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다니지 말기

by 김원일 posted Jul 27, 2014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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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달 동안 교회 예배가 매우 우울했었다. 4월 16일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와 팔레스타인 사건 등,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예배에 반영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배를 인도하는 나도 때로는 감정이 격해져서 교우들 중에 힘든 분들고 있었으리라.

 

지난 주일에는 그 전 주일에 이어서 이번 가을에 가지려고 하는 두 행사(이웃종교와 만남, 새로운 신앙의 바람)를 염두에 두고 설교했다.

 

세월호 참변 1백일이 지났다. 서울광장에서 있었던 집회는 땅바닥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여의도 사람들은 욕을 사서 드시고 있고, 유병언 시신이 발견됐다고 해서 야단이다. 여의도 사람들이 하는 짓이나 시신을 두고 벌어지는 설왕설래에 전혀 감흥이 오지 않는다. 뭔 짓들을 하고 있는 건지 원... 그런 말을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란 말을 하기도 귀찮다.

 

오는 주일부터는 슬픔을 나누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함께 하되  희망의 싹을 찾는데 마음을 쏟는 것으로 그렇게 하려 한다.  

 

교회.

 

나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나는 목회가 하기 싫다."는, 목사로서는 기겁할 말을 했다. 설교를 직접 들은 교우들은 내가 하기 싫은 '목회'라는 게 뭔지 다 알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말도 할 수 있었지만 글로만 대하는 분들에겐 오해의 여지도 있겠다. 교회 안에서 지지고 볶고 별 일도 아닌 걸 갖고 말을 만들어내는 걸 그만두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들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하나님나라처럼 만들어가는 일에 집중하자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나라 건설'이란  말을 쓰면 큰일 날 것처럼 놀라는 걸 봤다. 하나님나라는 건설하는 게 아니라 도래하는 거라면서 말이다. 그럼, 하나님나라가 오기만을 손 놓고 기다려야 할까? 그게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일까?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이 그 나라가 오는 걸 어찌 알까.

 

주변 사람들로부터 내 글이 페북 사이즈가 아니란 말을 종종 듣는다. 글이 길다는 거다. 근데 그렇게 태어난 걸 어쩌랴! ^^ 하긴 종이를 쓰는 것도 아닌데 뭐... ㅎㅎ

 

아래 설교는 지난 주일 것인데 실제 설교보다는 좀 길어졌다. 이렇게 하려고 준비했는데 시간에 쫓겨 서두른 감이 있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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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0일 / 성령강림절 일곱 번째 주일

 

교회가 되고 싶다!

신명기 8:1-6 사도행전 2:43-47

 

곽건용 목사

 

히브리 노예들의 종종신앙

 

예수께서 부활하신지 50일 후 제자들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오순절을 흔히들 교회의 생일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좀 더 범위를 넓혀서 교회를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한다면 교회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오래 됐습니다. 첫 교회는 출애굽 한 히브리 노예들의 공동체라고 하겠습니다.

 

고대 중동지역의 종교는 예외 없이 ‘종족종교’(tribal religion)였습니다. 곧 당시 종교는 자기 종족만을 위한 신을 믿었다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한 분 하나님, 보편적인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각 종족은 예외 없이 자기 종족을 위해 존재하는 신, 자기 종족 편을 들어주는 신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 시대에는 모두가 그랬습니다. 자기 종족의 경계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의 신이란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 머리에는 보편적인 신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구약성서도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구약성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도 종족신앙의 범위를 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도 야훼 하나님을 자기 종족만을 위한 신으로 믿었던 겁니다. 다른 종족들은 야훼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여겼기에 그들은 다른 종족에게 야훼를 믿으라고 권하거나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야훼신앙에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야훼가 ‘노예들의 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고대 중동문화권에서 ‘노예들의 신’은 야훼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야훼 역시 이스라엘만을 위한 신이었고 그들을 편들어주는 신이긴 했지만 이스라엘은 왕, 귀족, 평민, 노예로 이루어진 계층사회가 아니라 전적으로 (해방된) 노예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고 야훼는 그런 노예들의 신이었다는 겁니다. 야훼가 편들었던 집단이 짐승보다 나을 게 없는 대접을 받았던 노예였던 겁니다.

