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희생아의 어머니들은 누구의 자손인가?

by 김원일 posted May 16, 2014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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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은 미국의 어머니날이었다. 설교 본문은 창세기 21장의 하갈 얘기 마가복음 7장의 귀신들린 딸을 가진 이방 여인 얘기였다.

 

나는 같은 본문으로 2005년에도 설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재탕'인 셈이다. 나는 설교 서두에 교우들에게 이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

 

하지만 내가 이번에 이 설교를 재탕한 건 세월호 사건이 이 본문을 달리 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2005년에는 어머니들 중에 가장 소외된 어머니인 '미혼모'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번에는 세월호 어머니를 생각하며 얘기했다. 그러다 보니 설교가 9년 전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곧 '재탕'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

 

설교하다 보니 흥분했는지 좀 길어졌다.

 

--------------

 

2014년 5월 11일 / 어머니주일

 

어머니니까 가능하다!

창세기 21:14-19  마가 7:24-30

 

곽건용 목사

 

세월호 참사 때문에 하갈 얘기를 새로 읽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문법적으로 ‘살아 있는’은 ‘하나님’을 수식한다고도 볼 수 있고 ‘말씀’을 수식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저는 둘 다 수식한다고 이해합니다. 곧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말은 따지고 들자면 한이 없으므로 지금 얘기할 수는 없고 성경이 살아 있는 말씀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만 짚어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경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뜻도 아니고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정확한 책이란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성경이 갖고 있는 거의 무한한 ‘유연성’(flexibility)과 ‘적응성’(adaptability)을 가리킵니다. 곧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더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렇게 변화된 상황 속에서 의미가 있고 할 말이 있는 책이고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진실을 담고 있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고정되고 죽은 ‘글자’(letter)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word)입니다. 성경은 책이므로 읽어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말씀이기 때문에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글은 고정되어 있지만 말씀은 늘 새롭게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더라도 여전히 귀 기울여야 하는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우리네 삶이 달라진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를 확신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약은 병을 고치는 데 꼭 필요하지만 지시를 따르지 않고 맘대로 먹으면 탈이 더 커지는 것처럼 성경을 읽는 것도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제대로 읽지 않으면 오히려 해악이 더 큽니다. 그래서 가장 크고 위험한 악은 선에 가장 가까운 악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고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자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첫째로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주시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읽고, 그렇게 깨달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로는 그렇게 해서 달라진 삶의 관점에서 다시금 성경을 읽는 걸 뜻합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순환’ 같은 겁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시킴으로써 삶이 변화되고 또 그렇게 변화된 삶의 시각으로 다시금 성경을 새롭게 읽는 것,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하갈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저는 하갈 얘기를 9년 전인 2005년 어머니주일에도 했습니다. 그때는 세상 어머니들 중에 가장 극심한 차별을 당한다고 할 수 있는 ‘미혼모’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같은 말씀을 읽은 까닭은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그 얘기가 달리 읽혔기 때문입니다. 삶이 달라졌기 때문에 성경이 달리 읽혔다는 얘기입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원수의 조상을 낳은 하갈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이집트인 몸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종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였던 이집트 사람이었고 신분상으론 몸종이었던 겁니다. 사라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처지였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라에게 아기가 생기지 않으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라는 자기가 시집올 때 데려온 하갈을 남편 아브라함의 침실로 들여보냈습니다. 자기 대신 하갈의 몸을 빌려서 남편 집안의 대를 이르려 했던 겁니다. 말하자면 하갈은 ‘씨받이’였던 셈입니다. 아내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을 때 시집올 때 데려온 몸종을 통해 자식을 얻는 것은 고대 중동지역의 관습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들이 태어나면 그가 어엿한 상속자가 됐습니다. 종이 낳았어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했는데 하갈이 임신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본부인 사라를 깔봤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과거 드라마에는 많이 등장했던 스토리인데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이런 얘기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좌우간 일이 이렇게 되자 사라가 남편에게 우는 소리를 했고 남편은 ‘당신 맘대로 하라’면서 문제를 회피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태도가 참 보잘 것 없지 않습니까. 입장이 곤란하니까 피해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하갈은 이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왔다는 겁니다. 임신한 몸으로 말입니다.

