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바로세우기>, 무엇부터 할 것인가?

by Gloria posted May 17, 2014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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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실체와, 조선일보에 실리는 글의 이면에 숨겨진 ‘음모’들이 일부 뜻있는 학자들이나 시민들의 ‘가면 벗기기’ 노력으로 인해 상당 부분 벗겨지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자신들만의 견고한 성체를 쌓고 스스로 ‘밤의 대통령’을 자처하며 무소불위의 ‘언권(言權)’을 누려오던 조선일보의 입장에서는 짜증스럽고 성가신 일이겠지만, ‘언론개혁’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조선일보 바로세우기’를 위한 수많은 노력들은 독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결국은 해당 언론사 자신들을 위한 보약이 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결과를 얻는 과정이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는 점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서야 할 대상들 스스로 바로설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수십 년 간 비딱하게 걸으면서도 자신들 스스로는 바로걷는 것으로 당당하게 인식해온 그들에게 ‘바로걷기’를 주문하고 그것이 새로운 보행방식으로 자리잡히기까지는 결코 만만찮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변화하려는 그들의 ‘의지 없음’ 못지않게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언론 바로세우기’ 운동에 동참하는 시민의 힘이 생각보다 빨리 보태지지 않는다는 점, 아직도 조선일보가 그 동안 끈질기게 주입시켜온 반공 이데올로기와, 학벌제일주의, 거짓 선동주의 등 고질적 악습의 수렁에 깊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더욱 많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그간 만나 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느낀 것이다.

<조선>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

‘조선일보 바로세우기’ 운동에 동참하길 꺼려하거나 주저하는 사람들이 흔히 주장하는 말은 “세상엔 다양성이 존재하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권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세력도 공존하고, 하나의 정책에 대해 찬성하고 반대하는 세력도 당연히 있는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존중되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조선일보가 정부정책에 반대한다고 해서 비판해서야 되겠느냐?”고 반문해온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너무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럴 때면 이들이 정말 조선일보가 끼치는 해악을 몰라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아는데 일부러 그러는 말인지 가만히 판단해보는데, 대부분은 정말 조선일보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간의 ‘조선일보 바로세우기’ 노력이 결코 만만치 않게 진행되었지만, 아직 조선일보 중독자들의 의식을 일깨우기엔 너무도 미약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상(思想)이라는 것은 마치 중독성이 강한 마약과 같아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사람의 머리에 주입시켜 놓으면 그것을 다시 새로운 생각으로 바꾸기란 너무도 어렵고 힘든 일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중독자들이 가진 잘못된 환상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결코 짧지 않을 인내의 시간을 각오해야 하는 ‘장기전(長期戰)’이 필요할 뿐이다. 장기전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보급체계는 물론이고, 지치지 않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끈질긴 병사를 보다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겨준다.

보급체계는 물질적 후원뿐만이 아니라, 깨어있는 시민사회의 변함없는 성원과 지지이며, 올바른 논리와 흔들림 없는 굳은 의지로 소신을 변함없이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논객(論客)을 보다 많이 확보해야 함을 의미한다.

‘조선일보 바로세우기’ 운동의 목표는 결코 조선일보를 바로세우는 것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간 조선일보의 왜곡, 과장, 허위보도의 주술에 취해 있는 ‘맹신적 독자’들을 일깨우는 일이 급선무다. 사이비 교주를 비판하는 일 못지않게 사이비 교주에게 현혹되어 가산을 탕진하고 집안을 말아 먹는 교도들을 정신 차리게 도와주는 일이 어쩌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는 이유와 같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단의 ‘조선일보 맹신자’들을 만나보면서 이점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조선일보 추종자와 맹신자들

자주 만나는 사람 가운데 입만 열면 조선일보를 칭찬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정치판 주변을 기웃거리다 실망하고 지방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조선일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있는데, 매우 자주 조선일보를 펼쳐들고 감탄사를 터드리면서 “다른 건 어떤지 모르겠고, 김대중 주필이나 류근필 논설위원의 글을 비롯해 사설, 칼럼들이 정말 끝내준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한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면 “그냥 시원하고 좋다”고 대답한다.

