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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몇 주에 걸쳐서 계속 주일예배 설교에서 교회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지난 주일에도 그랬다. 본문은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으로 정해놓고 제목을 고민하다가 '평범하게' 정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지난 주일 설교 올리면서 얘기했듯이 세월호 참변 이후로 교회 예배가 너무 무겁고 우울했기 때문에 분위기를 전환해야 할 필요를 느꼈는데 아직은 제대로 전환되지 않은 거 같다. 하긴 그게 인위적으로 전환하려 한다고 그리 되는 건 아닐 터이지만.


다른 목사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대체로 설교 준비할 때 전문을 다 쓰는 걸 원칙으로 한다.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설교를 할 때는 원고를 그대로 읽지는 않는다. 원고에 있는 걸 빼먹기도 하고 없는 걸 넣기도 한다. 그걸 흔히 '성령의 인도로'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데 난 그것까진 모르겠고 설교를 하면서 떠오르는 얘기를 즉석에서 하곤 한다. 지난 주일에도 그런 대목이 있었다. 그래서 따로 올린 녹음과 이것과는 적지 않게 다르다.


오랫동안 Lectionary에 따라서 설교했었다. 아다시피 그것은 3년을 주기로 하는데 그걸 세 번 정도 하니까 너무 반복되기에 그 다음에는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본문 정해서 설교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데 그건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걸 설교하게 되는데 그것이 교우들에게도 그런가 하는 점이다. 그게 고민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책이 없네. 나와 교우들의 관심사가 만나기를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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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7일 / 성령강림절 여덟 번째 주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린도전서 12:4-13

곽건용 목사


지금 돌이켜보니

얼마 전에도 프리모 레비(Primo Levi)라는 사람에 대해서 잠깐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인데 본래는 과학자였지만 수용소 경험을 한 후에 작가가 되어 거기서 했던 경험을 책으로 써서 남긴 사람입니다. 그는 1980년대 말 느닷없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지요.


그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다가 한 부분에서 읽기를 멈춰서 꼼짝 못한 경험이 있습니다. 책의 첫 부분이었는데 이런 대목이었습니다. 독일군이 그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계 유대인들을 기차에 싣고 어디론가 갔답니다. 6백 명 정도 되는 유대인들을 열두 량의 기차에 싣고 어딘가로 데리고 가더란 거죠. 기차는 사람을 싣고 나서도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더니 이윽고 저녁이 되자 서서히 움직이더랍니다. 누군가가 독일 군인에게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가 ‘아우슈비츠’라고 대답했답니다. 레비는 그 장면을 이렇게 썼습니다. “아우슈비츠. 당시로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이름이었다. 어쨌든 이 세상 어느 곳엔가 존재할 어떤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일 뿐이었다.”


저는 왠지 이 대목에서 멈춰 서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엔 아우슈비츠를 모르는 사람도 없진 않겠지만 유대인이나 독일인이 아닌 우리도 아는 그 이름을 레비는 그때 처음 들었나 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지금은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습니까.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며 멈춰선 이유는 ‘아, 역사란 진정 이런 건가……. 나중에 돌이켜봐야 그때 그게 그런 의미였음을 알게 되는 게 역사인가…….’하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저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와 관련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 받은 지 올해로 23년째입니다. 전도사 생활을 1982년에 시작했으니까 그것까지 합하면 올해로 목회자 생활 32년째입니다. 연세 많은 어르신들께는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일 수도 있지만 32년이라면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닙니다. 저는 그 동안 세 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했습니다. 32년 동안 세 교회면 많은 교회를 옮긴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첫 번째 교회는 예장 합동측 신용산교회로 저는 거기서 주말에만 일하는 파트타임 교육전도사로 3년 일했습니다. 두 번째 교회는 서울 향린교회인데 거기서는 전도사, 준목, 부목사로 8년 11개월을 일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교회는 우리교회인데 여기서 담임목사로 올해가 21년째입니다.