 

이런 하갈의 행위를 ‘가출’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치스럽게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갈은 사라의 몸종, 곧 노예였습니다. 노예가 주인의 집을 나가면 그것은 ‘가출’이 아니라 ‘도망’이라고 불러야겠지요. 그녀는 노예 신분으로 주인집에서 도망친 겁니다. 당시에는 노예가 도망쳤다가 잡히면 죽었습니다. 도망 노예를 숨겨주면 장물취급 죄로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비춰보면 그녀는 목숨을 걸고 도망쳤던 겁니다. 오죽 견디기 힘들었으면 이랬을까요. 믿음의 어머니 사라가 그녀를 그렇게 취급했습니다. 아무리 당시 관습이 그랬다고는 하나 그녀의 행위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때 야훼의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나서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라고 말하고 나서 그녀에게 셀 수 없을 만큼의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녀의 아들에게 ‘이스마엘’이란 이름을 주라고 하면서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천사가 하갈에게 약속을 준 일은 따지고 보면 놀라운 사건입니다. 당시 관습대로라면 하갈이 아들을 낳더라도 그는 그녀의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이 됐기 때문입니다. 옛날 씨받이의 운명이 다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이만 낳아주면 그뿐이지 아이가 자기 아이가 되지는 않았으니 말입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이스마엘을 가리켜서 ‘하갈의 자손’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이 아니라 하갈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엘은 아랍인들의 조상입니다. 그러니까 하갈은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인 종족의 조상을 낳은 셈입니다.

 

하갈은 천사의 말대로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가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정작 문제는 그로부터 15년 후 본부인 사라가 90세의 나이에 기적적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을 때 벌어졌습니다. 사라가 얼마나 기세등등했겠습니까. 어느 날 사라는 이삭이 이스마엘과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해서 남편 아브라함에게 가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성화를 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 차이가 열다섯 살이니 사실 이스마엘과 이삭이 같이 놀았다기보다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데리고 놀았다고 봐야겠지요. 사라에게는 이 그림이 불안을 야기했던 겁니다. 둘 다 남편의 상속자가 되면 자기 아들이 기를 못 펼 게 뻔해 보였겠지요. 그래서 그녀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기로 했습니다. 이삭을 유일한 상속자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때도 아브라함은 우유부단했습니다. 이스마엘도 자기 자식이었기에 난처했던 겁니다. 이 때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확인해주셨습니다.

 

그 다음 날 하갈과 이스마엘은 약간의 양식과 물을 갖고 집을 떠났습니다. 이번엔 도망간 게 아니라 쫓겨난 겁니다. 그들이 브엘세바 광야에 당도했을 때 양식과 물이 다 떨어져 곧 죽게 됐습니다. 하갈은 차마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멀리 떨어져 통곡하고 있었고 이스마엘도 울고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나서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저기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어서 가서 아이를 안아 일으켜주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의 눈을 열어주자 그녀의 눈에 샘물이 보였고 그 물을 마시고 두 사람은 살아났다는 겁니다.

 

어머니니까 가능하다!

 

성경에 나오는 하갈 얘기는 이게 전부입니다. 이외에 이름이 언급된 경우는 몇 있지만 얘기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장면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겨우 두 개의 에피소드가 전부입니다. 어머니주일이 하갈 얘기를 본문으로 선택하는 설교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지만 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얘기는 앞에서 했습니다. 이번에 다시 하는 까닭은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이 얘기가 달리 읽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달리 읽혔는지를 지금부터 얘기하겠습니다.

 

우선 저는 하갈 얘기가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거의 전적으로 이스라엘 중심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잘 읽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중심적인 얘기들 가운데서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얘기를 잘 구별해 내야 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둬도 하갈 얘기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아랍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의 적이고 원수인데 그 원수의 조상을 낳은 하갈 얘기를 이렇게 구체적이고 자세하고 동정적으로 전하는 이유와 목적이 뭔지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는 오래 전에 일본군인의 성노예(과거에 ‘정신대’라고 불렸던 분들)로 끌려갔던 분들 사진을 한 장 봤습니다. 우선 일본군 성노예라는 비극적이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그보다 더 놀랐던 점은 그 중에 만삭의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생각났습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겁니다. 사진에는 나이가 많아봐야 20세 전후일 어린 만삭의 조선 여인의 이름까지 실려 있었고 그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저는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여러분도 사진을 봤다면 저와 비슷했을 겁니다. 우선 하루에 수십 명의 일본 군인을 몸으로 받아들였을 여인이 그 와중에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누구의 아이인지 알 도리가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더 맘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랐을까도 상상해봤습니다. 사진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서 그것까지 알 도리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어머니니까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갈이 심한 수난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이스마엘을 낳아 길러 아랍 사람의 조상이 되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녀가 어머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입니다. 또한 일본군 성노예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당당히 만삭인 배로 사진을 찍고 그 아이를 낳아 길렀던 것도 그녀가 어머니이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 얘기는 오늘 읽은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이방 여인의 얘기와도 통합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한 여인이 예수께 와서 발 앞에 엎드려 사정하더라는 겁니다. 그녀에게는  악한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온 겁니다. 그런데 그녀는 유대인들이 ‘개’로 여겼던  이방인이었다는 겁니다.

