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by 김주영 posted Jun 01, 2014 Likes 0 Replies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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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님,


성경읽기의 기본이  단어가 문맥 속에서 무슨 뜻인지 아는 것일진대, 


생각 없이 

이곳 저곳에서 '율법' 이라는 단어가 보인다고 그걸 다 같은 것으로 알고

신학을 조직해서 

오늘날 교인들 헷갈리게 하는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야말로 기본에 해당하는 것이니

여기서 다시 취급하지 않습니다. 

차분히 좀 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의견을 달리하는 점은 

무엇을 묵상하는가가 아니고

묵상해서 무엇을 깨닫게 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



님이 마지막 글에 이런 말씀을했습니다. 


 글 전체를 인용하고 싶지만

마지막 부분:


((근본적인 인간 자신의 철학적인 속절없음을 고백하는 겸손 말입니다.
결국 내가 "속절없는 죄인"이라는 깨달음 말입니다.

율법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왼쪽에 율법끼고 머리 조아리고 오른 손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사는 죄인들의 모습 이라고 생각합니다.

(주) : 머리를 치켜 세우고 받는 자는 아마 율법을 다 지켰다는 자신감에서 일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은혜는 필요없을 것입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자는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묵상해 볼 때) 너무 멀었다는
고백하는 모습일 것 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이 없어지면 오만해 집니다.))

--------

님이 '율법' 이라 부르는 것
그것을 묵상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보인다
아멘 !!!

그런데 그것을 보고 나면
나는 얼마나 죄되고 부족한지 드러난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된다.

일견 바른 말 같지만

저는 감히

새롭고 산 길을 제시하려 합니다. 

예수께서 몸소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쳐준 바요
사도들이 힘주어 말한 바입니다. 

------------

우리는 무엇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까?

율법을 보고 우리의 죄됨과 부족을 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율법이 아닌
예수를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들여다 보고 묵상하면
무엇이 보입니까?

나의 부족함과 죄가 보입니까?

아닙니다. 
예수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봅니다. 

아들이므로 
예수와 함게 같은 유업을 받을 상속자임을 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가 말한 대로 
예수와 함께 하늘로 끌어 올려
아버지의 보좌 옆에 앉은 나를 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셨는데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사도가 갈파했지요

좋은 모든 것을 은사로 이미 주신
모든 것이 갖추어 지고 보장된 
그런 자신의 신분을 봅니다. 

가슴 터지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는 대과거 입니다. 
일회로 끝났으나
그 영향이 세세토록 미치는 일입니다. 

십자가 이편에 사는 사람들은 
십자가 저편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십자가 저편의 삶은 
'나의 죄' '나의 부족' 을 깊이 깊이 깨달아라 하는 그런 신학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율법아래' 혹은 '옛언약' 이라고 하던 시대의 마음가짐입니다. 

모든 '법'의 정죄에서 해방하시고
자유를 주시고
새롭고 산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찌 모든 것을 다 주신 무한 풍요를 자연스럽게 누리는 대신 
없고 못 먹던 시절의 궁상을 자꾸 회상하는게 마땅하다고 합니까?

신부의 기쁨과 사랑은 어디가고 
과부의 한숨과 자격지심을 잃지 말아야 미덕이라  하는 것입니까?

종의 영이 아닌
아들의 영을 받았는데
왜 아직도 종처럼 생각합니까?

내 자식들이 아비된 나에게

"아빠,  아빠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격한지
공부도 못하고  예쁘지도 않고
게으르고
어먼 짓이나 하는 나지만
이렇게 먹여 주시고 학비 대주시고 차도 사주시니 
그 사랑 감격하여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나오고..."
어쩌고 저쩌고 이러면

아비된 제가 대견하다 하겠습니까?

어떤 아비가 
기절초풍하고 가슴을 치지 않겠습니까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  
내 자식들이 이런 사고방식으로 사나
죽고 싶도록 괴롭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내일도
아니면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아니, 그저 일년에 한번 아버지 날에라도
"아빠, 나는, 그리고 우리 모든 자식들은
본성적으로 못나고, 원래가 부족하고, 태어날때부터 못되고....  
그러나 
아빠 이런 우리를 사랑해   주시니..."

이러면 아비된 제가 참 살 맛 나겠지요?

우리는 교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그러라고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망할놈의 신학입니까?

묵상님

님이 무엇이든 들여다 보시면서
하나님의 품성을 묵상하시게 되걸랑

제발,  제발 
그 하나님의 성품, 형상을 받아 창조된
그리고 십자가 구속으로 재창조된
그리고 그것을 믿어 중생한
그래서 예수와 함께 아들로 인정되고
예수와 함께 하늘의 모든 좋은 것을 아낌 없이 받은
그래서 내 속에 
새로운 DNA가 생긴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으로 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충만한 것으로 부터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궁핍의 시대
가끔 회상이 되더라고
그 mindset  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예수의 충만으로부터 받는
그 무한 풍요에서 
어떻게 즐겁고 감격하며 살아야 할 것을 배워가십시오. 

그것이 복음입니다. 

님이 경계하는 '철학'입니까?
그렇게 부르려면 그렇게 부르십시오. 

어떻게 부르든
복음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런 복음에 감격합니다. 

율법이라는 거울
청동기 시대의 거울입니다
기껏해야 희미하게나 보이는 그런 거울입니다. 
십자가 이편에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를 깊이 묵상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고 자랑스러워 하시는  아들 !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무한히 높고 깊은 차원의 그리스도인 삶을 살게 합니다.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오만입니까?

네.
그렇게 부르려면 그렇게 부르십시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감사하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오만입니까?

왕자더러 왜  거지의 사고방식을 잊지 말고 살아라 합니까?

아버지의 품성이   내 DNA  에 살아 있어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내 속에서 시퍼렇게 날로 자라가는데 
무슨 오만이나 방자함이  설 자리가 있습니까??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나의 출발점은
나의 죗됨과 부족함이 아니라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예수와 함께 앉은
그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단번에 끝났습니다. 
자꾸 거듭해서 새로 시작하려는 것은
불신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르쳐져야할 복음입니다. 

님이 말씀하는
일견 경건하게 보이는 그런 신학이

혹시 우리를 다시 종의 영으로 가두어 두려는
원수의 기만에 일조하는 것 같은 모습을
내 삶과 이 교회 안에서
(이 교회 뿐 아니라 기독교 전체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에 

경건의 부흥이란 이름 아래
이런 비복음적인 가르침이
한 기 내내 안교에서 가르쳐지는
답답한 현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율법이라는 우상을 
오늘에 또 되살려
안으로 교인들을 군기잡고 밖으로 안식일 지키는 우리의 정당함을 드러내려는
나의 교회가 하는 못난 짓이  하도 답답하여,
시작한 얘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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