돌아보면 제가 목회하는 동안 크고 작은 위기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 중에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는 서울 향린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인 1987년의 일입니다. 그때는 홍근수 담임목사님 부임 직후였고 저는 신학교 졸업반으로서 전도사 된지 얼마 안 됐을 때입니다. 아직 교회가 뭔지, 목회가 뭔지 잘 모를 때였지요. 홍 목사님은 거의 20년 가까운 미국생활을 마감하고 향린교회에 부임한 직후였습니다. 그때 교회 리더들은 홍 목사님 스펙을 보고 청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울대 법대 출신에 미국 유학해서 박사학위도 받으셨고 보스턴 교회에서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목회하신 분이기에 선뜻 청빙하기로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오판이었던 겁니다. 홍 목사님은 교회 리더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래디컬하고 열린 목회자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교회 리더들 간에 신앙적, 신학적 노선을 두고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청년부를 지도하고 있던 저도 그 갈등의 원인 제공자 중 하나였으니 무관하달 수는 없었습니다.


긴 갈등 끝에 결국 교회 리더들이 대거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전에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 일을 방해했습니다. 교회 안 나오기, 예배 불참하기, 헌금 안 내기, 헌금 빈 봉투 내기 등의 방법으로 목회를 방해했던 겁니다. 당시 리더들은 사회에서도 상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양한 전문직 종사자, 대기업 간부, 교수 등 그야말로 대한민국 상위 5% 안에 드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때 그들의 적나라한 ‘민낯’을 봤습니다. 저는 점잖은 교인들이 그런 행동을 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고 교회에서 그런 추한 일이 벌어지리라곤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교회재정이 급속히 악화된 것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목회자 사례를 30% 감액하자는 건의를 당회에 냈습니다. 저야 그때 미혼이었으니 줄여도 그런대로 살 수 있었지만 다른 목회자들은 모두 가정을 갖고 있어서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회는 다른 지출은 줄여도 그것만은 줄일 수 없다고 해서 이를 반려했습니다.


이때가 향린교회 역사상 가장 큰 위기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때 교회 출석도 뜸하던 청년교인들이 똘똘 뭉쳐서 교회를 지켜내고 안정시켰습니다. 청년교인들은 제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단합하고 헌신적으로 행동해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으로 떠날 때쯤에는 교회는 안정적으로 사회적인 선교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때 교회가 과연 무엇인가,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나름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길을 잃었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


두 번째 위기는 미국에 온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제가 1993년 11월에 미국에 왔는데 그때 교인 숫자는 약 30여 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1월에 노스리지 지진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자산 가치보다 더 많은 빚을 안고 있던 교회 건물을 버려야 했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건물이 위험하다 하여 시(市)에서 건물 출입을 금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잘 됐다고 말하는 분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예배드릴 건물을 얻어야 했습니다.


약 석 달 동안 찾아다닌 끝에 글렌데일에 있는 한 남미계 성공회 교회 건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이전 자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교인 중 약 30% 정도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회 노선을 두고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교인들 중에는 이른바 친북인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원로목사님부터 북에서 내려오신 실향민으로서 북에 가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일을 하고 계셔서 이를 계기로 교인 된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미미하지만 통일운동을 하던 사람이지만 북쪽 조국에 대한 입장은 그분들과 달랐고 또 교회는 교회로서의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분들도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이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의 위기를 만났던 겁니다. 이때 저는 어떻게 하면 교회를 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근본적으로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왜 나는 목회를 하는가 등등을 더 많이 생각했고 그것이 제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저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지만 등산에 대해서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잃으면 이리저리 헤매지 말고 근처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라더군요.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가 보인다는 겁니다. 저는 이게 맞는 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삶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라, 원칙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이를 교회에 적용하면 교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대체 왜 모였을까?


교회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돌아봅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음에 분명합니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인 왕이나 메시야, 구세주로 믿었던 분이 그토록 초라하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니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법도 합니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천군천사들이 내려 보내 그분을 구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을 겁니다. 그 기대조차 허물어졌을 때 그들이 받았던 충격과 실망은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겠지요. 이 사건을 겪은 제자들의 선택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숨는 것이고 둘째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 엠마오 고향으로 가던 두 제자가 후자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두려워 숨거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 부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겠지만 부활한 예수를 직접 봤거나 만났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줄을 잇자 반신반의했겠지요. 과거에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소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여기저기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증언이 쏟아지자 부활은 점차 기정사실이 되어갔겠지요. 그래도 미심쩍어 하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도마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도마에게 예수께서 직접 나타나서 자기 상처를 만져보라 했다고 요한복음은 전합니다.