 

예수께서는 무슨 의도였는지 몰라도 간청하는 그녀에게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냉정하게 말씀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떠보려고 이렇게 말씀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이 말이 예수님의 진심이었다고도 합니다. 또 다른 이는 이 말은 당시 유대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속담인데 예수님은 이를 그냥 인용하셨을 뿐이라고도 합니다. 저는 어느 편 손을 들어줘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여인의 응답이라고 믿습니다. 그녀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그녀의 딸이 나았다고 말씀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매우 불편하지만 이 사건의 초점은 그게 아닙니다. 얘기의 초점은 ‘예수님의 회심’에 있습니다. ‘회심’이라고는 했지만 예수께서 무슨 죄를 지셨기에 회개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셨다는 뜻입니다. 곧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확인해보려고 짐짓 그녀를 푸대접한 게 아니라면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생각을 바꾸셨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과연 무엇이 그런 놀라운 ‘사건’을 야기했냐는 겁니다. 그것은 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고치려고 용기를 내서 예수 앞에 엎드린 어머니, 딸을 구할 수만 있다면 ‘개’ 취급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의 간절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건 어머니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이런 사건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주목하는 점은 이런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갈의 사건과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의 사건은 중요한 신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사건 모두에는 이스라엘과 아랍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대립이 깔려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의 사건에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되느냐, 영적인 말로 표현하면 누가 약속의 후손이 되느냐, 누가 믿음의 조상이 되느냐의 문제가 다뤄지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되는 사람은 사라의 아들 이삭입니다. 하지만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이삭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의 조상이 됩니다. 지금의 아랍 사람의 조상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민과 비선민을 가리는 신학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중요한 신학은 ‘모성의 신학’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누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인가는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신학입니다. 그만큼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덜 드러나 있지만 그보다 분명 더 근본적인 신학은 아랍 사람의 조상이 될 이스마엘의 탄생에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점이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그렇게 역사하시게 만든 것은 하갈의 모성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이방 여인 얘기는 ‘모성의 신학’을 예수께서 확인해주신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 의해서 ‘개’로 칭해지던 이방인, 그것도 이방 여인을 처음에는 예수님조차 유대인의 속담대로 ‘개’로 칭하셨지만 그녀의 딸을 향한 간절한 모성을 보시고서 마침내 유대인 대 이방인의 대립을 초월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경에는 선민과 비선민,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나누는 신학이 분명히 있습니다. 교회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도 이 신학적 대립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둘을 구별하지만 선민과 비선민을 구별하는 신학보다 더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신학은 ‘모성의 신학’입니다. 어머니의 신학이고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의 신학이란 얘기입니다.

 

저로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게 세월호 참사사건입니다. 생떼 같은 자식들을 깊은 바다 속에 묻어두고 말할 수 없이 슬퍼하면서도 스스로를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하는 어머니들에게서 저는 이 심오한 모성의 신학의 모티브를 봤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동력이 기독교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들만의 하나님의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고 인류 전체의 하나님이므로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좁은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둘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매일 성실하게 노동하며 사람의 권리와 책임을 배워가는 노동자들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양심적인 모든 민주 시민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려고 매일 기도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 기독교인들 등 다양한 사람들을 이 과업으로 이끄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번에 깊은 모성을 갖고 있는 어머니들이 이 대열에 앞장서고 있음을 봤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죽음의 귀신이, 맘몬이라는 악령이 우리네 삶에서 추방되는 기적의 역사가 언제 일어날까요?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행진을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 있음을 우리는 이번에 분명히 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굴복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리라는 비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2014년 5월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거대한 행진에 아기를 업거나 유모차에 태운 어머니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확인한 때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께, 특히 세월호 참변에서 자식을 잃었지만 슬픔을 떨치고 일어나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행진 대열에 합류한 어머니들께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그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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