물론 그는 평소에도 근로자 보다는 고용을 창출해준 사업주의 존재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조선일보 글에 대한 반응은 거의 맹목적 추종에 가깝다.

여러 번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의 내면을 관찰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가 물론 이념적 성향이 보수적이기도 하지만 특히 조선일보의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글쓰기 방식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것, 특히 글쓰기에 있어서 그것은 독자를 빨아들이는 수단이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정의를 위한 순수한 열정의 호소에 있지 않고, 독자를 흥분시켜 이성을 잃게 만든다면 지극히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더욱이 과장과 왜곡을 별 죄의식 없이 일삼으며 독자를 자극과 감각의 노예로만 만들어가는 조선일보의 쾌락적 상업주의는 국민정서를 파괴시키는 위험천만한 바이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히틀러의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연설에 매료되어 이성을 상실한 게르만족의 환호성은 결국 끔찍한 파괴와 살인의 악마적 광기로 변신해 세계를 죽음과 공포의 신음소리로 몰아넣고 말았다. 안하무인격인 조선일보의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글에 매료당한 그 박사의 웃음 속에서, 히틀러의 연설에 열광한 게르만족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오버랩되는 순간 알 수 없는 전율 같은 것을 느꼈음은 물론이다.

지난해 겨울에는 기업인단체에 근무하는 중견간부, 전직 중앙 언론사 정치부장, 건설업체를 경영하는 사업가, 행정학을 전공한 저명한 대학교수, 퇴직한 고위공직자와 저녁을 먹었던 적이 있다.

고량주가 두어 병 비어나가고 어느 순간 누군가 뜬금없이 조선일보 예찬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애들 정말 머리 좋데?”로부터 시작된 예찬은, “걔들 대부분 서울대 출신이지? 서울대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달라.”, “걔들은 옷 입는 것까지 달라. 아주 샤프해”, “조선일보사는 기자들 봉급도 아주 많이 준다며? 봉급을 많이 받으니깐 프라이드가 있나봐?” 따위의 시시껄렁한 칭찬이 줄을 이었고, 연신 “맞아 맞아! 조선일보는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야”라는 맞장구가 빠지질 않았다.

곁에서 듣고 있던 나는 속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어느 누군가의 충고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나의 편협함이 문제일까’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의 조선일보 칭찬하기 가운데는 “기사를 정말 공정하고 정확하게 쓴다”는 내용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언론사나 기자를 칭찬하려면 그것이 가장 많이, 중요하게 거론해야 하는 게 아닌가. 듣다 못한 나는 “그들이 과장보도와 왜곡보도에도 제일 뛰어나죠?”라고 툭 내뱉었는데, 갑자기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한 표정을 한 시선들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그리곤 어느 누군가의 예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해야지 정부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만 보는 건 DJ선생 추종자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다수의 비릿한 시선을 향해 상대적으로 고립된 나는 그들을 상대할 필요성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이상하게도 ‘이럴 때 강준만 교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는데, 그건 전투의지를 상실한 내 자신의 무력감이 부른 ‘구원요청’이 아니었나 싶다.

그날 내 자신을 더욱 헷갈리게 만든 점은, 그들 중 서울대출신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들이 서울대 출신 기자들을 찬양한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서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비판을 했다면 서울대 출신들이 흔히 써먹는 ‘열등감 때문이었을 거야’ 라고 단순 무식하게 결론을 낼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옷을 잘 입는다. 샤프하다. 봉급을 많이 받는다”라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칭찬까지 하는 그들의 표정은 코믹하기까지 했다. 옷을 잘 입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울대 나와서 옷 잘 입고 봉급 많이 받는다고 훌륭한 기자가 되는 것은 물론 결코 아닐 것이다.

