이를 수 있다.

나는 그에게 과학적인 관점이나 철학적 관점이나 윤리적 관점은 성경의 흐름을 인식하는 일에 있어서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던져주고 있는것 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다 접어두고 성경속에서 성경으로만 연결하는 그 무엇이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수십번씩 반복하고 팽창해서 마침내 우리의 의심을 뚫고 믿음이라는 비 과학적이고 비 철학적이고 비 윤리적이며 때로는 비 현실적이기도 한 그런 영역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지를 감지해야 할 것이라고 접근했고 그는 그 방법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햇다.한 일주가 지나면 그도 다시 안식년을 끝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하고자 하는 노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홍수를 증명할만한 화석하나 히말라야 산 정상에서 찾는것 이상으로 귀중한 영적 의미를 노아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내 원래의 논리를 하나 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로 지은 아담이 범죄후에 낳았던 후손들이 그의 형상을 따라 더 추악하게 변질되고 늘어나서 물로 쓸어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할 적기 (하나님의 시간)에  이르자 노아를 선택하시고 노아에게 구약역사상 가장 무겁고 중대한 사역을 담당케 하신다.
그가 그 사역을 마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성경은 당대의 의인이라는 그에게 도데체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장면 하나를 도출해내고 그 이야기를 소상하게 기록을 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 당시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의 역사에 깊이 연루되는 어떤 예언으로 발전을 했다.

그 사건은 노아가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고 취하여 한낮에 발가벗게 되고 그 발가벗음에 반응하는 두 종류의 자식들의 이야기를 거기 써 놓았다.
아버지 노아의 발가벗음을 바깥으로 알린자 함과 그 발가벗음을 덮은 나머지 두 아들을 두고 축복과 저주의 예언이 노아의 입에서 떨어진다.
이상하게도 그 함은 가나안 (셈과 야벳이 차지해야할 땅)의 조상이 되고 성경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 (셈의 자손)의 자손들은
가나안 (함)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아서 애급에서 사백년 종살이를 더 해야하고 삼사대가 지난 다음에야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엉뚱한 예언이 함과 셈 사이에 얽히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아비의 발가벗음을 벗음 그대로 수치를 알리는 함의 후손과 그것을 덮었던 아들 셈의 후손들 사이에 훗날 같은 땅에서 벌어지는 영적인 이야기가 거기에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던 아담이 나무뒤에 숨어있던 변질된 열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사단의 꼬임)를 먹고 원래의 형상이 변질되어 발가벗게 되었던 아담처럼 자신이 심었던 나무의 소산(포도나무의 열매)으로 변질된 술을 마시고 다시 발가벗은 새로운 인류의 씨 (열매)인 노아는 아담이 둘째 아담의 표상인것처럼 노아도 십자가에서 발가벗고
세상에 공개되는 그 장면의 또 다른 표상인 것이다.

예수의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는 또 다른 무리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과 그리고 구속의 근본적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고 그들이 비록 셈의 후예들이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해도 함의 정신으로 물이든 함의 정신적 후예들이라는 가르침이 거기 있는것이다.

신약의 인자가 예수님이신 것처럼 구약의 인자가 그 예수를 표상하는 실제로 구약에서 인자라고 불렸던 에스겔이지 않는가.
그 에스겔이 죄도 없는 자신을 유다를 위하여 얼마의 기간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얼마의 기간을 이런 저런 모습으로 고통을 치룬것처럼 이스라엘도 예수님도 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신의 죄와 무관한 죄의 결과를 지기 위하여 발가벗어야 하는역할을 담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 함의 죄 (아비의 수치를 들어내는)가 그의 자손 (블레셋과 아말렉)들에게서 관영하려면 사백년 또는 삼사대가 흘러야 하니 그때까지 너희 (셈의 자손들-이스라엘)는 애급에서 대신 종살이를 해야한다는 그 간접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반역이 마침내 십자가로 예수를 몰아가고 우리는 그 발가벗음 앞에서 다시 함이 되느냐 아니면 셈이 되느냐를 선택해야하는 선택의 삶을 날마다 사는것이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는 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율법의 서슬 시퍼런 요구보다는
남의 발가벗음을 가리기 위하여는 나의 옷을 벗어야 한다는 십자가를 담보한 은혜의 심판앞에 선 간음한 현장의 그 여인처럼 우리도 거기 서야하고 그 은혜로 우리는 다시 발가 벗은자들에게로 가서 내게 값없이 입혀주신 그 옷을 벗어 덮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어차피 성경은 아담의 범죄처럼 처절하고 속절없는 죄는 다시 이땅에 없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그의 범죄가 살인이나 간음이나 또는 그 어떤 것 보다도 더 중했던것은 그는 인류의 씨였고 그의 범죄는 씨에 박혀버리는 종자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저지른 똑같은 죄는 우리에게 없다. 다만 넘어진 자를 넘어 졌다고 조롱하고 간음한 자를 조소하고 쬬다같이 보이는 목사들을 욕하고 그 발가벗음을 고하는 또 다른 죄 (원래의 죄가 아니고 죄를 범한자를 보고 다시 저지르는 그런죄)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아담은 최초에 넘어진 자요