그만하면 예수 부활은 확인이 됐을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전에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 예고까지는 했지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다음엔 어떻게 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요. 마태복음 28장에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예수께서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것은 제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척 고민했을 겁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세례를 주고 예수님 말씀을 가르치라는, 이른바 선교 명령을 실천해야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말입니다.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결론은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예수의 말씀을 가르치려면 ‘흩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반대로 모이기로 했다니 그게 놀랍지 않느냐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왜 그들은 예수의 마지막 명령에 역행하는 것 같은 결론을 내렸을까요? 왜 그들은 흩어져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모이기로 했을까요? 숨어서 활동했다면 위험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모였을까요?


그들은 모이는 것 자체가 곧 ‘선교’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곧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선교라고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어려운 말로 이해하지는 않았겠지만 내용은 그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선교라는 말은 세상의 지배적인 집단들과는 성격이 다른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곧 선교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사회학에서는 ‘대조사회’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는 스스로를 대조사회가 되라고 부름 받았던 겁니다.


막무가내로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공동체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2장은 초대교회라는 대조사회의 한 단면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만의 탤런트를 갖고 태어납니다. 교회 안에도 다양한 탤런트를 가진 사람이 모이는 게 당연합니다. 신약성서는 탤런트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카리스마)라고 부릅니다. 흔히 ‘은사’를 특별한 재능으로 여기지만 사실 은사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딴 사람 아닌 그 사람에게 주신 것이니 특별하긴 하지만 어떤 은사는 특별하고 다른 은사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건 옳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가 네가 받은 은사보다 더 낫다거나 더 가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은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거기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은사는 모두 소중한 것이지, 거기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은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확실히 당시 사회가 허용하는 모습의 공동체와는 달랐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대조사회였던 겁니다. 여러 면에서 그랬지만 오늘은 가장 인상적인 것 하나만 얘기하겠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철저하게 계급사회였습니다.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의 구분이 확고했다는 겁니다. 귀족은 평민이나 노예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평민과 노예 사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선 그렇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가 어떤 공동체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교회가 남긴 기록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교회 바깥에서 남긴 기록도 적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중에 한 문서는, 제 기억에는 로마의 한 관리가 교회를 비밀리에 ‘사찰’하고 나서 로마 당국에 보고한 문서인데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제 기억에 의존해서 말하는 것이니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들(교회 구성원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서로를 무조건적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이상한 집단입니다.”


이렇게 보고한 관리는 교회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뜻으로 그렇게 썼습니다. 신분과 계급의 차이가 엄연한데, 그것을 유지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기독교인들은 그걸 무시하는 ‘미개한’ 사람들이란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시대를 엄청나게 앞서간 선진적인 공동체,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맺어진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로 이해하지 않습니까. 이래서 교회는 존재 자체가 선교였다고 말씀한 겁니다.


다시 말씀하지만 교회는 존재 자체가 선교여야 합니다. 곧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실제로는 선교를 하고 있는, 그런 공동체여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의 교회는 세상의 지배적인 질서와는 전혀 다른 질서를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공동체,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 이끌어가는 공동체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몸은 머리가 생각하는 걸 실행하는 개체이고 조직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머리인 그리스도께서 생각하고 구상하는 걸 실행에 옮기는 조직이어야 하겠지요. 그리스도께서는 예전에 그랬듯이 오늘도 교회인 우리더러 대조사회가 되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가치관을 구현하는 공동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공동체, 그래서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모습을 갖춘 공동체가 되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의 존재이유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공동체가 됨으로써 존재 자체가 선교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노란 색상배경: 퍼온이의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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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진 2014.08.08 23:1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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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중 2014.08.09 02:09
    응잉!! 와~ 내말이 이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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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청년 2014.08.15 21: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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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이슬 2014.08.16 00:52
    지난 안식일, 교회에 참석하지 못하였을때
    관건용 목사님의 은혜스러운 설교말씀을 읽고
    마음의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읽은 즉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새로운 안식일이 되었네요.
    곽건용 목사님의 설교 말씀과 올려주신 김원일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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