결국 대부분이 사회적 기득권자들인 그들의 입장을 가장 훌륭하게 보호해주는 방패막이고, 때문에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먹여 가며 ‘짝사랑’을 보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짝사랑이냐, 서로 좋아하는 거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극히 순진한 생각이다. 조선일보를 향한 구애의 몸짓은 조선일보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때만이 가능한 것인 만큼, 그들의 조선일보 예찬은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한 것이다.

조선일보 편들기를 자처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대기업 이사로 재직하다 지금은 꽤 튼튼하고 규모가 있는 제조사의 대표로 근무하고 있다. 그도 틈만 나면 정부비판에 열을 올리는데, 그 인용 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항상 조선일보다.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 났더라. 봤느냐? 정말 나라꼴이 개판이다’라는 식이다.

그는 조선일보 기사를 무조건 진실로 믿는 사람이다. 얼마 전에도 그는 “노무현이는 대선후보로서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언론사 폐간을 운운할 수 있느냐?”고 흥분하기도 하고, “주적개념을 없앤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 땅의 군인들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군대에 간다는 건 웃기는 이야기”라며 열을 토했다.

그의 열변(?)을 듣고 있다가 “노무현후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런 말을 했다면 해당 언론사로서는 참으로 중요한 기사거리가 됐을 텐데 당시 참석했던 기자들이 그때 기사를 쓰지 않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 그런 식의 정보를 흘렸다면 그게 진짜 지탄받을 짓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하여튼 그런 식의 생각을 가졌다는 자체가 문제 아니냐?”고 단정적으로 말하면서도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주적개념 삭제와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 “비록 우리가 북한과 정전협정이 아닌 휴전협정을 맺고 있는 준 전시상황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전쟁’을 재개하기 위한 숨고르기 차원의 정전협정이 아니라, 영구적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희망 만들기 정전협정으로 만들어가는 게 당연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을 타도의 대상, 쳐 부셔야 할 ‘적군’으로 규정하기보다는 화합하고 평화적으로 하나 되어야 할 ‘형제’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물음에 대해서도 그는 여전히 “그럼 우리의 주적(主敵)은 누구란 말이냐? 우리 군대는 누구와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가?”라며 흥분했다. 결국 그의 생각은 싸울 적을 규정하고, 그 적과 싸우기 위해 군대는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대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점은 초등학교도 안 나와도 알고 있다.

군대는 평화를 위한 억지력이며, 궁극적으로 그 평화를 영구화시킴으로써 결국 소멸되어야 할 한시적 조직이다. 그 기간을 축소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군대를 전쟁의 도구로만 인식하지 않는 건강한 상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에 달려있을 것이다.

사실 그간 조선일보는 끊임없이 ‘우리의 적이 누구냐’고 외치며 전쟁을 선동하고, 전쟁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정신을 집중시켜왔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일제시대에는 아까운 젊은 목숨들을 전쟁터로 내 모는 선봉역할을 자임해오지 않았는가.

그래서일까? 어느새 우리 사회는 조선일보가 불어넣은 집요한 ‘전쟁사랑’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사회의 기득권층을 이루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조선일보의 바이러스 퍼뜨리기와, 동조적 지지자 포섭전술은 너무도 교묘한 위장술을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속셈을 파악하기가 힘이 든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조선>의 교묘한 포섭전술

실제로 얼마 전에는 정책추진과정상의 견해 차이로 본의 아니게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한 전직 고위공무원을 만났던 적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게다가 자신의 주장이 정부정책과 상반되기 때문에 당연히 정부비판적 내용의 주장을 자주 피력하는 사람이다.

조선일보가 이런 좋은 ‘사냥감’을 놓칠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 신랄한 투로 정부를 비판하는 그의 글들을 가장 자주 실어주었고, 신문도 모자라 월간조선에서도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가며 그야말로 ‘대서특필’을 해주었다. 전직공무원으로서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던 때에 그것도 특별한 대우를 해주며 자기주장을 실어주자 그가 감동하고 감읍해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런 그에게 얼마 전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과 기자 한 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간단한 인물취재였는데, 이 자리에서 정부와 김 대통령에 대한 걸쭉한 비난이 이어졌다고 한다.