우리는 그가 넘어질 때 그의 씨 (ZERA-히브리어) 속에 함께 있었던 자들이요.

넘어지는 자를 보고 다시 넘어지는 죄만 범하는 자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존경받는 장노님의 불륜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 장노님의 넘어짐으로 넘어지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넘어질 때 꼭 하는말 "아니 장노가 어찌 그런 죄를!"

십자가는 그런 의미에서 거치는 돌이요 넘어지게 하는 기능도 거기 있어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죄가 없다.

넘어진자를 보고 넘어지는 죄 밖에....


우리에게 바벨론에서 나와서 남은 무리인 어떤 교회로 가야한다는 선택은 영생을 판가름하는 선택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다만 십자가에 발가벗기고 달려있는 예수를 수치로 보느냐 아니면 영광(빛)으로 보느냐 하는 당신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종말의 선악간의 대 쟁투도 발가벗음을 고하는 자와 발가벗음을 덮는자의 전쟁이지 소위 천주교와 안식교와의 전쟁 그리고 일요일과 토요일의 전쟁이 아닌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재림교회는 바벨론의 넘어짐을 만 세상에 고하면서 바벨론처럼 다시 넘어지는 실속없는 소비적인 기별에 몰두하고 있다는 나의 개인적 안타까움이 늘 있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복음이라는 엄청난 기별을 바로 옆에 두고.....ㅉ ㅉ ㅉ


노아의 이야기는
눈으로 보이는 그런 발가벗음 (죄)을 고발하는 자가 되지 말고
너희의 옷을 벗어 덮어주라는 기별을 전해주고 있다.
아담의 그 행위가 씨 (종자)의 행위요 모든 인류의 씨로서의 행위이듯이
십자가 또한 씨의 행위요 종자의 행위인것이다. (로마서 5장과 고전 15장의 이야기)

덮어 줄려면 옷이 있어야지.
그 종자(둘째 아담)속에 있어야 하고
그 십자가에서 옷입힘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옷이 있으랴.

민초에는 시방 나랏님들의 옷벗기기가 대세다.
간간이 처량한 원로 목사들이 회초리로 자신을 때리는 이해못할 그런 수치의 옷도 벗겨보고 (그 사진을 보면서 나도 얼마나 황당하고 처량한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전부다 사실일 것이고 또 그렇게도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위에다 네 생각을 맡기지 말라한다.
우선 당신이 거기에 서면 더 나은자가 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러니 오히려 그것을 덮을 수 있는 진실에 살라한다.

내가 말하는 덮는다는 말의 속뜻은 그냥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고
기다리라는 말이다. 다음 선거에 세우기 위하여 노무현을 닮은 사람 또 하나 찾으라는 말이다.
나는 그대들의 흉흉해진 마음들 때문에 날마다 한국인이라는 자존심이 발가벗긴다.

NYT 를 읽을 수 가 없다. 왜 우리끼리 해결하지도 못하고 세상에 알려야 하는것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남의 옷을 벗기는 자는 자기도 벗게 될  것이요.


나도 노무현 그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 하나 다시 찾아보자.
아니면 당신이 그 사람처럼 모든 책임을 지고 부엉이 바위위에서 발가 벗어라.


이제는 덮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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