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조금 시들하지만, 얼마 전까지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둘러싸고 한국문학 공간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왔다. 그 논의의 뿌리는 모든 것이 정치로 환원되고, 또 그래야만 어떤 해결책이 잡히는 ‘정치과잉’의 독특한 한국사회에 있다. 문학도 말과 글을 통한 ‘정치’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자기반성 혹은 자기합리화의 표현. 오만한 권력과 뻔뻔한 자본의 힘 앞에 문학은 너무나 힘이 약하다는 걸 절감한다. 그리고 말과 글의 한계를 절감하는 끔찍한 사태 앞에서도 문학은 종종 할 말과 쓸 글을 상실한다. 침묵이 말이나 글보다 사태의 진실을 전하는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다. 그럼에도 말과 글을 중단할 수 없기에 뭔가를 뱉어내고 적는다. 이렇게.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아도르노) 이 말이 지금만큼 절절한 울림을 갖게 된 적도 흔치 않다. 과장이 아니다. 눈앞에서 생중계로 죽어간 생명들은 그냥 죽음이 아니다. 국가와 자본, ‘가만히 있어라’고 윽박질러온 기성세대가 함께 만들어낸 ‘살인기계’의 학살이다. 우리가 지금 집단적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리고 어쩌면 이 비극도 지난 숱한 비극들이 그랬듯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잊힐 거라는 우울한 판단을 마음 깊은 곳에서 하고 있다면,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당장은 깊은 슬픔을 나누고 있다면, 왜 그럴까. 아마도 착종된 고통스러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모두가 그 학살의 공범자라는 죄책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죽음들, 이 학살 뒤에도 시를,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이런 질문조차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묻히고,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 바삐 먹고사느라고, 혹은 우리가 목도한 참혹한 죽음의 기억이 고통스러워 그냥 망각하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고,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국사회라는 ‘살인기계’는 그 구성원들이 비극 앞에, 죽음 앞에 둔감해지도록, 그렇게라도 살아남도록 훈육해왔다. 잊지 않으면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되풀이해서 잊어왔다. 그런 망각 속에서 새로운 비극이 잉태되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나는 우울하게 예견한다).
반복되는 죽음과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낯선 일이 아니다. 강고한 가족주의, 연고주의, 지역주의는 피와 연줄이 아닌 사회적 계약으로서의 공동체나 국가가 ‘나’와 ‘우리’의 삶을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뼈저린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다. 한반도의 시민들은 국가의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다. 왕조시대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의 ‘공화국’ 체제 또한 시민사회의 역량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반도의 (분단)국가에게 시민은 감시·처벌·학살의 대상이었다.(신기철, <국민은 적이 아니다>)
아이들은 기도한다. “집이 불타지 않게 해주세요/ 폭격기가 뭔지 모르게 해주세요/ 밤에는 잘 수 있게 해주세요/ 삶이 형벌이 아니게 해주세요/ 엄마들이 울지 않게 해주세요/ 아무도 누군가를 죽이지 않게 해주세요/ 누구나 뭔가를 완성시키게 해주세요/ 그럼 누군가를 믿을 수 있겠죠/ 젊은 사람들이 뭔가를 이루게 해주세요/ 늙은 사람들도 그렇게 하게 해주세요.”(브레히트, <아이들의 기도>) “엄마들이 울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는 국가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경쟁으로 아이들을 자살로 몰아가고, 권력과 돈을 앞세워 아이들을 죽이는 사회는 실패했다. 그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망각하는 공동체는 허물어진다. 그리고 그래야 마땅하다. 그때, 문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