조갑제 편집장은 이번 5월호에서 행동하지 않는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쉽게 말해서 ‘조선 편을 들어 줘야 할 사람들이 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느냐’는 의미의 글을 실은 바 있는데, 이날 만남에서도 “보수세력은 더 당해봐야 한다”거나, “한나라당은 좋은 대정부 공격꺼리를 줘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투로 불만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그에게 “그런 내용들을 책으로 써서 출판하자. 책광고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해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전직 공직자는 조 편집장의 제안에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대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이 그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해 내 주장을 자주 보도해주고, 이번에 책까지 내주겠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내 주장이 중요하다는 것 아니겠느냐?”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갑제 찬양’을 시작했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기자들이 써오는 원고를 전부 다 읽어보고 확인한다고 하더라. 그 많은 내용들을 매월 다 읽어본다니 그의 지식과 정보량이 얼마나 되겠느냐?”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조선은 이렇게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해줄 적극적 동조자를 포섭해나가는 모양이다.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주며 대상을 으쓱하게 만들어 주고, 자신들의 지면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대리 홍보해주는 방식 말이다. 그럼으로써 조선은 대리인의 뒤에 숨어서도 마음껏 자기들의 목적을 관철시킬 수 있는 안전한 대리전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리전을 펼치는 광대들은 자신이 대리자 역할을 한다고 느끼기보단 오히려 은혜에 감읍해 하도록 만드는 것, 참으로 조선일보다운 방식이다. 오죽하면, 편집장이 기자들이 써 온 원고를 읽어보는 너무도 당연한 책무를 두고서도 ‘철두철미하고 대단한’이란 용어를 사용해가며 칭찬하겠는가.

‘조선’ 안과 밖 모든 사람들의 최면을 풀어주는 일

지금껏 들어본 네 가지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느낀 점은, <조선>이란 거대한 성체를 쌓아두고 언론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조선일보의 ‘왕국 만들기’야 조선일보에서부터 출발했지만, 그들에게 끊임없이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고, 더 높은 성벽을 쌓는 일에 앞장서 ‘벽돌 나르기’에 나서는 조선 밖의 ‘포섭된’, ‘최면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리도록 만드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조선일보 바로세우기’운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국 조선일보의 비상식적 보도나 왜곡, 과장보도에 대해 치열한 반박전을 보다 더 열심히 전개해야 함을 의미한다. 왜곡보도를 보고서도 오히려 동조자나 옹호자가 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라느니 “사상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나라망치는 철부지 헛소리”라는 식의 말도 안되는 소리로 장막 뒤에서 초점을 흐리는 연막전을 펼치더라도 그것이 절대 통하지 않도록 진지하고 단호하게 대응해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의 언론이 언론사라는 ‘집단’속에 안주하며 오염된 기사를 양산하지 못하도록, 기자 중심의 ‘독립군’으로서 소신있는 기사를 쓸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아무리 조선일보가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소속된 기자 개인들을 만나보면 그들도 가슴으로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고, 진지한 자기성찰을 하는 양식있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들 개개인이 조선의 ‘봉급쟁이’로서만이 아니라, 조선의 ‘양심가’로 활동해 마침내 오염되었던 조선의 양심이 비로소 제 색을 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뒤늦게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최소한 일용할 양식걱정은 하지 않도록 시민사회가 나서서 도와주는 방법도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희망은 언뜻 먼 곳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 안에 언제나 들어있다. 다만 그것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거나, 자신이 품고 있는 희망의 불빛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선일보 바로세우기>는 결국 조선일보 사람들과, 조선일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들의 가슴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도록 도와주는 일이어야 한다. 희망의 불씨를 찾아주는 일은 결국 어둠 속에서도 건강한 양심을 찾도록 하는 소중한 빛이 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권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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