 

이것은 대단한 파격이었습니다. 비록 야훼신앙이 종족신앙이긴 했지만 그 신앙을 가졌던 집단이 계층이 뚜렷하게 나눠져 있던 종족이 아니라 노예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는 사실은 종족종교 안에서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엘리트 교육을 받은 모세의 인도 아래 해방시키셨던 겁니다. 모세가 죽을 뻔 했다가 이집트 공주에게 건져져서 왕궁에서 성장하면서 이집트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장한 후 자기가 히브리 노예의 자손임을 알게 되자 모세는 그들과 동질감을 갖게 됐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왕궁에서 나와 광야로 쫓겨났습니다. 만일 그가 이렇게 하지 않고 이집트 왕궁에서 남은 생을 보내기로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게 훨씬 더 쉽게 살아가는 길이었을 겁니다. 모세의 처지에서 그처럼 결단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 많지 않은 겁니다. 모세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땅 정복 아닌 공동체 건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오랫동안 살고 있던 종족들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 말입니다. 야훼는 그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리 명령했을까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거기서 호의호식하란 뜻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땅주인을 교체하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야훼에게 새로운 게 없습니다. 갑이란 족속 대신 을이란 족속에게 땅을 주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야훼의 목적은 단순히 땅주인을 교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야훼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다른 족속의 압제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거기서 하나님의 계명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야훼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공평하게 땅을 나눠 갖고 왕 없이 평등하게 2백년을 지냈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른 족속들처럼 왕을 세우고 그의 지배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왕을 달라는 백성들과 야훼 중간에서 중재역할을 했던 사무엘이 고통을 호소하자 야훼는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어라. 그들은 네가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싫어서 저러는 거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스라엘은 다른 족속들과 똑같이 성전을 짓고 거기서 살진 짐승을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야훼에 대한 충성을 표현했습니다. 다른 족속들이 믿던 종족신앙과 다를 게 없어졌습니다. 이에 야훼는 계속해서 예언자들을 보내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야훼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야훼가 원하는 것은 실진 제물이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 야훼가 원하는 것이라 외쳤습니다. 이 점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미가 예언자의 선포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6-8).

 

결국 이스라엘은 모든 걸 잃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땅’뿐이었습니다. 사실 땅도 잃어버렸지만 땅에 대한 집착은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야훼가 그들에게 주신 게 땅만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던 가나안 땅에 대한 집착이 유독 강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지 못했는데 야훼가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 ‘은유’(metaphor)였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물론 가나안은 물리적인 땅입니다. 야훼는 그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땅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겁니다. ‘약속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이 물리적인 땅일 뿐 아니라 은유적 의미를 갖는 땅, 곧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영적인 의미의 땅’이었던 겁니다. 해방된 노예들에게 남이 갖고 있던 땅을 주는 게 야훼의 목적이었다면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었다면 그것은 ‘선수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른 종족의 신앙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입니다.

 

야훼가 원한 것은 땅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다가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땅은 은유적 의미를 가졌던 겁니다. 물리적인 땅뿐 아니라 ‘가치’까지를 의미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야훼 안에 있는 가나안’을 찾았어야 했는데 ‘가나안 안에 있는 야훼’를 찾으려 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적한 사람이 있었는데 전적으로 옳은 말이라 하겠습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셨던 것은 ‘당신 안에서’ 가나안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이라는 땅 안에 들어가서 거기 어딘가에 계시는 야훼를 찾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가나안 안에서 야훼를 찾으려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태가 벌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독점하겠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축복의 독점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 되기

 

요즘 팔레스타인 사태가 벌어니까 고대 이스라엘과 지금 이스라엘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교적 진보적인 목사들과 학자들에 의해 이런 주장이 이루어지는데 저는 이게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지금 이스라엘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야훼가 원하는 게 땅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가나안 족속을 도살했는데 지금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란 얘기입니다. 저는 이들이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압니다.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현대 이스라엘과 같지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서와 이스라엘을 옹호하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야훼가 원하는 것은 땅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됐을까요?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요? 야훼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를 통해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는 ‘통로’로 삼았습니다.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특권’을 누리는 것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복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게 하는 복의 통로가 되는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와 다른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나라의 청사진이 어떤 것인지 세상에 보여줬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참여하는 ‘잔치’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나라 복음이었습니다. 거기엔 어떤 자격이나 조건 같은 것이 없습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회개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는 거죠. 그럴듯합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고 외치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외친 회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입학시험’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 두려워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맛본 사람이 자기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참회하고 거기서 돌이키는 걸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와 다른 사람이나 종교가 내세우는 회개가 여기서 갈라집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과 같은 의미의 회개를 외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닥쳐온 심판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당시 세상에 보여준 것은 차별 없음과 장벽 무너뜨리기, 그리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형제자매 되기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임을 보여주는 표징이었습니다. 여기에 그 어떤 특권이나 독점 같은 것을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믿음은 비기독교인들은 누릴 수 없는 기독교인만의 특권이 아니었고 구원을 얻는 조건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교회 상황은 어떻습니까? 거칠게 요약하면 그동안 교회는 예수께서 무너뜨린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세워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교회엔 갖가지 차별이 존재합니다. 남녀차별은 물론이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 성적 지향의 차이로 인한 차별 역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진정 형제자매입니까? 그것은 오직 호칭으로만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좋게 보려고 해도 오늘날 대부분 교회는 예수께서 무너뜨린 것들을 다시 세우는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집단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집단은 예수의 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저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정들을 다 안다고 해도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줄곧 교회 아닌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돌이키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교회 되기가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지 않습니까.

 

잠자고 있는 이타심 깨우기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삶을 움직이느냐, 삶이 생각을 움직이느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몸의 일부가 뜨거운 것에 닿으면 순간적으로 움츠립니다. 무엇이 갑작스레 눈앞에 다가오면 눈을 감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훈련을 통해 눈감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눈을 감습니다. 반사신경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반사신경은 사람이 오랫동안 진화해온 결과로 생겨나 유전시켜온 겁니다. 사람이 위험을 느꼈을 때 그걸 피하는 건 당연한 행동이란 얘기입니다. 위험 앞에서는 머뭇거릴 이유도 여유도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이 보이는 행동은 반사신경의 지시와 반대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대부분은 순간적으로 갈등합니다. 순간적이지만 자신의 안전과 상대방의 급박함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이런 경우 타인의 위험을 전적으로 외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잠시라도 갈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타인의 위험을 모른 척 넘어가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위험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구하려 합니다. 후자도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이 없을 리 없지만 그래도 움츠려들지 않고 남을 구하러 뛰어듭니다.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안전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돕게 만들까요? 세월호 참사에도 남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윤철, 최혜정, 이해봉 선생님은 학생들을 구하다 죽었습니다. 양온유, 김주아, 최덕하, 정차웅 학생도 친구를 구하다 꽃 같은 청춘을 마감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내의 바람으로 도망칠 때 양대홍 사무장과 박지영 승무원은 승객을 구하다 목숨을 잃었고 김기웅, 정현선 커플도 같은 일을 하다가 목숨을 바쳤습니다.

 

‘강남좌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남에 사는 부자가 좌파성향을 갖고 있을 때 그를 강남좌파라고 부릅니다. 강남 사는 부자와 좌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데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강남좌파는 많은 걸 가졌으면서 좌파성향을 가질까요? 왜 그들은 부자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하고 그들 입장을 옹호할까요? 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대주교라는 자리에 있었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편들다가 총 맞아 죽었을까요? 그러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데 왜?

 

누구나 짐작하듯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기본적으로는 남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게 사람입니다. 생존을 위한 긴 진화과정에서 그렇게 발달해온 것이겠죠. 하지만 동시에 사람에게는 이타적인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손해를 무릅쓰고 남을 돕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남을 구하기도 하는 게 사람입니다. 이런 성향은 어디서 생겼을까요?

 

이타적인 면이 무슨 돌연변이 같은 게 아니라 본래부터 사람 유전자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이타심이란 게 있다는 얘기죠. 저는 학문적으로 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지만 경험으로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타심이란 게 있지만 그것이 환경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다는 거죠. 여기서 환경이란 탐욕을 키우는 이기적인 환경, 돈이면 모든 게 용납되는 물신주의적 환경을 가리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사람의 유전자 안에 있는 이타심이 기를 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잠자고 있는 이타심을 깨워주면 그것은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잠자는 이타심을 깨우는 일 말입니다. 물론 교회가 독단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교회의 주님인 나사렛 예수께서 그런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이렇듯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물 주고 거름 줘서 이타심을 기르는 곳이고 그렇게 삶으로써 예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지요.

 

오늘 읽은 사도행전 2장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초대교회가 이런 모습을 오래도록 유지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 기간이 길지 않았더라도 초대교회는 이런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이 기억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부터 시간적으로나 장소로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네 유전자 어딘가에 그들의 업적이 기억으로 남아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번 가을에 하려고 준비하는 두 가지 행사가 또 하나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행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하지만 저는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저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


노란 색상배경은 퍼온이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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